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 아파트 공화국의 해법
100년 버틸 장수명 주택, 도시형 생활주택 등이 대안
3일 서울 시내 한 아파트 단지의 모습. 뉴시스

영국의 주택 평균 수명은 128년이다. 미국도 72년에 달한다. 반면 우리나라 아파트의 평균 수명은 29년에도 못 미친다. 무엇이 이러한 차이를 만든 것일까. 가장 큰 이유는 배관이다. 영국과 미국은 건물 구조체에 배관이나 배선을 매립하지 않는 100년 주택(장수명 주택)을 짓는다. 그러나 우리나라 아파트는 배관을 바닥에 매립해 배관의 수명이 다하면 건물의 연한도 끝난다. 국토교통부 관계자는 5일 “건물의 뼈대가 되는 콘크리트는 현 기술 수준으로도 100년 이상 버틸 수 있지만 우리나라 아파트의 배관 수명은 30~40년에 불과해 이를 뜯어고치기 위해선 건물 자체를 헐 수 밖에 없는 구조”라고 말했다.

아파트가 재테크 수단으로 전락하며 일부 건설업자들이 재건축 사업을 부추기고 주민들도 이를 통해 자산을 키우길 바란다는 점도 한국만의 특성이다.

그러나 30년 마다 구조상으로는 멀쩡한 아파트를 부수고 다시 짓는 것은 자원의 낭비를 떠나 수 많은 부작용을 낳고 있는 게 현실이다. 더구나 산업화 과정에서 급속하게 늘어난 도시 인구에 맞춘 대규모 아파트 공급이 이미 고령화가 가속화하면서 생산가능인구가 줄고 있는 상황에서 계속 유효할 것인지에 대한 의문도 적잖다.

[저작권 한국일보]장수명 주택_신동준 기자/2018-12-05(한국일보)

이에 따라 ‘아파트 공화국’에서 탈출하기 위한 대안 주거 방안들 중 가장 눈길을 끄는 것은 100년 주택 공급을 늘리는 것이다. 장수명 주택을 매년 31만4,000가구(전용면적 85㎡ 기준)씩 건설할 경우 향후 100년 동안 연 평균 22조원의 건설 비용을 아낄 수 있다는 게 전문가들 추산이다. 정부도 1,000가구 이상 공동주택에 대해 장수명 주택 인증을 받도록 의무화해 이를 장려하고 있다. 장수명 주택은 보와 기둥이 전체 건축물의 하중을 받치는 기본 구조는 일반 주택과 같지만 벽을 쉽게 짓고 부술 수 있는 경량벽체로 시공한 게 특징이다. 건물 전체를 허무는 재건축을 하지 않아도 가구 구성원들의 필요에 따라 거실이나 주방 등의 내부 구조도 자유롭게 바꿀 수 있다. 특히 구조체에 배관이나 배선을 매립하지 않아 유지보수 비용이 적고 배관이나 배선 공사를 할 때도 위아래 층 허락이 필요 없다.

그러나 100년 주택은 강제성이 약한 인증제에 불과해 건설업계에선 시큰둥한 반응이다. 현행 장수명 주택 인증 등급은 내구성, 가변성, 수리 용이성 등 3가지 요소를 평가해 최우수, 우수, 양호, 일반 등 4개 등급으로 인증을 하고 있다. 이중 일반 등급 이상만 받으면 시공에 아무런 제약이 없다. 일반 건설사들은 장수명 주택을 지을 경우 초기 사업비가 10~20% 가량 증가하는 점을 들어 시공 때부터 일반 등급 인증을 신청하고 있다. A건설사 시공 총괄 책임자는 “100년 주택 우수 등급을 받는 것보다는 일반 등급을 노리고 건물을 짓는 게 이익이 훨씬 더 남는다”고 털어놨다. B건설사의 임원도 “어떤 건설사가 눈 앞의 이익을 제쳐두고 100년 뒤 이익을 고려하겠냐”고 반문했다.

전문가들 사이에선 도시형 생활주택이 새로운 주거 대안이 될 수 있을 것이란 전망도 나온다. 출산율 감소로 인해 3인 이하로 가구 구성원 수가 줄어들고 1인 가구도 폭증하고 있는 상황을 감안하면 기본적으로 복수의 방과 거실로 틀이 고정화된 아파트보다는 소규모 가족에 적합한 도시형 생활주택에 대한 수요가 늘 수밖에 없다는 논리다. 지난해 9월 원주기업도시 도시형 생활주택(단독주택용지) 청약 경쟁률이 최고 1만9,341대 1로 나온 것도 이러한 수요를 반영한다.

고령화로 주거비 경감의 필요성이 커지면서 아파트보다는 일반 단독 주택에 대한 인기가 커질 것이란 주장도 제기된다. 주택산업연구원은 ‘2025년 미래주거 트랜드의 변화’ 보고서를 통해 “관리비 부담을 크게 느끼는 은퇴 세대들이 아파트가 아닌 에너지 생산 혹은 저에너지 주택에 높은 관심을 보이고 있다”며 “저성장 기조 장기화와 첨단화에 대한 피로감이 쌓이면서 단독주택에 대한 수요가 전 세대에 걸쳐 증가할 것”이라고 예상했다.

4차 산업혁명을 통한 공동체 중심의 기술 발전이 전제되면 아파트 일변도에서 벗어나 다양한 주거 문화가 나타날 수 있다는 목소리도 높다. 일반 주택 단지를 하나의 유기적인 보안 및 주거 복지 단위로 묶거나, 현재의 셰어하우스 혹은 게이티드 커뮤니티(gated communityㆍ자동차와 보행자의 유입을 엄격히 제한하고 보안성을 향상시킨 주거 지역)가 기술적으로 진화하는 형태다. 보안이나 공동시설을 패키지로 공급하는 기존 아파트의 장점을 기술 발전으로 연립주택이나 다가구ㆍ다세대 지역에 차용할 경우 커뮤니티 주택군이 아파트 단지보다 더 매력적일 수도 있다.

노희순 주택산업연구원 책임연구원은 "이미 한국의 도시는 포화 상태에 이르렀고, 집을 지을 땅이 있어도 이를 받쳐 줄 도로 등 서비스 용지는 턱없이 부족한 상황"이라며 "진정한 의미의 도시재생 사업을 적극적으로 시행해 인프라를 잘 다듬어준다면 미래 주거 대안이 자연스레 나타날 것"이라고 전망했다. 조주현 건국대 교수는 “한국 특유의 학군 문화를 없애고 복지 환경을 교외로 분산하는 등 국가적 노력이 동시에 이뤄져야 진정한 주거 다양성이 확보될 것”이라고 강조했다. 정재호 기자 next88@hankookilbo.com

세종시 2-1 생활권 M3블록에 국내 최초 장수명 주택이 지어지고 있다. 총 1,080가구 규모의 이 주택은 내년 6월 완공될 예정이다. LH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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