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명현(55)은 별스럽게 사는 과학자다. 휴대폰이 있지만 쓰지 않는다. 그에게 전화를 걸면 이런 회신이 문자로 날아온다. ‘전화 받을 수 없어요. (이메일 주소)로 연락주세요.’ 이유는 간단하다. ‘자기 고립’ 확보. “늘 휴대폰을 보며 살 필요는 없잖아요?” 그렇게 얻은 시간으로 궁리를 하고, 책을 보고, 마주 앉은 사람에게 집중한다.
머리칼이 견갑골 아래까지 내려온다. 곧 허리에 닿을 것 같다. 국가 기관 회의에도 면티셔츠에 진을 입고 간다. 여름엔 거기다 슬리퍼까지. 그것이 가장 편한 차림인데다, 남에게 피해 주는 일도 아니니까. 그렇게 지금 이 순간의 작은 행복을 지켜가면서 산다. 참, 머리칼은 소아암 환자에게 기증하려고 길렀다. 딸에게서 배웠다.
그는 ‘알고 보면 우리는 모두 별에게서 왔다’는 과학적 추론을 비밀스럽고 소중하게 말하는 재주를 지녔다. 별들이 살았다, 죽었다를 반복하면서 치른 핵융합의 결과물이 실은 우리 몸을 이루는 원소들의 재료라는 얘기다. 끊임없는 원소의 순환으로, 결국 사람은 온 우주와 연결돼있다는 스토리텔링. “우리는 게다가 이런 걸 생각해낼 수 있는, 너무나 멋진 별먼지죠!”
그는 꽤 알려진 ‘글 쓰는 과학자’다. 그런데 퇴고가 없다. 머릿속에서 수없이 썼다, 고쳤다를 되풀이했다가 첫머리부터 끝 문장까지 한번에 내달려 쓴다. 그리곤 원고 청탁자에게 전송하면 끝. 컴퓨터에서도 지워 버린다. 천재인가? 중ㆍ고교 시절의 엄청난 독서량을 듣곤 고개를 끄덕였다. 윤동주의 ‘별 헤는 밤’에서 시작해 문학, 철학, 인문학의 별 같은 작품들을 모두 집어 삼킨 거였다.
천진난만한 눈웃음을 보면, 인생 심각할 것도, 걱정도 없는 사람 같은데 그런 것만도 아니다. 그의 첫사랑이자, 초등학교 때부터 함께한 인생의 벗, 그리고 두 아이의 엄마인 그의 아내는 벌써 수년 째 병상에 누워있다. 치과 의사 시절 반짝이던 아내의 뇌는 잇단 수술로 작아졌고, 반짝이던 이성의 빛도 함께 수그러들었다. 자신 역시 아내의 발병 직전 급성 심근경색으로 쓰러진 경험이 있고 아직도 하루에 약을 한 움큼씩 먹어야 한다. 그래도 그는 꽤 자주, 행복하다.
“인생의 기준점을 죽음에 둔다면 지금 이 순간 어떻게 살아야 할지 답이 나와요. 과거의 나와 아내는 이제 없고, 관계가 새롭게 설정된 거죠. 논리적인 교감 대신 감정의 교감이 남은 거예요. 그걸 인정해야 지금의 소중한 시간을 누릴 수 있어요.”
존재의 유한함을 받아들이면 삶의 찰나는 여전히 경이롭다. 별이 그에게 알려준 삶의 진리다. 그걸 나누려고 올해 6월엔 서울 삼청동에 ‘과학책방 갈다’를 열었다.
◇갈릴레오+다윈 첫 글자 딴 과학책방 ‘갈다’
-왜 휴대폰을 안 쓰세요?
“제가 하는 일이 시급을 다투며 할 업종이 아니니까요. 전화로 약속을 잡다 보면 제대로 적어두거나 기억하지 못하는 때가 있어서 아찔했던 일도 있었고요. 또 하나는, 자기 고립이 좀 필요했어요. 그래서 연락은 이메일로 받아요. 매일 밤 확인을 하고 회신도 하고 구글 캘린더에 기록해두죠. 카톡(카카오톡)도 하지 않아요. 그러다 보니, 누군가를 만나 얘기하거나 밥 먹을 때 전화를 전혀 보지 않아도 돼요. 특히나 저처럼 콘텐츠를 만드는 사람들은 이런 방식으로라도 자기 고립을 확보하는 게 필요해요. (사회에서) 그래도 되는, 그럴 수 있는 사람부터 먼저 (휴대폰에서 벗어나는 걸) 해야 한다고 생각해요.”
