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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과 문화] 앗! 나의 실수

입력
2018.10.21 12:49
31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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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계에서 가라는 대로 따라갔을 뿐인데, 같은 건물 주위를 맴돌고 있다. 내비가 미쳤나, 투덜거리다가 내 실수임을 알아차린다. 기계는 300m 앞 모퉁이에서 우회전하라고 했는데, 그냥 바로 우회전한 거다. 사람이 무슨 짓을 하든 오로지 길만 찾고자 하는 기계는 당연히 건물 주위를 돌아서 다시 큰 길로 나가라고 했고, 내가 무슨 짓을 했는지 나도 관심이 없었으므로 그 말을 따라 큰 길로 나갔다. 그리고 또 다시 같은 곳에서 우회전 했으니, 기계는 또 다시 돌아나가라고 지시할 수밖에. 며칠 전 새로 이사 온 동네의 대형 마트로 가는 길이었다. 처음도 아니고 두 번째 가는 길.

“나, 길 잘 찾아요!” 친구나 지인들에게 당당하게 자주 하는 말이다. 길 안내해 주는 기계를 사용하기 전에는, 지도를 보면서 한 번도 안 가 본 곳을 찾아가곤 했다. 그렇게 더듬더듬 찾아간 길은 두 번째, 세 번째도 큰 어려움 없이 찾아갈 수 있었다. 그 시절의 성취감이 남아 있어서인지 스스로 길을 잘 찾는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요즘은 자신감이 많이 줄었다. 기계가 가라는 대로 따라 가면 어디든 갈 수 있지만, 두 번째 세 번째 가는 길도 기계의 힘을 빌리지 않고 찾아가기 버겁다. 인지 능력이 노화된 탓인가 싶기도 하지만, 그 사실을 인정하기 싫어서 이런저런 핑계를 궁리해 본다. 이쪽으로 가라 저쪽으로 가라 알려주는 기계 없이 스스로 길을 찾아가다 보면, 위에서 내려다 본 조망이라 할 수 있는 ‘지도’를 눈앞에 보이는 현실에 여러 차례 적용하는 경험을 한다. 시행착오도 거듭한다. 그러다 보면 지표가 되는 주위 환경이나 사물을 저절로 기억하기 마련이다. 그래서 지식이 몸에 새겨지는 경지가 되려면 뼈아픈 실수가 필요하다고들 하나 보다.

마침내 목적지인 대형마트로 들어선다. 건물 총면적이 축구장 아홉 배 넓이라는 이곳이야말로 한 번 들어서면 헤매기 십상이다. 네모반듯하게 나뉜 각 구역마다 어떤 물건들이 있는지 이름표가 친절히 달려 있을 뿐 아니라 직원에게 물어보기만 하면 목표물이 있는 지점으로 갈 수 있건만, 어느 새 정신을 차려보면 원래 사려던 물건이 아닌 다른 물건들 앞에서 서성이고 있다. 오늘도 목표물을 향해 가는 길에 은빛으로 빛나는 스텐 냄비들 앞에 멈춰 서고 만다. 부엌 수납장 속에 쌓아 놓은 기름때 낀 나의 냄비들과 비교해 본다. 삼중바닥, 오중바닥, 열효율 같은 단어들이 머릿속에서 왔다 갔다 한다. 냄비를 새로 살 수 있는 그럴 듯한 이유를 생각해내려 애쓴다. 이미 오래 전부터 많은 이들이 집이나 옷을 직접 만들지 않게 되었으나, 음식을 직접 만드는 일만큼은 쉽게 포기하지 않는 것으로 보아... 아, 몰라, 어쨌든 냄비는 매우 중요한 것이다!

쇼핑을 마치고, 다시 기계의 안내에 따라 아직 며칠 밖에 머무르지 않아 우리집 같지 않은 우리집으로 돌아간다. 집에 와서 사온 물건들을 정리하고 나서 갑자기 깨닫는다. 정작 내가 사려고 했던 물건을 안 샀다는 사실을. 욕실 청소를 하려다가 세제와 청소 도구가 필요해서 어제 갔던 마트에 또 갔었다는 사실을. 그렇다면 축구장 아홉 배 넓이인 그곳에 또 가야 하는 건가. 한눈팔지 않고 목표물을 향해 돌진하려면 경주마처럼 눈 양옆을 가려야 하는 건가. 왜 안 되겠는가? 거듭되는 실수 덕분에 이제는 내비 안 켜고도 잘 찾아갈 수 있을 것 같다. 내가 원래 길을 잘 찾는 편이기도 하니까. 차 열쇠를 집어 들면서 식탁 위에 얌전히 놓여 있는 새 냄비를 바라본다. 몇 십만 원씩 한다는 유명한 무쇠 주물 냄비는 아니지만, 내가 저지른 실수와 산만함의 증거인 그것, 참 예쁘다. 반짝반짝.

부희령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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