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T 블랙아웃’에 작동되는 ATM 앞 줄서고 행인 휴대폰 빌려
112 신고 먹통… 119 신고 안 돼 70대 심장마비 사망설도
“먹통인 휴대폰은 벽돌과 다름 없어서 석기시대로 돌아간 기분이었어요.”
서울 마포구에 사는 직장인 박소라(25)씨는 24일 암흑 같은 하루를 보냈다. KT 아현지사 통신구 화재로 휴대폰은 물론 인터넷과 인터넷TV(IPTV)마저 불통이었기 때문. 화재 연기가 집 안까지 들어올 정도로 사고 현장 인근에 살고 있어서 큰 불로 번졌다면 가장 먼저 대피했어야 할 박씨는 정작 관련 뉴스는 물론이고 안전안내문자 한 통 볼 수 없었다. 휴대폰은 25일 새벽 겨우 연결됐지만, 인터넷과 TV는 이날 오후까지도 작동하지 않았다.
KT 통신구 화재로 마포 서대문 은평 용산 중구 등 서울의 5분의 1에 해당하는 서북 일대가 ‘IT 블랙아웃(정보통신 대규모 불통 사태)’에 빠졌다. 통신선 하나가 끊겼을 뿐인데, 금융 치안 의료 교통 소비 여가 등 일상의 모든 부분이 정지됐다. 일부 도심 기능 역시 마비됐다. 생활의 불편 정도를 감안하면 국가 재난이라 불려도 할 말이 없을 정도다. 국가기간시설 관리는 모래 위에 지은 집에 불과했다. IT 강국이라는 자부심은 순식간에 무너졌다.
◇ ‘벽돌’ 된 휴대폰, 공중전화 앞에서 발 동동
가장 큰 불편은 휴대폰 불통이었다. 스마트폰 주요 기능인 인터넷은 물론 통화마저 안 되면서 주말 나들이를 나선 시민들은 발을 동동 굴러야 했다. 길이 엇갈릴까 봐 약속 장소 인근에서 하염없이 기다리거나, 전화를 걸기 위해 공중전화 앞에 줄을 서는 등 1990년대에나 볼 법한 모습이 목격됐다. 행인에게 휴대폰을 빌려 통화하는 사람도 눈에 띄었다. 24일 홍대입구역 내 공중전화 앞에서 만난 이예린(24)씨는 “역 인근에서 친구를 만나기로 했는데 연락이 안 돼 공중전화로 전화를 걸어봤다”며 “상대방도 KT 휴대폰을 쓰는지 연결이 안 된다”고 울상을 지었다.
인터넷이 먹통인 지역(마포 서대문 은평 용산구 일대)에서 무선인터넷이 되는 여의도, 종로 일대로 유목민처럼 떠돌아다니는 이들도 여럿 있었다. 신촌의 한 카페에서 만난 현모(26)씨는 “KT 와이파이를 사용하지 않는 곳을 찾느라 온갖 카페를 돌아다녔다”며 “어렵사리 찾아도 이미 자리가 차서 앉을 곳이 없었다”고 말했다.
◇“카드 결제 안 돼요” ATM 앞에 늘어선 줄
통신 장애는 신용카드 결제 대란을 불렀다. 가맹점-결제대행업체(VANㆍ밴사)-카드사로 이어진 결제 정보 전달에 문제가 생겨 카드 결제가 되지 않는 것. 유동 인구가 많은 신촌, 홍대 인근 가게 곳곳에는 현금 결제나 계좌 이체를 부탁하는 안내문이 붙었지만, 설상가상 KT망을 이용하는 현금자동입출금기(ATM)도 먹통이 된 지 오래였다. 그나마 작동(다른 통신망 사용)되는 ATM 앞에는 현금을 인출하려는 사람들로 장사진이었다.