-요즘 특히나 직장인들에게는 휴대폰이 ‘감옥’이나 다름 없죠.
“맞아요. 그런데 많은 사람들이 꼭 그렇게 살 필요는 없거든요. 저도 처음에는 주위에서 불편해 하는 이들이 있었지만, 계속 알리고 유도하니까 이제는 ‘아, 저 사람은 이메일로만 소통하는 사람이구나’라고 인식하게 되더라고요.”
-머리는 언제부터, 왜 기르는 건가요?
“네팔에 자주 가는데, 3, 4년 전에 갔을 때 (미용실 가는 걸) 신경 쓰지 않았더니 머리가 제법 길었더라고요. 딸 아이가 보더니 ‘아빠도 한 번 해보라’며 소아암 환자에게 하는 모발 기증을 권했어요. 이미 딸은 두 번, 아들은 한 번씩 머리를 길러서 기증한 적이 있거든요. 그래서 저도 기르게 됐죠. 허리까지 자라게 둬볼까 생각 중이에요. (웃음)”
-과학책방 ‘갈다’를 만든 이유는 뭔가요?
“여기가 원래 부모님 집이에요. 저도 유학 가기 전까지 8, 9년쯤 살았고요. 부모님이 이사 하면서 친분이 있는 NGO(시민단체)나 NPO(비영리기구)에 빌려줬는데, 최근까지 있던 한국비폭력대화센터가 다른 곳으로 이전하게 됐어요. 정서적인 끈이 있는 곳이니, 부모님이 남에게 처분하기보다 제게 활용할 생각이 없느냐고 제안을 해 책방을 열게 됐죠. (진화생물학자인) 장대익 서울대 교수, 정재승 카이스트 교수, 이정모 서울시립과학관장, 김상욱 경희대 교수 같은 친한 학자 10여명과 아이디어를 모았어요. 다들 과학자이면서 책을 쓰는 사람들이고, 또 어린 시절 책에 빚진 세대죠. 그러다 보니 모두 책에 대한 로망이 있었어요. 생각을 모은 끝에 교양과학 책을 파는 책방을 하기로 했죠. 또 책만 파는 게 아니라 2층에는 책을 저술할 수 있는 방, 지하엔 북콘서트를 할 수 있는 공간도 마련했어요. 뜻을 함께 하는 사람은 과학자뿐 아니라 만화가, 작가, 이미지 컨설턴트, 팝 아티스트 같은 다른 직종까지 확대돼서 지금은 110명으로 늘었고요. 주주로 참여하고 있죠. 제가 대표고요.”
책방 이름 ‘갈다’는 장대익 교수의 머리에서 나왔다. 갈릴레오 갈릴레이의 ‘갈’과 다윈의 ‘다’에서 따왔다. 거기다 ‘갈다’의 사전적 의미인 ‘갈아 엎다’, ‘갈아 치우자’, ‘절차탁마’, ‘경작’의 뜻도 보태 더 근사한 작명이 됐다. 닫힌 과학이 아닌 대중에게 열린 과학으로 바꾸자는 열의가 엿보인다.
-통상 서점에서도 과학책은 소외된 경우가 많은데 소중한 공간이네요.
“과학 커뮤니케이션을 하는 사람들 입장에서는 일종의 ‘오프라인 거점’이 생긴 거죠. 와서 편하게 하고 싶은 구상을 구현할 수도 있고, 과학책을 볼 수도 있고요. 과학책을 처음 접하는 손님이 오면 처방도 해드려요. 서사적인 서술 방식을 좋아하면 ‘불멸의 원자’(이강영), 명징한 방식을 원하면 ‘김상욱의 과학공부’, 여행이 취미라면 ‘문경수의 제주과학탐험’… 이런 식으로요.”
-이곳(책방)이 옛날 살던 집터라고 들었는데, 이곳에 추억도 많겠네요.
“저는 큰 감흥이 없어요. 살았던 집이긴 하지만.”
-왜요?
“제가 무엇에 미련을 잘 두지 않는 성격이에요. 과거도 그렇고, 제 글에도요. 이메일로 보내고 나면 잊어버려요.”
