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미디ㆍ공포ㆍ갱스터 등 거쳐
이번엔 SF로 존재론적 고민 다뤄
“성공했던 장르 반복하고 싶진 않아
최근엔 프랑스 드라마 연출 제의받아
내 창작의 밑거름은 백수 경력
프랑스서 5개월간 영화 여행하기도"
서울예대를 중퇴하고 군 제대 후 8년 가량을 백수로 살았다. 서른넷까지 이어진 ‘백수 리듬’을 깬 건 교통사고였다. 차 사고로 목돈이 필요했을 때 한 공모전이 눈에 들어왔다. 라면 먹으러 간 식당에서 아주머니가 냄비 받침으로 들고 온 영화전문잡지에 난 시나리오 공모전이었다. 마감까지 남은 시간은 단 일주일. 세상과 떨어져 몽상을 많이 한 덕(?)일까. 급히 쓴 시나리오는 덜컥 당선작이 돼 버렸다. 라면 한 그릇이 바꿔 놓은 인생 역전이라니. 1998년 영화 ‘조용한 가족’으로 데뷔해 20년 동안 한국영화 기둥 역할을 하고 있는 김지운(54) 감독 얘기다.
김 감독은 충무로 최고의 스타일리스트로 통한다. 특정 장르에 매몰되지 않으면서도 자신만의 표현법을 개척해 왔다. 레슬러로 변신한 은행원 이야기를 담은 코미디 ‘반칙왕’(2000), 구전설화를 슬프도록 아름답게 표현한 공포물 ‘장화, 홍련’(2003)과 폭력조직의 세계를 그린 갱스터 영화 ‘달콤한 인생’(2005)으로 연출 이력을 이어 갔고, ‘좋은 놈, 나쁜 놈, 이상한 놈’(2008)으로는 한국형 웨스턴을 시도했다. 그의 작품들을 꿰는 단어는 변신, 도전, 영상미다. 늘 새로운 장르에 도전하고 자신만의 스타일을 유지하면서도 상업적인 성취를 이루며 평단의 지지를 받았다.
“궁금해서다. 그래서 확인해 보는 거고.” 지난달 27일 서울 삼청동의 한 카페에서 만난 김 감독의 눈은 소년처럼 빛났다. 그는 생각한 대로 살지 않으면 사는 대로 생각하게 된다는 말을 연료 삼아 최근 또 다른 탐험에 나섰다. 일본 SF 애니메이션 ‘인랑’(1999)을 실사화한 동명 영화를 선보였다. 강동원을 ‘인간 병기’로 내세워 존재론적 고민을 다루고 통일을 앞둔 2029년 한반도를 가상으로 정치 권력 암투를 보여 준다. 그의 어떤 작품보다 관객의 반응이 극단적으로 엇갈리고 있는 가운데 김 감독은 새로운 영역을 머릿속에 두고 있다.
김 감독은 4부작 프랑스 드라마 연출을 제안받았다. 제작이 확정되면 데뷔 후 첫 드라마 연출이다. 감독으로 20년의 시간을 보내면서도 끊기지 않는 그의 모험 정신은 어디서 온 걸까. 김 감독은 작업실에 쿠바 혁명가인 체 게바라(1928~1967)의 대형 사진을 걸어 뒀다. “내게 영웅이다. 성공에 안주하지 않고 ‘정글’로 뛰어가 끊임없이 행동했으니까.”
- 영화 ‘인랑’의 화두는 개인의 각성이다. 왜 지금 이 이야기를 꺼냈나.
“영화를 기획했을 때가 2012년이다. 일본에선 아베 정권이 시작됐다. 중국은 시진핑, 러시아는 푸틴 체제로 주변 나라들이 우경화로 블록화되고 있었다. 안으로는 보수와 진보 같은 정치 진영 대립을 넘어 남성 혐오와 여성 혐오까지 번졌다. 빅데이터도 이슈였다. 내 흔적을 모은 분석 자료로 인터넷에서 어떤 취향을 권유받고 선택해야 했다. 개인이 집단에 편입되면서 결국 사라지고 있었다. 집단에 속하기를 강요당하고 있다는 생각을 했다. 그래서 ‘인랑’ 속 조직의 ‘짐승’으로 자란 임중경(강동원)으로 그 문제를 다뤄 보고 싶었다.”
-한국 상황과 접점을 찾는 게 중요했다.
“영화처럼 공권력의 이름으로 누군가를 억압한 역사는 우리에게도 있다. 5ㆍ18 광주민주화운동 때 시민을 학살한 공수부대, 그 후 민주화 과정에서 백골단이 있었다. 이들을 영화에서 특기대로 표현했다. 부당한 (집단의) 명령을 수행해야만 했던 이들에게도 내상은 있다. 누가 치유해야 할까. 이 질문에서 영화를 시작했다.”
-원작과 달리 결말이 희망적이라 원작 팬들의 원성이 높다.
“조직을 뛰쳐나와 나를 찾은 남자(임중경)가 희생당하지 않길 바랐다. 어두운 원작과 달리 대중적 접점도 찾고 싶었다. 많은 영화가 남성 중심 서사다. 여성 캐릭터의 희생으로 남성 캐릭터가 성장하는 걸 피하고 싶기도 했다.”
