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획적 범행 증거 있다” 다국적 독립 수사기구 구성 제안
레제프 타이이프 에르도안 터키 대통령은 23일(현지시간) 사우디아라비아 반정부 언론인 자말 카슈끄지 피살과 관련 “철저하게 계획된 살인”이라고 밝혔다. 또 사우디 정부를 겨냥, 체포된 18명의 배후에 대한 조사를 촉구하면서 진상을 밝힐 다국적 독립 수사기구 구성을 제안했다.
에르도안 대통령은 이날 정의개발당(AKP) 의원총회에서 카슈끄지의 죽음을 “야만적인 방식으로 목숨을 앗아간 살해”로 규정한 뒤 “사전에 범행을 계획했다는 강력한 증거를 갖고 있다”고 주장했다.
그에 따르면, 카슈끄지는 지난달 28일 오전 11시50분 주이스탄불 주재 사우디 총영사관을 찾았다. 재혼에 앞서 전처와의 이혼 확인 서류를 떼기 위해서였다. 이에 총영사관 측은 “시간이 걸린다”며 카슈끄지를 일단 돌려보냈다. 에르도안 대통령은 “당시 방문을 계기로 살해를 모의하기 시작했다”고 말했다.
이후 사우디 요원들이 바삐 움직였다. 총영사관 직원들이 본국을 오가더니 사건 전날인 이달 1일 오후 4시30분, 선발대 3명이 이스탄불에 도착했다. 그 사이 총영사관에서 보낸 요원들은 이스탄불 북부 벨그라드숲과 보스포루스 해협 남동쪽 얄로바시를 사전 답사했다.
범행 당일인 2일 새벽 1시45분, 사우디인 3명이 민항기 편으로 입국해 호텔에 묵었고 뒤이어 장군을 포함한 9명이 전세기편으로 도착해 다른 호텔로 이동했다. 이처럼 암살조 15명은 3개 팀으로 나뉘어 카슈끄지의 목숨을 노리며 만반의 준비를 갖췄다.
카슈끄지는 2일 오후 1시30분쯤 다시 방문할 예정이었다. 이에 15명은 오전 9시50분부터 하나 둘 총영사관으로 모여 감시카메라의 하드드라이브를 제거했다. 오전 11시50분에는 카슈끄지에게 전화를 걸어 방문 일정을 확인하는 치밀함을 보였다. 카슈끄지는 오후 1시8분쯤 총영사관에 들어갔다가 이후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기다리던 약혼녀 젠기즈는 오후 5시15분 터키 당국에 “총영사관에 억류된 것 같다”며 실종신고를 했다. 이때부터 터키가 수사에 나섰다. 이 같은 구체적 정황은 카슈끄지가 몸싸움 과정에서 우발적으로 사망했다는 사우디 정부의 발표를 정면으로 반박하는 것이다.
에르도안 대통령은 “일부 요원들에게 책임을 전가해서는 안 된다”며 꼬리 자르기에 급급한 사우디 정부의 책임을 추궁했다. 이어 “카슈끄지의 시신은 어디에 있는가”, “왜 영사관은 바로 수색을 허가하지 않았는가”, “왜 15명의 사우디 팀이 터키에 있었는가”라고 사우디에 반문하면서 “여러 나라들이 참여한 독립된 위원회를 구성해 이번 사건을 수사해야 한다”고 촉구했다. 아울러 용의자 15명을 포함, 총영사와 운전기사 등 사건 연루자 18명에 대해 “이들 전원은 사우디가 아닌 터키에서 재판 받고 처벌돼야 한다”고 강조했다.
다만 무함마드 빈 살만 사우디 왕세자에 대해서는 “수사과정에서 적극 협조할 것으로 확신한다”며 직접 화살을 겨누지 않았다. 그럼에도 사건 발생 장소인 터키의 대통령이 직접 마이크를 들고 선봉에서 온갖 정황증거를 제시하며 수사를 촉구하면서 사우디는 궁지에 몰려 옴짝달싹 못하는 처지가 됐다. 가뜩이나 국제사회가 사우디 정부의 은폐 의혹을 제기하며 온갖 비난을 퍼붓는 상황에서 제대로 협조하지 않을 경우 또다시 직격탄을 맞을 가능성이 커졌다.
이와 관련, 카슈끄지가 살해되는 과정에서 사우디 왕세자의 측근이 전화로 지시했다는 주장이 나왔다. 로이터통신은 사우디 고위 소식통을 인용, 무함마드 왕세자의 고문인 사우드 알 카흐타니가 사건 당일 인터넷 전화 스카이프를 통해 카슈끄지가 감금된 방으로 전화를 걸어 욕설을 퍼붓고 결국 파견조에 살해를 지시했다고 보도했다. 이어 당시 통화가 녹음된 파일을 확보한 에르도안 대통령은 미국의 공개 요구를 거부하고 있다고 전했다.
따라서 터키가 이번 사건의 총대를 메고 사우디를 공격하면서도 정작 중요한 통화 파일을 공개하지 않고 협상카드로 활용할 가능성도 거론된다. 앞서 19일 메블뤼트 차우쇼을루 터키 외교장관은 “우리가 이런저런 정보를 다른 나라와 공유한다는 건 말이 안 된다”고 발끈했다.
김광수 기자 rollings@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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