그가 올해 9월 낸 책 ‘이명현의 과학책방’ 서문이 생각 났다. “그리고 이제 내 곁은 완전히 떠나서 독자들의 품으로 간다. 안녕”이라고 그는 썼다.
“좀 의아스러운 얘기일 수도 있는데, 저는 청탁 없는 글을 써본 적이 없어요. 제가 뭘 스스로 이뤄야겠다고 생각해서 쓴 글이 없다는 의미예요. 글도 쓸 때 퇴고가 없어요.”
-일필휘지라는 건가요?
“네. 그렇게 써서 보내요. 마감에 쫓기기 때문에 퇴고를 못해요. 하하. 대신 미리 생각을 많이 하죠. (손가락으로 머리를 가리키며) 여러 번 써요. 그래서 완성된 걸 글로 옮기죠. 600쪽짜리 책 한 권이라면, 며칠 동안 몰아서 한꺼번에 써요. (원고지로) 5장 분량이든, 12장 분량이든, 100장 분량이든 마찬가지예요. 어릴 때부터 버릇이죠. 책이 나와도 방송에 출연해도 그걸 다시 보지 않아요. 출판 제의가 들어와도 조건 중 하나가 그거예요. (웃음)”
-스트레스는 적게 받을 것 같네요.
“사실, 스트레스 받을 일은 많지요. 그런데 나름대로 해소하는 방법이 있어요. 옛날엔 친구 만나 술 마시는 거였는데, (8년 전 심근경색으로) 쓰러지고 난 뒤부터 그건 못하고요. 제가 그러고 나서 바로 아내가 수술을 받게 되는 일이 겹치면서 엄청 힘들었죠. 19살 때 배운 명상이 도움 돼요.”
-명상이요?
“네. 대학 1학년 때 방학을 네팔에서 보낸 적이 있어요. 아버지와 가까운 네팔인 가족의 집요. 저보다 한 살 어린 그 집 동생과 안나푸르나를 트레킹하며 여행을 다녔는데 돈이 딱 떨어진 적이 있었어요. 그때 네팔에서 라즈니쉬교가 아주 번성을 해서 곳곳에 캠프가 많았거든요. 그 친구네 집도 라즈니쉬교를 믿었고요.”
20여 년 전 한국에서도 책과 함께 유명세를 날렸던 철학자 오쇼 라즈니쉬의 종교를 말하는 거였다.
“돈을 빌리러 가까운 곳의 라즈니쉬 캠프에 갔죠. 그런데 그곳의 구루(지도자)가 돈을 빌려주는 조건으로 명상을 권하더라고요. 저는 빨리 돈만 빌려서 다시 놀러 가면 좋겠는데. (웃음) 그래서 제가 어깃장을 놓으면서 ‘나는 격식을 갖춰 하는 명상은 싫다. 걸어 다니면서 할 수도 있는 거냐’고 했더니 그렇다는 거예요. 하는 수 없이 3, 4일 동안 캠프에 머물면서 명상을 했어요. 걸어 다니면서, 한 키워드를 잡아서 그것과 관련해서 머릿속에 떠오르는 생각을 흐트러뜨리는 연습을 했죠. 그런데, 한 이틀 하고 나니까 정말 되는 거예요. 재미있더라고요. 8년 전에 아내가 쓰러져 힘들 때 그게 생각이 나더군요. 그래서 해보니 작동을 하더라고요. 어릴 때 연습해둔 것이라 그런지. 그래서 힘든 일이 있을 때 명상을 해요. 그러면 마음의 진폭도 좁아지고 안정을 되찾게 되죠.”
◇8년 전 죽음의 문턱까지… 아내도 투병
-2010년에 심근경색으로 쓰러졌던 얘기를 들을 수 있을까요?
“11월이었어요. 일요일 밤. 김장철이라 구기동 집 3층까지 배추를 나른 뒤였어요. 약간 숨이 차긴 했어도 힘든 활동은 아니었죠. 그런데 갑자기 쓰러졌어요. 말을 할 수도 없는 상태였죠. 다행히 딸 아이가 얼마 전 반 친구 아버지가 당한 일을 떠올리곤 바로 119에 전화를 하고 의사인 제 고모에게도 급히 연락했죠. 종합병원이 10분 거리라 다행히 응급처치를 해서 살았지만 이미 심장 근육의 반 이상이 괴사돼서 뛰지 않아요. 지금도 하루에 몇 십 알씩 약을 먹고요. 피의 점도가 높아진 상태에서 혈관 벽에 붙은 세포가 떨어지면서 관상동맥이 막힌 거였어요.”