금융위원회에 따르면 마포 서대문 은평 일대에서 서비스가 중단된 ATM은 4개 은행, 179대로 집계됐다. A은행 관계자는 "25일 오전까지 15대의 복구가 완료됐고 나머지 7대는 SK브로드밴드 통신망을 우회해 이용하기로 했다"고 설명했다. B은행은 자동화기기 96대의 서비스가 중단돼 대체 회선으로 복구 조치를 했다. C은행은 상담센터 업무와 ARS 인증 업무가 먹통이 되기도 했다
주말 장사를 망친 상인들도 큰 타격을 입었다. 카드결제단말기뿐 아니라 판매정보관리시스템(POS)마저 작동하지 않아 손으로 거래장부를 작성하는 가게도 있었다. 마포구 캐릭터매장에서 일하는 정윤철(28)씨는 “24일 매출이 평소 대비 30%가량 감소한 것 같다”며 “물건 하나하나 가격을 보면서 계산해야 하는 탓에 어려움을 겪고 있다”고 토로했다. 인터넷 회선이 70% 복구된 25일 오전에도 카드결제단말기가 작동하지 않는 가게가 많아 이날 하루 휴업하는 매장도 적지 않았다. 24일 중구 소재 병원을 찾았다가 카드결제를 해야만 차단기가 열리는 지하주차장에 30분 동안 갇혔다는 시민도 있었다.
◇촌각 다투는 치안, 의료도 차질
생사가 오가는 병원과 신고가 떨어지면 즉각 출동해야 하는 일부 지구대ㆍ파출소도 화재로 인한 통신 대란을 비켜가지 못했다. 신촌 세브란스병원은 의료진 간 호출 콜이 먹통이 되면서 병원 안내방송으로 의사를 찾는 상황이 벌어졌고, 외부통신망도 끊겨 예약이나 각종 문의전화도 제대로 받지 못했다.
25일 오전에는 통신 마비로 119 신고가 제때 이뤄지지 않아 마포구 용강동에 사는 70대 노인이 심장마비로 숨졌다는 주장이 나왔다. 소방청 관계자는 “119 같은 긴급신고는 KT통신이 제 기능을 못해도 자동전환시스템을 통해 다른 통신사 회선으로 바로 전환, 연락할 수 있도록 돼 있다”며 “정확한 사실관계를 파악 중”이라고 밝혔다.
경찰청에 따르면 25일 오전까지 서대문 마포 용산경찰서의 112 신고시스템이 정상 작동하지 않았다. 112 신고는 지방경찰청 상황실에서 접수한 신고를 관할 경찰서 상황실로 전파하는 방식으로 처리되는데, 지방청 상황실과 관할서를 연결하는 시스템이 불통이었던 것. 이로 인해 각 관할서 직원이 서울경찰청 상황실로 파견을 가 지구대 및 파출소에 직접 상황을 전달해야 하는 상황이 발생했다. 경찰 관계자는 “KT 회선을 이용하지 않는 순찰차 태블릿PC는 정상 작동하고 있어 신고 하달 및 처리에는 문제가 없다”고 밝혔다. 용산구에 위치한 국방부는 직통 연결망을 제외한 내ㆍ외부 통신망이 두절된 것으로 전해졌다.
서대문과 마포구 일대 정류장에 설치된 버스도착시간 안내서비스도 24일 하루 이용이 불가능했다. 길을 안내하는 내비게이션도 작동하지 않았고 기름을 넣으려 해도 주유소에서 카드 결제가 되지 않았다. 공공장소에 있는 구청 무인민원발급창구도 ‘서버 연결 실패’라는 안내만 떴다.
KT에 따르면 25일 오후 6시 기준 인터넷 불통 피해는 21만5,000명으로 추산된다. 휴대폰 먹통 피해를 비롯해 일상에서 각종 피해를 입은 인원이 얼마나 되는지는 밝혀지지 않고 있다.
강진구 기자 realnine@hankookilbo.com
박세인 기자 sane@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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