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화 대비 엔화 가치가 연일 추락하고 있다. 일본 상품 구입이나 여행을 계획하고 있는 국내 소비자들에게는 반가운 소식이지만 세계 시장에서 일본 제품과 경쟁해야 하는 국내 수출업체엔 비상이 걸렸다. 사실 반도체를 제외한 12대 주력 품목의 수출은 이미 감소세로 돌아선 상태다. 한국 기업들이 이처럼 울상인 반면 엔저에 닛케이지수가 27년만에 최고 수준으로 치솟자 일본 기업들은 축포를 터트리고 있다.
1일 외환시장에 따르면 이날 오후 3시30분 기준 원ㆍ엔 재정환율은 100엔당 1.88원 하락(엔화 대비 원화 가치 강세)한 975.65원을 기록했다. 이는 6월14일(975.3원) 이후 3개월 만에 가장 낮은 수준이다. 원ㆍ엔 재정환율은 원화와 엔화가 직접 거래되지 않는 탓에 원ㆍ달러 환율과 엔ㆍ달러 환율을 간접 계산해 산출된다.
신흥국 금융불안이 불거진 지난 8월 100엔당 1,027.8원까지 치솟았던 원ㆍ엔 재정환율은 지난달 들어 하락세가 가팔라지면서 심리적 지지선인 1,000원이 붕괴됐고 최근 하락폭이 더 커졌다. 지난달 18일(1,000.67원) 이후 7거래일 동안 25원 넘게 떨어졌다.
이는 미국 기준금리 인상으로 달러 대비 엔화 가치가 하락한데다가 아베 총리가 지난달 집권 자민당 총재직 3연임에 성공하며 ‘아베노믹스‘(과감한 통화 완화와 재정지출 확대를 골자로 한 아베 총리의 경제정책)가 지속될 것이란 기대감이 맞물린 결과다. 실제로 미국이 금리를 올리고 있는 반면 일본 중앙은행(BOJ)은 기준금리를 연 -0.1%로 유지하며 미일간 금리격차는 2.35%포인트까지 벌어진 상태다. 오정근 건국대 특임교수는 “일본 중앙은행이 완화적 통화 정책을 천명한 상황에서 미국이 금리를 올리자 투자자들이 엔화를 내다팔아 엔화 약세가 이어지고 있다”고 설명했다.
반면 원화는 한반도를 둘러싼 지정학적 위험(리스크) 완화와 경상흑자 증가 등에 강세를 보이고 있다. 이에 따라 수출기업들은 원화 강세와 엔화 약세란 이중고를 겪게 됐다. 한국과 일본은 겹치는 수출 품목이 10개 중 6개일 정도(수출 경합도 58.8%)로 세계 시장에서 치열하게 경쟁하고 있다. 만약 엔저를 이용해 일본 기업들이 가격 인하 공세를 펼칠 경우 한국 수출업체는 속수무책으로 당할 수 밖에 없다. 한국무역협회 국제무역연구원에 따르면 원ㆍ엔 환율 1% 하락시 일본과 수출 경합도가 높은 우리나라 제품의 수출은 0.7~1% 감소한다.
이날 산업통상자원부는 1~9월 누적 수출이 4,504억 달러로, 사상 최고치를 기록했다고 밝혔다. 그러나 이는 전적으로 반도체에 의존한 결과다. 대부분의 업종은 수출이 감소세로 돌아섰다. 실제로 9월 수출입동향에 따르면 지난달 반도체를 제외한 12대 품목의 수출액은 273억3800만달러로, 전년동월대비 19.0% 감소했다. 추석 연휴로 조업일수가 지난해 9월보다 4일 정도 줄어든 영향을 감안해도 낙폭이 너무 크다. 반도체를 뺀 12대 품목의 전체 수출액은 이미 지난 6월부터 마이너스 행진이 이어지고 있다.
전문가들은 단기적 엔화가치 급락세는 진정될 가능성이 크지만 전반적인 엔화 약세 기조는 당분간 이어질 것으로 내다봤다. 민경원 우리은행 이코노미스트는 “1차 지지선인 960원 중반 레벨까진 가능성을 열어둘 필요가 있다”고 지적했다. 정민 현대경제연구원 연구위원은 “엔화 가치 하락이 장기간 이어질 경우 시장에서 일본과 겹치는 품목이 많은 한국 수출 기업은 타격이 불가피하다”며 “수출 경쟁력 제고를 위해 고부가가치 산업 육성과 원천기술 확보 등에 나서야 한다”고 주문했다.
엔화 약세와 일본 수출 기업들의 실적 전망 개선 기대감이 맞물리며 이날 일본 도쿄 증시에서 닛케이 지수는 2만4,245.76으로 125.72포인트(0.52%) 상승 마감됐다. 거품(버블)경제 붕괴 당시인 1991년 11월 이후 26년 11개월만에 최고 수준이다. 허경주 기자 fairyhkj@hankookilbo.com
박준석 기자 pjs@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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