-당시 경험 이후에 느낀 건요.
“죽음의 상황까지 갔다 온 거니 종종 그런 질문을 받아요. 그런데 심적으로는 크게 달라진 게 없어요. 다만 생활 패턴이 바뀌었죠. 술을 마시지 못한다거나 하는. 그러다 보니 저녁 약속을 잡지 않고 친구들도 점심에 만나고요.”
-마음의 항상성이 견고한 것 같아요.
“내가 겪은 고통의 강도로 우열을 가리지 않으려고 해요. 나만 특별히 그런 게 아니고, 우연히 나한테 그 고통이 찾아왔을 뿐이죠.”
-과학자의 시선이기도 하겠지만, 성격도 낙관적인 듯 해요.
“엄청 낙관적이에요. (웃음) 어릴 때 죽음에 대한 두려움이 많았어요. 음, 죽음이라기보다 사라진다는 것에. 뭔지 모르니까 막연한 두려움인 거죠. 그래서 사춘기 때 화두 중 하나가 ‘존재’였어요. 장래희망란에 ‘도사’라고 썼다가 선생님한테 혼난 적도 있죠. 교회나 절은 가봐도 신통치 않았고, 도사가 되면 오래 살 수 있지 않을까 싶더라고요. (웃음) 그러다가 나중에야, 유한함을 인지하고 받아들인 거죠. 어차피 죽지 않을 수 없다, 영원히 살면 좋겠지만 그럴 방법이 없다, 그러면 어떻게 살 것인가. 개망나니처럼? 아니면 극단적인 여러 행동을 해볼까? 그런데 그래 봤자, 너나 나나 다 죽는 거 아니야? 그렇다면 그 유한한 시간 동안 어떤 일을 하는 게 좋을까? 이런 식으로 흘러 간 거죠. 한편으로는 이런 생각을 하고 있다는 것 자체가 멋지고 재미있다는 생각도 들었고요.”
-어릴 때부터 꽤 논리적인 사고를 했네요.
“사춘기 때 그런 고민을 하면서 책을 엄청 읽었어요. 철학책은 물론이고 근ㆍ현대 세계문학전집, 시집까지 닥치는 대로 다 읽었죠. 도서관까지 가서 구할 수 있는 건 모두요. 과학책은 별로 읽지 않았어요. 그러다 보니 사고할 재료가 많이 쌓였죠. 생각을 하다 보면 어느 지점에서 막히는 법인데, 거기서 돌파할 예제가 많아진 거죠.”
◇하늘의 금성도 혼자, 나도 혼자 ‘감정이입’
-별에는 언제부터 빠지기 시작했나요?
“가장 오래된 기억은 1969년. 그때 아폴로 11호가 달에 착륙했어요. 그 전에 저한테 별은 이런 거였어요. 어머니(사회학자)와 아버지(정신과의사)가 모두 일하셨으니 애들이랑 동네 골목에서 놀다 보면 다 집에 들어갈 때까지 남아 있는 때가 많았거든요. 골목에 혼자 있다가 하늘을 보면 금성이 있었어요. 금성도 혼자, 나도 혼자. 그러니 감정 이입이 되더라고요. 또 금성 옆에 있는 초승달도 보이고. 그러다가 어느 날 사람이 그 달 위를 걸어 다니고 있다니까 어린 마음에 무척 벅찼어요. 아, 나도 저런 걸 해야겠다고. 매혹이 된 거죠.”
-별을 제대로 본 건 언제예요?
“그 때 생각한 ‘저런 일’이 뭔지 모르다가 초등학교 2학년 때 학생과학 잡지에서 한국아마추어천문가회를 만든다는 소식을 봤어요. 조경철 박사 같은 천문학자들이 만든 조직이죠. 일반회원도 모집했는데 그때 저도 가입했어요. 초등생 회원은 저하고 또 하나 두 명뿐이었죠.”
-어떤 활동을 했나요?
