이사 온 지 얼마 안 되는 아랫집에 아기가 태어났다. 이름처럼 푸르게 넘실거릴 듯한 엄마에게서 태어난 작은 아기 이름은 정겹게도 ‘살구’란다. 눈발까지 내리는 날인데 나와 아버지는 산골 추위를 헤치고 나무하러 간다. 눈 내리는 솔숲에서 얼굴과 손발이 얼마나 시리고 추위에 온 몸이 뻣뻣하게 굳을까. 살구에게 선물하기 위해서다. 살구가 태어났으니 이제 ‘살구네 마당’이 되고, ‘살구네 식구’라 불리는, 살구네 집에 가져다주려고. 보일러도 없이 장작으로 불 피우는 살구네 집에 이보다 더 요긴하고 소중하고 정성 가득한 선물이 또 있을까. 이제 살구네 집은 ‘따듯’보다도 더 뜨겁고, ‘따뜻’보다도 더 은근하게, 오래도록 환히 ‘뜨뜻’해리지라.
행여 이상화, 낭만화 된 시골 풍경으로 여겨진다면 이 시를 내밀고 싶다. “외할아버지 오신다고/아버지는/내가 친구처럼 키우던 닭을 잡았다.//너무 화가 나고 슬퍼서/이불 속으로 들어가 한참 울었다.//그런데//얼마 뒤, 어머니가 닭을 푹 고아/상 위에 올려놓았는데,/나도 모르게 입에 침이 고이고/어느새 내 손에 닭고기가 들려 있다.//아버지가 나를 보고/씨-익 웃으신다.//나도 아버지를 보고/씨-익 웃었다.(‘닭 잡는 날’ 전문)
요즘 도시에서는 채식주의를 표방하는 이들이 늘어나고, 이는 지극히 환경 파괴적이고 인간중심적인 현대 문명에 대한 최소한의 저항과 반성, 책임의식으로 여겨진다. 하지만 반생명적인 공장제 축산업이 아니라 산골 마을에서 직접 닭 몇 마리를 키우며 특별한 날에 육식을 취하는 형태라면 그저 ‘씨-익’ 즐겁고 기쁘게 받아들일 일이다. 산밭에 콩을 심으며 “한 알은 벌레가 먹고/한 알은 새가 먹고/한 알은 우리가”(‘콩 세 알’ 부분) 먹자고 노래하는 마음과 크게 다르지 않다.
이 시집은 그러한 삶의 터전과 철학을 ‘씨-익’ 웃으며 자연스레 받아들인 어린이의 목소리로 말한다. 어린이는 친구들의 집과 얼굴을 떠올리며 하늘의 별자리처럼 이어보고(‘서로 손잡고’) 천년 넘은 이팝나무를 보며 앞으로의 천년을 상상하는(‘오월’) 원대한 시공간을 살아간다. 자연이어서, 가능한 일이다.
김유진 어린이문학평론가ㆍ동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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