-SF 도전에 대한 두려움은 없었나.
“‘로보캅’이나 ‘배트맨’ ‘아이언맨’처럼 특수한 옷을 입고 박진감 넘치는 액션을 선보이는 영화를 만들고 싶었다. ‘인랑’이라면 할 수 있지 않을까 싶었다. 강화복(특기대 전투복)으로.”
-엉뚱한 구석이 있는 것 같다. 백수 시절 프랑스 영화 여행까지 간 걸 보면.
“어머니가 퇴근하면 집 문 열어 주던, 백수 8년 차였나. 영화 제작의 꿈을 키워야 할지 다른 직업을 찾아야 할지 심각하게 고민했다. 마지막이란 심정으로 세상에서 영화를 제일 많이 볼 수 있는 곳을 찾다 파리로 갔다. 아르바이트로 번 돈 150만원을 들고 다섯 달을 머물렀다. 일등석 유레일 패스를 끊어 파리에서 심야 기차 타고 해 뜨면 다른 지역으로 가는 식으로 잠자리를 해결했다. 시네마테크 프랑세즈(파리에 있는 유명 영화 복합 문화 시설)에서 개관 40주년 기념으로 세계영화사를 총정리하는 프로그램을 진행했다. 두 달 동안 100편을 봤다. 아시아계 프랑스 학생의 학생증을 빌려 정말 싸게(웃음).”
-특별한 경험은 없었나.
“자크 드미의 ‘쉘부르의 우산’을 보는데 노인 관객들이 많았다. 어떻게 보러 왔냐 물었더니 ‘드미는 우리와 평생을 함께했다’고 답했다. 감동적이더라. 영화에 내 인생을 걸 만하구나 싶었다.”
-직접 쓴 책’ 숏컷’(마음산책 발행)을 보니 어려선 (영화 ‘시네마 천국’의) 토토처럼 자랐더라.
“동네(경기 의정부 호원동) 극장에서 영화 포스터를 붙이면 공짜 표를 줬다. 집 주위에 포스터 붙여 공짜 표 받고 온갖 영화를 본 것 같다. (한진희 방희 주연의) ‘표적’(1977)이 기억에 남는다. 반공영화를 가장한 에로물이었으니까. (웃음)”
-어려서부터 영화를 즐기고 감성적이었던 것 같다.
“교정에서 바람에 흔들리는 버드나무를 보고 울었다. 초등학교 1학년에서 2학년 올라가는 시기였다. 환경이 바뀌니 심란하더라. ‘지나가는 건 다시 돌아오지 않는 건가’란 생각을 한 것 같다(웃음). 4~5세 때 TV 보다 기절한 적도 있다. 반공 수사드라마였는데 고문하는 장면을 보고. 병원에 갔더니 너무 감수성이 예민해서라고 하더라.”
-‘달콤한 인생’ 초반 버드나무 장면(“스승님 저것은 나뭇가지가 움직이는 겁니까 바람이 움직이는 겁니까?”라는 소년의 목소리가 들어간 장면)이 그래서 나온 건가.
“영향을 받았을 수도 있었겠다(웃음).”
-그림을 잘 그리는 걸로 안다. 영화에 직접 그린 그림이 활용된 적은 없나.
“‘달콤한 인생’ 때다. 강 사장(김영철)이 그린 교회의 첨탑 스케치다.”
-가장 힘들었던 때는.
“‘장화, 홍련’ 준비할 때였다. 전작이 ‘반칙왕’이었으니까. 유머를 지우고 정통 호러를 해야 하는 상황인 데다 주인공 임수정이 당시에는 신인급 배우였다. 임수정도 힘들어했다. 촬영장에 귀신이 있다는 소문이 돌았다. 알고 보니 임수정이 숙소에 돌아와 우는 소리였다. 자신의 연기가 마음에 들지 않아서였다. 난 공무원 시험 보는 악몽까지 꿨다(웃음).”
-‘문화계 블랙리스트’에 올랐다. ‘밀정’ 제작이 어렵지 않았나.
“정부 협조가 잘 안 됐다는 얘기가 있었다. 개인적으로 불편한 건 없었고. 다만, 누군가가 자신들의 생각과 다르다는 이유로 리스트를 만들고, 날 눈여겨봐야 할 대상으로 분류한 게 꺼림칙할 뿐이다. 해야 할 말과 행동을 했을 뿐이다. 세월호 특별법 제정 촉구 서명 운동은 국민으로서 당연한 일 아닌가.”
-창작의 밑거름을 꼽자면.
“백수 경력이다. 사람들과 교류하지 않고 보니 다른 사람 생각과 섞이지 않았다. 생산적인 일을 하지 않아 고유한 언어가 쌓였다. ‘조용한 가족’이 나올 수밖에 없었다(웃음).”
-감독으로서의 지론이 무엇인가.
“(영국 록스타) 데이비드 보위가 그랬다. ‘멈춰 있는 것이 가장 큰 적이고 독’이라고. 성공했던 장르를 반복하는 건 싫다. 새로운 걸 하면 동반하는 위험 요소들이 오히려 내겐 창작의 원동력이 된다.”
양승준 기자 comeon@hankookilbo.com, 김표향 기자 suzak@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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