“관측회를 해요. 망원경으로 본 달을 스케치하기도 하고 천체 사진도 찍었죠. 3학년쯤부터는 필름을 자르고 현상, 인화하는 법도 배웠어요.”
-육안으로 금성과 대화하다가 망원경으로 보니 뭐가 다르던가요?
“처음 본 게 토성 아니면 달의 크레이터(달 표면의 구덩이)일 거예요. 특히 토성은 망원경으로 보면 띠가 정말 예뻐요. 엄청 흥분했죠. 그걸 보곤 나도 내 망원경을 갖고 싶다는 욕망이 생겼죠. 그래서 만들었어요. 문방구에서 파는 렌즈로 초점 거리를 맞추고 마분지를 밥풀로 붙여서. (웃음) 1609년에 갈릴레오 갈릴레이가 처음 천체를 본 망원경보다 그때 만든 망원경이 더 성능이 좋아요. 갈릴레오의 망원경보다 정교하진 못해도 렌즈 성능은 당시보다 더 좋으니까.”
-천문기상학과에 진학해서 평생 별과 살아야겠다고 생각한 것도 그때 활동 덕분이겠죠?
“네, 우주 비행사와 천문학자는 다르긴 하지만 달에 가는 세상이 됐다고 하니까 막연히 우주란 무엇인가를 연구하는 일을 하고 싶다고 생각했어요. 당시는 천문학과가 서울대와 연세대에만 있을 때였죠. 고등학교 때 나선은하에 빠져있었는데 나선은하를 전공한 교수가 있는 연세대에 간 거죠.”
-중ㆍ고교 때 문예반 활동도 했다던데, 과학과 문학에 모두 빠져있었나요?
“이성에게 어필하려면 그런 지적 허영심, 허위의식이 필요했죠. (웃음)”
-문학과 과학이 통하던가요?
“그럼요. 경이로움이요. 문학 특히 예술은 경이로움의 경험이잖아요? 과학도 마찬가지예요. 음악이나 문학 작품, 혹은 과학에서 맛보는 경이로움은 거의 일치해요. 그래서 과학자가 예술가와 잘 통하나 봐요. 경이로움을 즐기고 받아들이고 존중할 줄 아는 태도가 공통점인 것 같아요.”
◇중2 첫 실연으로 빠져든 ‘윤동주의 별’
-4년 전 낸 에세이집 제목이 ‘이명현의 별 헤는 밤’이죠. 윤동주의 별에는 언제 매료됐나요?
“중학교 2학년 때 푹 빠졌죠. 초등학교 동창이었던 지금의 아내와 사귀고 있었거든요. 그런데 어느 날 이별을 통보하는 편지를 받았어요! 그 편지에 윤동주의 ‘서시’와 김소월의 ‘초혼’ 두 편이 적혀 있었죠. 인생의 첫 실연에 서럽게 울다가 그 두 시인의 시를 보기 시작했어요. 구할 수 있는 모든 시집은 다 구해서 읽고 외우고 다녔죠.”
-왜요?
“그리움에 대한 투영이 그렇게 됐나 봐요. 또 ‘네가 나한테 시를 보내 이별을 통보했으니 나도 시로 뭔가 해보겠다’ 이런 마음도 있었던 것 같고요. 처음엔 여자친구에 대한 감정 때문이었는데, 나중에는 문예반 활동에 신문반, 교지편집 활동도 했고 고등학교 때는 문학 동인회도 만들었죠.”
-그런데 왜 문학이 아닌 천문학의 별을 전공으로 택했나요?
“아주 어릴 때 매혹된 경험이 너무 크게 차지하고 있었으니까요. 그냥 나는 ‘천문학자’, 자연스럽게 이렇게 생각했죠. 공교롭게도 진학한 대학이 윤동주의 연세대였어요. 또 제가 다닌 고교도 윤동주가 다닌 평양 숭실학교의 숭실고교고요. 제 인생의 화두인 별과 윤동주의 문학이 자연스럽게 하나가 됐어요.”
그는 외계 지성체를 탐색하는 세티(SETI)연구소의 한국 책임자이기도 하다. 그를 인터뷰 한다니까 주위의 독자 한 명이 이런 질문을 해달라고 부탁했다. ‘외계인이 진짜 있나요?’
