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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과 문화] 다른 모습의 용기

입력
2018.07.17 18:00
수정
2018.07.17 18:04
31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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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6월 28일, 친구가 보낸 책을 받았다. 그가 직접 쓴 책이었다. 헌법재판소가 양심적 병역거부자 대체복무제가 없는 현행 병역법에 헌법불합치 결정을 한 날이었다. 면지에 친구의 인사가 적혀 있었다. “접견을 와 주고, 어머니를 만나 주고, 출소 때 만년필을 선물해 줬던, 정소연 님께”

그는 양심적 병역거부로 일 년 반을 복역했었다. 평화주의자였다. 나는 평화운동이 뭔지 잘 몰랐다. 그저 친구가 군대 대신 감옥을 선택했다는 사실에 놀랐고, 입대를 한대도 늦어서 어떡하나 싶을 나이인데다 가방끈도 긴 친구가 겪을 고생이 막연히 걱정스러웠고, 양심적 병역거부자와 친구라는 점이 신기했다. 그 신기한 기분이 자랑스럽고 죄스러웠다.

감옥에 가기 전에 ‘갈라쇼’를 한다고 했다. 그 ‘갈라쇼’는 낯설었고, 이상했다. 너무 이상했기에 아직도 기억이 난다. 초대장은 익살스러웠고 사람들은 애써 흥겨웠고 이미 감옥에 다녀온 평화활동가들이 덕담 비슷한 말을 한마디씩 했다. 다큐멘터리를 찍는다는 분들이 카메라를 들고 바삐 돌아다녔다. 나도 한마디 했던 것 같기도 하다. 친구는 사람들 앞에서 내가 그때까지 본 중에 가장 많은 말을 했다. 자그마치 아홉 장 반에 달하는 병역거부 소견서를 읽은 것이다.

나는 그가 병역거부를 결정한 이유를 아주 진지하게 들었다. 그때는 감동했던 것 같기도 한데 솔직히 고백하자면 내용은 전혀 기억이 안 난다. 얼마 지나지 않아, 시민사회 활동가 친구가 병역거부자 친구를 위한 후원 계좌를 만들었다. 나는 월 오천 원을 냈다. 병역거부자 친구가 가석방으로 출소한 후, 그 계좌는 활동가 친구가 있는 야학 후원 계좌가 되었다.

양심적 병역거부자에 대한 징역형은 오랫동안 일 년 육 개월이었다. 그보다 짧은 징역형을 살면 출소 후 보충역으로 편입되다 보니 전과의 도돌이표를 막기 위해 정해진 기묘한 관행이다. 많은 사람들이 그렇게 감옥살이를 했다. 나에게 친구의 선고공판은 내가 본 첫 재판이었고, 영등포교도소는 내가 본 첫 교정시설이었다. 친구는 내가 변호사가 되기 전까지, 내가 아는 유일한 실형 전과자였다. 나는 전과자 친구를 본 경험에 기대어 영등포교도소를 배경으로 소설을 한 편 썼다.

국제인권 활동을 시작하고 보니 대체복무제 도입은 시간문제였다. 대체복무제는 유엔 자유권 규약에 명문의 근거가 있는데다 멀게는 유럽 각국부터 가깝게는 대만까지 대부분 나라에서 이미 도입하고 있는 제도라 한국도 도입하라는 압력이 이미 굉장히 강했다. 유엔 자유권위원회에는 한국의 대체복무제 미비로 인한 사건이 넘쳐 났다. 국내에서도 양심적 병역거부에 대한 1심 무죄 판결이 증가하고 있었고 현 대통령의 공약사항이었다. 헌법재판소가 아니라면 법 개정으로라도 언젠가는 도입되었을 것이다. 실리를 따져 보아도, 신념을 이유로 감옥에 가겠다는 결정을 실행에 옮길 정도의 사람을 굳이 전과자로 만드는 것보다는 다른 일을 시키는 편이 낫다. 대체복무제도가 있어도, 대체복무자는 딱히 줄지도 늘지도 않고 일정한 편이다.

그러나 시간문제라는 말은 시기상조라는 말과 한없이 가깝고, ‘대체’라는 말은 ‘복무’라는 단어를 쉽게 가리고, ‘양심적’이라는 번역어는 수많은 사람들의 양심을 자극한다.

친구의 책은 헌법재판소 결정보다 몇 시간 먼저 도착했다. 나는 헌법재판소의 선고를 들은 다음, 친구에게 “어떻게 책이 딱 오늘 도착했더라”는 문자를 보냈다. 친구는 자기 책을 너무 열심히는 읽지 말라고 했다. 나는 그의 책을 열심히 읽었다. 마침내 수의(囚衣)를 벗은 신념을 응원하는 마음으로. 총포와 군복이 아닌 다른 모습의 용기를 응원하는 마음으로. 어떤 빚을 갚고, 다음 공격과 그럼에도 일어날 변화 앞에서 옷을 여미는 마음으로.

정소연 SF소설가ㆍ변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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