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정은, 미국 압박에 자존심 상해도
멀리, 길게 봐야 평화ㆍ번영 도래해
비핵화 실천 의지 과감하게 보여야
우려되던 우여곡절이 시작됐다. 북한이 남북 고위급회담을 일방적으로 연기하고, 미국을 향해 북미 정상회담을 재고할 수 있다는 경고를 날렸다. 4ㆍ27 남북 정상회담을 기폭제로 3ㆍ26, 5ㆍ7 북ㆍ중 정상회담, 5ㆍ9 한ㆍ중ㆍ일 정상회담이 숨 가쁘게 이어져온 한반도 비핵화 흐름에 역류가 일어난 것이다.
물론 판을 깨려는 것이 아닌, 기세 싸움임은 다 짐작한다. 그러나 대수롭지 않다고 낙관하기에는 남북 간, 북미 간 사소한 오해나 불만이 협상이나 화해 무드를 깬 사례가 많다는 점이 걸린다. 설마, 설마 하다가 북미 정상회담 자체가 열리지 않을 수도 있기에 미국도, 북한도 절제의 미덕을 발휘해야 한다고 본다. 내일 있을 5ㆍ22 한미 정상회담이 6ㆍ12 북미 정상회담의 튼튼한 다리 역할이 되기를 기대한다.
북한 입장에선 화가 날만도 하다. 핵 실험도 미사일 발사도 하지 않겠다, 풍계리 핵실험장도 폐기하겠다고 공언했고, 억류 중이던 한국계 미국 시민 3명도 석방했는데 미국은 계속 압박만 하니 자존심이 상할 법도 하다. 오죽하면 “미국이 북한을 패전국 다루듯 한다”는 얘기가 나왔을까. 하지만 바로 이 대목에서 역발상이 필요하다. 격한 반응은 자제하는 대신 대범하고 통 크게 나가야 한다. 진정 핵을 포기하고 사회주의식 경제성장을 이루겠다는 전략적 결단을 내렸다면, 김정은 국무위원장은 멀리, 길게, 깊이 안팎을 보며 다음과 같은 생각을 꼭 하길 바란다:
“미국의 최대 압박에 의해서가 아니라 내 스스로 핵무기 폐기를 앞장서서 실행할 때만이 새 길이 열린다. 오직 이 결단만이 체제를 안정시키고 우리 인민들이 평화롭게 살게 할 것이다. 그리고 남북한과 동북아 모두 평화와 번영을 누릴 수 있을 것이다”라고.
트럼프는 김정은 정권 교체나 붕괴는 없을 것이라고 했다. 북핵 처리 방식도 리비아식이 아닌 ‘트럼프 모델’이라고 다짐했다. 구체적으로는 ‘한강의 기적’이 북한에도 가능하고, 미국은 민간 차원에서 지원하겠다는 것이다. 국제기구-세계은행, 아시아개발은행, 유럽부흥은행- 등 북한 경제개발과 산업화에 도움을 줄 수 있는 수많은 경제지원 ‘기회의 창’도 열릴 것이다.
그러자면 김 위원장은 할아버지나 아버지와 완전히 다른 새 판, 새 틀을 짜야 한다. 핵무기영구 폐기라는 국제사회의 요구는 북한의 미래를 위한 ‘선의의 충고’다. 무기로 밥을 만들 수는 없다. 전쟁을 하지 않겠다면, 무기는 ‘쇳덩어리’일 뿐이다. 국면마다 조건을 달고 시간을 끌며 조금이라도 이득을 취하는 ‘살라미 전술’은 던져 버려야 한다. 크게 버리고, 크게 얻는 통 큰 행보를 해보자.
하나 더! 비핵화 의지의 진심을 실천으로 보여줘야 한다. 북한이 핵무기나 미사일을 슬쩍감춰두고 시치미를 떼면서, 미국을 향해 비핵화를 공언하고 남한을 향해 “평화롭게 살자”고 하면, 누가 동의하고 누가 믿겠는가? 북한에는 핵 시설이 있는 땅굴이 40~100곳, 핵탄두는 20~60개가 있는 것으로 추정한다. 북한은 미국이나 한국이 파악한 정보 이상으로 핵무기와 핵물질 리스트를 먼저 내놓는 게 옳다. 그리고 솔선해서 국제원자력기구(IAEA), 미국, 한국과 협조해 최단 시간 내 핵 폐기에 나설 때 북한과 한반도에 새 세상이 펼쳐질 것이다.
70년 넘게 ‘섬 아닌 섬’으로 막히고 끊어진 한반도에 육로와 바닷길, 하늘길이 활짝 열릴 것이다. 부산, 목포에서 출발해 기차로, 자동차로 유럽 대륙으로 달려갈 수 있다. 선열들이 조국의 광복을 꿈꾸며 살을 에는 추위와 굶주림 속에서 모진 삶을 이어갔던 만주 벌판과 시베리아 광야도 뚫린다.
가슴 설레는 이 그림이 아직은 꿈이지만, 김 위원장이 앞장서서 새 길을 밟는 순간 현실이 될 수 있다. 시작이 반이다. ‘한강의 기적’이 ‘대동강의 기적’으로 뻗어나가게 해보자. 이 길은 하나만 살고, 다른 하나는 죽는 길이 아니다. 둘 다 살고 모두가 번영하는 길이다.
양성철 전 주미대사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