“(웃음) 과학자들은 (명확하게) 있다 혹은 없다고 잘 답하지 않아요. 99.9%의 확률로 존재할 개연성이 있다고 답하죠. 지금까지 그런 개연성을 만들어낼 만한 여러 관측 결과가 있다는 의미죠. 그걸 종합해서 추론하자면, 외계인은 99.9%의 확률로 존재할 것 같다고 보고 있죠. 문제는 ‘어떻게 찾을 것이냐’죠. 우리 은하 안에 지구와 비슷한 환경 조건을 가진 행성이 얼마나 있을지를 계산해보면, 적으면 50억 개, 많게는 500억 개가 있을 것으로 추정해요. 숫자가 중요한 게 아닌 거죠. 수십, 수백 개가 아니라 수십억 개 이상이라는 것, 흔하다는 게 의미가 있어요. 그 중 1%에서만 생명체가 있다고 봐도, 그 중 1%만 지구인처럼 지적 능력을 가졌다고 봐도, 우리 은하 내에서 지구인 정도의 진화된 존재는 흔할 것이라는 추론을 하는 거죠.”
-우리 모두는 별에서 왔다고요? 왜 그렇죠?
“천문학의 스토리텔링 중 하나예요. (웃음) 우주와 우리가 연결돼있다는 뜻이죠. 우리 몸을 이루고 있는 산소, 질소, 탄소, 황, 인 이런 원소들이 지구에서 뚝딱 만들어진 게 아니라 별들이 살았다, 죽었다를 반복하면서 치른 핵융합에서 왔다는 거죠. 개개의 사람들은 부모에게 빚을 져서 태어났지만, 화학적으로 설명하면 우리는 그렇게 온 우주와 연결돼있어요. 끊임없이 원소들이 순환하고 재활용되면서.”
그는 가수 이상은이 8년 전에 낸 곡 ‘스타더스트’ 얘기를 해주었다. 이 노래의 가사가 천문학에 바탕을 두고 있다면서. 노랫말이 이렇다. ‘후회할 필요 없어 / 시간은 순간순간 사라지는 것 / 또한 새롭게 피어나지 / 무지개의 빛 가루처럼 / 시간이 오는 / 우주의 저 편.’
하마터면 이 노래의 숨은 뜻을 모를 뻔 했지 않나. 그는 말했다. “우리는 별먼지죠. 그것도 이런 뜻까지 헤아릴 수 있는, 생각하는 별먼지. 엄청나게 멋진 존재죠!”
◇과학 교과서 10분의 1로 줄이고 천문학 빼자
-와, 그렇군요. 그런데 학교에서 배우는 과학은 왜 이렇게 재미가 없을까요?
“맞아요. 저는 과학 교과서 내용을 10분의 1로 줄이고 천문학은 아예 빼자고 주장해요. 19세기의 과학, 예를 들면 (천체) 좌표 계산 이런 거요. 요즘은 천문학과 1학년생도 안배우거든요. 공군사관학교에서도요. 이제 프로그램 한 줄이면 돼요. 공사도 예전에는 실측해서 비행해야 하니까 배웠지만 지금은 그렇지 않죠. 그런 것 보다는 현대 허블 우주망원경이 찍은 사진을 보고 감동할 수 있게 하는 게 훨씬 좋은 과학 교육이에요. 지금 교육은 경이로움이 빠진 과학이죠. 있던 경이로움도 시험을 통해 없어지게 하니, 지금처럼 교육할 바엔 차라리 과학을 배우지 않는 게 나아요. 그러면 막연한 호기심은 남을 거 아녜요. 지금은 (중ㆍ고교) 6년을 거치며 호기심이 말살돼 버리는 교육이니까요.”
-그렇다면 저 같은 ‘과알못’(과학을 알지 못하는 사람)은 안 생길 텐데.
“그렇죠. 시험도 보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과학적 사고를 하는 방식 위주로 바꿔야 해요. 하지만 (소장 과학자들이) 그렇게 주장해도 안 먹히죠. 이미 각 교과 별 기득권이 있으니까요. 총론에서 동의해도 각론으로 들어가면 양보를 하지 않더라고요.”
-‘갈다’에서 하는 ‘코스모스 끝까지 읽기’도 잃어버린, 혹은 몰랐던 과학의 경이로움을 알고 싶은 사람들을 위한 거죠?
