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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버릇 못 고친 월가… 기업금융 외면 돈벌이 급급

입력
2018.09.14 04:00
수정
2018.09.14 16:34
8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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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도 부동산ㆍ자영업에 돈 집중

경제 저성장 기조 고착화에 한 몫

[저작권 한국일보]국내 기업대출 대비 가계대출 비중_김경진기자
[저작권 한국일보]국내 기업대출 대비 가계대출 비중_김경진기자
미국 뉴욕의 리먼 브러더스 본부 앞에서 2008년 9월 15일 한 여성이 '다음 차례는 누구일까?'라고 끈 종이판을 들고 서 있다. 미국 4위의 투자은행 리먼 브러더스는 하루 전날인 14일 뉴욕 남부지방법원에 파산보호를 신청함으로써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AP연합뉴스
미국 뉴욕의 리먼 브러더스 본부 앞에서 2008년 9월 15일 한 여성이 '다음 차례는 누구일까?'라고 끈 종이판을 들고 서 있다. 미국 4위의 투자은행 리먼 브러더스는 하루 전날인 14일 뉴욕 남부지방법원에 파산보호를 신청함으로써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AP연합뉴스

미국 경제가 여전히 금융위기 여파에서 허우적대던 2011년 6월 초대형 글로벌 기업 코카콜라의 데이브 스미스 조달 부문 책임자는 업계 컨퍼런스에서 알루미늄 가격의 이상 상승 현상을 성토했다. 수요는 그대로인데 가격이 치솟으며 물량 확보에 반년이나 걸리는 시장 상황을 두고 스미스는 “웃돈을 끌어올리기 위한 인위적인 조작”이라며 사재기 의혹을 제기했다. 음료수ㆍ자동차ㆍ전자제품 등 알루미늄을 필요로 하는 기업, 그리고 결국 이들 기업의 비용 전가 대상이 된 소비자들로부터 2010~2013년 최대 50억달러(5조6,000억원)로 추산되는 ‘웃돈’을 뜯은 곳은 코카콜라의 거래 금융사이기도 한 골드만삭스였다.

부실 파생금융상품을 대량 판매하다 금융위기를 촉발하고 사기 혐의로 피소되기까지 했던 이 굴지의 투자은행은 정부 및 연방준비제도(Fedㆍ연준)의 구제금융과 양적완화(채권 매입을 통한 유동성 공급)에 힘입어 금세 체력을 회복했다. 이후 미국에서 거래되는 알루미늄 물량의 4분의 1 가량을 사들인 뒤 공급을 지연시켰다. 사재기 방지 법망을 피하려 디트로이트의 27개 창고에 알루미늄을 매일같이 옮겨가며 보관했다. 고객사도 아랑곳하지 않는 월스트리트 대표 기관의 약탈적 행태를 두고 미국 경제 저널리스트 라나 포루하는 “압도적 자산과 정보력을 보유한 (투자)은행들이 자기가 뒷받침해야 할 산업의 강력한 경쟁자로 변신해 시장을 왜곡하고 기업과 경제에 막대한 비용을 전가하고 있다”고 일갈했다.

10년 전 리먼 브러더스 파산으로 촉발된 금융위기의 근원에 ‘실물경제 지원’이란 본분을 망각한 월가의 탐욕이 자리하고 있었다는 점은 모두가 동의하는 바다. 은행과 자본시장이 좋은 사업 구상이나 프로젝트가 있는 기업가에게 저축이나 투자가 흘러가도록 자원을 동원ㆍ배분하는 본연의 역할을 소홀히 한 채 무리하게 자사 수익 극대화에 치중하면서 경제 전반의 활력까지 꺼뜨리는 우를 범한 것이다. 문제는 이러한 금융과 실물경제의 괴리가 국내외를 막론하고 위기 이후 오히려 확대되는 양상을 보이고 있다는 점이다. 더구나 골드만삭스의 사례처럼 상당수 금융사들은 금융계가 일으킨 위기를 진화하려 불가피하게 대량 투입된 자금을 생산적 부문에 중계하기보단 부채와 자산가격을 부풀려 돈벌이의 기회로 삼는 데만 치중하고 있다.

13일 금융업계 등에 따르면 기업금융 약화는 금융과 실물의 유리(유리)를 보여주는 대표적 사례다. 미국 중소기업청 통계에 따르면 미국 금융회사가 자국 중소기업에 빌려준 돈은 2010년 6,522억달러에서 2015년 5,990억달러로 8.2% 줄었다. 같은 기간 전체 기업대출에서 중소기업이 차지하는 비중도 9.1%포인트(31.1→22.0%) 급감했다. 미국 임금 근로자의 99.7%를 고용하며 경제의 기초체력을 책임지고 있는 중소기업의 돈줄이 마르고 있는 셈이다. 이러한 현실은 창업 1년 이내 신생기업 수(2015년 41만4,000개)가 10년 전에 비해 26% 감소했을 뿐만 아니라 전체기업에서 차지하는 비중(8.1%) 또한 역대 최저라는 미 상무부 통계와도 궤를 같이 한다. 반면 미국 금융회사 자산 증가율(연율 기준)은 3월 말 기준 9.3%로 2011년 9월 말(13.4%) 이후 최고치를 기록하며 호황을 구가하고 있다.

우리나라도 사정이 다르지 않다. 금융위기 발발 직후인 2008년 말 202조8,000억원 규모였던 제조업 대출은 지난해 말 337조5,000억원으로 66.2% 늘어난 데 비해, 가계대출은 같은 기간 515조3,000억원에서 974조6,000억원으로 89.1% 늘면서 기업대출보다 훨씬 빠른 증가세를 보였다. 금융위기 이후 대대적인 가계부채 조정(디레버리징)에 나선 미국과 상반된 국내 금융사들의 행보는 부동산, 자영업 등 조정이 필요한 시장에 되레 자금을 집중시키는 결과를 불렀다. 나아가 비효율적 자금 배분이 금융위기 이후 저성장 기조 고착화에 영향을 미쳤다는 분석까지 나온다. 박정수 서강대 경제학과 교수는 최근 발표한 보고서에서 국내총생산(GDP) 대비 가계대출 증가는 국내 경제성장에 별다른 영향을 주지 못한 반면 기업대출의 GDP 대비 감소는 성장에 부정적 영향을 미쳤다는 연구 결과를 내놨다. 박 교수는 “금융 부문의 자금중개 기능 약화는 우리 경제가 지속적으로 겪고 있는 총수요 감소와 장기투자 둔화를 초래한 중요한 원인”이라고 지적했다.

이훈성 기자 hs0213@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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