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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과 문화] 동일범죄 동일처벌

입력
2018.08.07 18:25
수정
2018.08.07 18:44
27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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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방송에 ‘도전 골든벨’이라는 프로그램이 있다. 고등학교를 찾아가 학생들과 함께 진행하는 퀴즈대회로, 출연자들이 화이트보드에 정답을 써서 들어 올리고, 답을 맞춘 사람만 남는 퀴즈대회다. 얼마 전 이 프로그램에서 한 학생의 답안 화이트보드 문구가 블러(blur) 처리로 가려졌는데, 알고 보니 그 내용이 ‘동일범죄 동일처벌’이었다 해서 뒤늦게 문제가 되고 있다.

‘동일범죄 동일처벌’은 요즈음 주말마다 계속되고 있는 여성인권 집회 구호 중 하나다. 특히 불법 촬영(소위 ‘몰카’) 범죄에 대해 가해자의 성별에 따라 수사와 처벌의 정도가 다르다는 불신이 확산되어 수만 명의 여성들이 처음에는 혜화에서, 지난주부터는 광화문에서 이 문제를 비롯하여 낙태죄, 꾸밈노동, 성별임금격차 등 우리사회의 성차별 이슈를 제기하고 개선을 요구하는 집회를 하고 있다.

방송사는 정치적 이슈의 기재를 금지하는 프로그램 방침 때문이었다고 해명했다고 한다. 화이트보드에는 답안 외에는 가족과 친구들에게 전하는 응원 메시지 정도만 적는 것이 취지라는 말도 했다고 한다. 그러나 보도마다 해명이 오락가락하는 모습을 보아하니 아무래도 명확한 기준이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 명확한 기준에 반하는 문구였다면 녹화할 때 당사자에게 지우거나 고쳐 써 달라고 하면 되었을 일이다. 이 학생은 이 프로그램의 하이라이트라 할 수 있는 ‘최후의 1인’ 도전자였으니 현장에 사람이 많아 제작진이 미처 못 보았다는 변명도 납득이 어렵다. 방송분에서야 블러 처리를 하여 시청자들이 “대체 저 학생이 뭐라고 썼길래 가린 것인가”를 궁금해할 상황을 야기하고 문제가 되자 비로소 긴 변명을 늘어놓아 지금에 이를 필요가 없었다.

정치적 이슈여서 가렸다면 더욱 문제적이다. 어떤 범죄를 성역 없이 공정히 수사하라는 요구는 정치적이다. 그런 믿음을 갖기 어려운 현실에 목소리를 내고 피켓을 드는 것은 정치적이다. 표현의 자유도, 여성의 권리도, 평등도, 연령 차별 금지도, 공정한 공권력 집행에 대한 요구도 모두 지극히 정치적인 것이다. 이 정치적인 것들에는 ‘인권’이라는 이름이 있다.

지금까지 방송사들은 담배나 흉기, PPL이 아닌 상표, 신체 절단 장면 등에 블러 처리를 해 왔다. 새삼스레 풀어 말하자면 인권은 인간의 권리라는 뜻인데, 인권에 관한 구호가 담배, 흉기, 광고비 안 받은 상표와 같은가? 사회의 일원이 기회가 주어졌을 때 자신의 생각을 밝히는 일이, 그 정도의 정치적 행위가 흡연이나 상해만큼 사회적으로 부적절한가? 굳이 계속 가려야 할 정도로, 하면 안 되는 말이고 방송에 나가면 안 되는 생각인가?

언론에 실린 제작진 주장대로 페미니즘이나 편파수사 의혹이 사람들 간에 주장이 엇갈리는 이슈일 수는 있다. 어느 쪽이냐 하면, 인권의 역사는 애당초 대립과 투쟁의 역사고 그 과정에서 답을 찾아온 것이니 대립이 있다 하여 이상할 일이 아니다. 다만 첨예한 대립이 있다는 말이 대립의 양극이 동일한 윤리적 가치를 갖는 의견이라는 말은 아니다. 어떤 대립에는 정답이 있다. 더 옳은 쪽이 있다.

공영방송은 실제로 불법촬영 범죄에서 동일한 수준의 수사와 처벌이 이루어지고 있는지, 세간에 잘못된 정보나 편견이 전파되고 있지는 않은지, 특정 연령 및 성별이 사법부와 수사기관에 갖는 신뢰가 지나치게 낮은 것은 아닌지, 그렇다면 그 원인은 무엇인지 고민하고 올바르게 보도하여 널리 알릴 책임을 진다. 한 일반인 출연자의 자발적인 의사 표시를 삭제하는 것은 공영방송의 책임이 아니라 공영방송의 부적절한 개입이다. 현장에서 적절한 대안을 찾지 않고 뒤늦게 블러 처리를 하여 사회 일반에 어떤 정치적 문구나 입장이 그르다는 잘못된 신호를 보낸 것은, 공영방송의 명백한 과오다.

정소연 SF소설가ㆍ변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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