“칼 세이건의 ‘코스모스’는 굉장히 유명한 책이잖아요. 이걸 다 읽고 싶은 욕망을 가진 분들이 많이 오죠. 제가 하는 역할은 일종의 가이드예요. 옆에서 팩트 체크와 비하인드 스토리를 얘기하는 거죠. 팩트 체크는 예를 들면 ‘코스모스’가 나왔을 때는 우주의 나이를 150억 년에서 200억 년으로 봤지만, 지금은 138억 년으로 바뀌었다거나 하는 것들이죠. 또 제가 칼 세이건의 부인이나 제자들과 친분이 있으니 그들에게 들었던 비하인드 스토리를 설명해요.”
-1980년에 출간된 이 책을 지금도 읽어야 하는 이유가 뭔가요?
“‘코스모스’는 최첨단의 과학책은 아니에요. 현대 천문학의 성과를 알려면 막 나온 책을 보는 게 낫죠. 이 책은 맥락으로 읽어야 해요. 저는 그걸 돕는 거고요. 과학 분야의 고전이 갖는 위상이 애매해요. 소설은 300년 전의 것을 읽어도 희로애락, 사랑, 질투 이런 보편적인 공감대가 있지만 과학책은 그 사이에 워낙 심하게 팩트가 변하니까요. 정보 전달의 역할은 출간 1, 2년이 지나면 없어져요. ‘코스모스’ 역시 팩트가 달라진 걸 찾기 시작하면 엉망이 되죠. 그럼에도 읽어야 하는 이유는 이 책에 담긴 칼 세이건의 비전과 논리구조 때문이에요.”
-우리 삶에도 적용해 볼 수 있다는 건가요?
“칼 세이건은 우리가 살아나가야 할 가치를 외면하지 말자는 얘기를 많이 해요. 냉정하게 상황을 인정하고 난 뒤, 어떻게 살 것인가. 구체적인 방법이 ‘코스모스’에 있어요.”
-언제 처음 ‘코스모스’를 읽었나요?
“1980년에 다큐멘터리가 나왔을 때 비디오테이프를 사서 봤고, 1981년쯤 국내에 번역본 책이 나왔을 때 봤을 거예요. 그 땐 이 책에 담긴 문학적 비유나 역사, 신화, 전설을 본 게 아니라 최신 화보를 봤죠. 1977년 발사된 우주탐사선 보이저 1, 2호가 1979년부터 목성, 토성, 천왕성을 지나면서 찍은 사진을 보내오기 시작했거든요. 그 최신 화보가 ‘코스모스’에 실려 있었어요. 그러다가 귀국해서 (연세대에서) 학생들을 가르치고 대중을 상대로 강연을 하다가 ‘코스모스’ 강의를 해달라는 요청을 받았어요. 그래서 거의 20년 만에 다시 읽었죠. 다르게 보이더라고요. 지금도 읽을 때마다 새로워요. 한번은 초점을 신화나 전설에 맞춰서, 그 다음엔 맥락으로만 읽어보기도 하고요.”
◇죽으면 별로 흩어지니 재미난 일을 해보자
이명현의 책들을 읽으면서 몇 대목에서 탄복했다. 그 중에는 담담해서 더 절절하게 아픔이 배어 있는 문장들이 있었다. 어부들이 더 많은 돈을 받고 팔기 위해 청어를 산 채로 가져오려고 청어 사이에 새끼 상어를 풀어놓는다는 얘기 다음이다. ‘지난 1년, 나는 바로 그 청어처럼 살았다. 그래서 살아남았다. 그런데… 참… 미치겠다. 그래도 또 1년만 더 버티고 살아봐야겠다고 다시 다짐한다. 그 청어처럼.’
자신이 심근경색으로 쓰러진 두어 달 뒤, 아내도 뇌종양으로 투병을 시작하게 돼 힘겨운 1년을 보내고 난 때다.
-청어처럼 사는 건, 어떤 거였나요.
“걸어 다니면서 하는 (생각 흐트러뜨리기) 명상 덕도 봤고요. (주머니에서 병을 꺼내서) 이런 (심장) 비상약도 과용했죠. 어쩔 수가 없으니까. 이런 방식으로 심신을 릴랙스 시키면서요. 감정의 진폭을 줄이고 평상심을 유지하려는 노력이죠. 늘 대화를 나누던 가까운 상대가 아프고, 그렇다고 (속내를) 자식한테 털어놓을 수도 없고, 결국은 저 혼자 해결해야 하는 거니까요. 극심한 스트레스 상태에 놓이게 되면 먼저 응급실에 가서 선제 조치를 하기도 하고요. 그런 식으로 살 궁리를 하는 거죠. 힘들긴 했지만, 생각과 생활을 최대한 단순화해서 저도 버티면서 아내의 치료에 집중했죠.”
