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학이 필요한 순간
김민형 지음
인플루엔셜 발행ㆍ328쪽ㆍ1만5,800원
학창 시절 수학 시험에 ‘이러저러한 사건이 벌어지는 경우의 수를 구하라’는 문제가 나오면 그 경우들을 일일이 나열하면서 풀었다. 무늬 있는 직육면체의 전개도를 찾으라는 문제는, 보기로 제시된 전개도를 시험지에서 찢어 내 직접 접어 보고 답을 맞췄다. 그래프의 기울기는 눈금자로 가로축과 세로축 길이를 재서 구했다. 눈물 없이 들을 수 없는 ‘수포자의 추억’이다.
수학을 몰라도 먹고사는 데 별 지장이 없다고들 한다. 물론 수학 점수가 인생을 좌우하지는 않는다. 하지만 우리는 한국 축구 대표팀이 월드컵 16강에 진출할 수 있느냐는 ‘국가적 대업’을 앞두고는 전자 두뇌를 가동해 확률과 경우의 수를 따진다. 그 경우의 수 때문에 한국은 세계 랭킹 1위 독일을 잡고도 울었고, 태극전사들은 난데없이 멕시코를 부활시킨 구국의 영웅이 됐다.
이렇듯 우리는 이미 수학적으로 살아가고 있다. 확률 문제는 못 풀어도 ‘비 올 확률 51%’의 의미가 ‘우산을 챙겨서 출근하는 게 낫다’는 의미라는 건 안다. 물은 투명하지만 바다가 파란색인 건 빛의 산란 때문이라는 상식도 이해하고 있다. 현대인의 분신이나 다름없는 휴대폰과 컴퓨터도 마찬가지다. 인터넷 검색 시스템과 정보 전송은 ‘대수 이론’ 없이는 가능하지 않다. 빅데이터도, 인공지능도, 수학에 기초한다. 수학은 기술에 영향을 미쳤고, 기술의 발전은 인간의 사고를 변화시키고 있다.
‘수학이 필요한 순간’은 이처럼 아주 기본적인 개념만 이해한다면 누구나 재미있게 읽을 수 있는 책이다. 한국인 최초 옥스퍼드대학 정교수이자 세계적인 수학자인 김민형 교수가 인간의 사고 능력과 우주에 대한 탐구를 7개 강의로 풀었다. 수학이란 무엇인가에서 출발한 이 강의는 위대한 수학적 발견이 우리의 사고 방식을 어떻게 확장시켰는지 살펴보고, 이를 토대로 윤리적 판단이나 이성과의 만남 같은 사회문화적인 주제를 아우른 뒤, 우주를 수학적으로 이해하려는 노력으로까지 나아간다.
이 책에서 특히 흥미로운 건 인문학의 영역이라고 생각한 ‘윤리적 판단’에 수학적 사고가 어떻게 기여할 수 있는가를 탐구한 대목이다. 다섯 사람이 자동차를 타고 가고 있는데 갑자기 길 한가운데에 세 사람이 나타났다고 가정해 보자. 제동 거리가 부족한 상황에서 계속 직진하면 세 사람이 죽고, 진로를 바꾸면 장벽에 부딪혀 자동차에 탄 다섯 사람이 죽는다. 우리는 어떤 선택을 할 것인가. 각자의 선택이 내려지면 이 질문은 계속 세분화되면서 또 다른 선택을 요구한다. 이 질문들은 MIT 기계공학과에서 자율주행 자동차에 들어갈 프로그램을 만들기 위해 고안한 게임이다. 윤리라는 형이상학적 문제를 알고리즘으로 만들어 내고 있는 것이다. 이 사례까지 소개한 저자는 독자에게 넌지시 말을 건넨다. 수학적 사고가 도덕적 오류로부터 우리를 구출할 수 있다고, 그리고 더 나아가 선하고 악한 것도 확률론의 지배를 받는다고 말이다.
‘월드컵 16강 진출 경우의 수’와 ‘비 올 확률 51%’ 외에도 세상 모든 순간을 이해하는 바탕에는 수학적 사고가 있다는 사실을 깨닫는 순간, 뇌세포가 재배열되는 듯한 지적 감흥이 찾아온다. 어려운 개념을 영화나 음악 같은 도구를 들어 비유하지 않고 오로지 순수하게 수학 그 자체로만 이야기하는데도 무리 없이 읽힌다. 이 책을 진작에 읽었다면 수포자가 되지는 않았을 것 같다.
김표향 기자 suzak@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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