-돌이켜 보면 잘 견뎌왔나요?
“그랬죠. 반드시 해야 할 일들에만 초점을 맞춰서. 환자가 생기면 주위에서 조언이라고 생각하는 여러 말들을 해요. 억지스러운 것들도 있고. 심지어 굿을 하라는 얘기까지. 그런 것들에 휘둘리지 않으려면 중심을 잡는 사람이 있어야 해요. 저는 의료체계 안에서 의사의 지시를 따르는 게 최선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그런 주장들은 다 쳐냈죠. 오로지 아내의 치료와 아이들을 보살피는 것에 집중했어요.”
-부인과 초등학교 동창이니 굉장히 오래됐고 특별한 사이겠어요.
“아내이자, 연인이자, 오래된 친구, 그런 복합적인 관계죠. 우리끼리 통하는 ‘모드 바꾸기’가 있어요. 부부가 되니까 절친이거나 애인일 때 했던 얘기를 안 하게 되는 때가 있더라고요. 그러면 싸우기도 하고 삐치기도 했죠. 그런 때 쓰는 비장의 카드가 ‘절친모드’예요. 그러면 오래된 친구로 돌아가 할 말 다 하는 일종의 면책특권 같은 거죠. 이제는 그런 걸 할 수 없으니 안타깝죠. 그래도 지금의 상황을 냉정하게 봐야 이 순간 내가 이 사람과 할 수 있는 일을 할 수 있어요. 과거만 생각한다면, 지금의 아내와 교감이나 교류는 할 수 없죠. 아내와의 모드가 새롭게 설정된 거예요. 예전처럼 절친모드로 돌아간다거나, 아이들을 함께 돌본다거나, 논리적인 교감 같은 건 할 수 없지만 함께 사진을 보면서 웃는 게 지금 우리가 할 수 있는 최선의 교감이니 이것에 집중하는 거죠.”
-행복하세요?
“저는 늘 행복했던 것 같아요. (웃음) 힘든 일은 늘 있었지만 자책은 잘 하지 않아요. 그러니 작은 강도의 행복을 느끼는 빈도 수가 높아요. 맛있는 걸 먹으면 행복하거든요. 물론 처음 망원경으로 하늘을 봤을 때 나를 압도했던 경이로운 행복을 재현하긴 힘들어요. 하지만, 대신 약한 세기의 행복이 많죠. 그러면서 좌절의 강도는 약화시키고. 그렇게 감정의 진폭을 줄이는 훈련이 됐나 봐요.”
이 질문을 한 건 내내 그의 눈과 표정에서 느껴지는 행복 때문이었다.
-별 헤는 과학자 이명현의 삶의 도는 뭔가요?
“유한함에 대한 인식, 인지, 그것에서부터 오는 체념이요. 그게 현실을 직시할 수 있는 방법이에요. 외계적 시선으로 저를 보거나 객관화 시키는 데 도움이 되죠. 바꿔 말하면 항상 배수진을 치고 사는 것이기도 해요. 당장 죽을 수도 있다는. 저는 삶의 기준점을 제가 태어난 시점이 아닌 죽음에 두고 사고하는 것 같아요. 어차피 죽는 거니까, 죽으면 (별로) 흩어지는 거니까, 끝이 나기 전에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해봐야 하지 않겠나. 그러니 평상적인 재미난 일을 하는 거죠. 사과나무를 심는 사람도 있지만. (웃음)”
‘과알못 기자’가 천문학자를 인터뷰 해보기로 한 데는 이런 문장도 있었다. ‘인생의 꿈을 다 꾸고 이제 막 별로 돌아가는, 그 사람을 내 마음에서 놓아주고 있던 참이었다.’ 그의 스승이자 벗이었던 조경철 박사를 추모하며 쓴 글이다. 세상의 절반인 하늘과 달과 별이 그에게 준 선물이다.
김지은 기자 luna@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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