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인은 오늘 마치 ‘와토’의 그림 속에 등장하는 여인 같군요.” –샤를 드골 대통령-
턱시도 일색의 홀 한가운데로 그가 나타났다. 흑백 필름 같은 풍경 속에 홀로 빛나는 등장이었다. 빈틈없이 몸을 감싼 드레스 자락 사이에서도 움직임은 한껏 사뿐했다. 그 순간만큼은 존 F. 케네디도 샤를 드골도 조연에 불과했다. 오직 ‘지방시’의 드레스를 입은 영부인만이 스포트라이트를 받는 ‘주연’이었다. 1961년 베르사유 궁전, 6월의 초여름 햇살 속에 모습을 드러낸 재클린 케네디의 모습은 그야말로 찬란했다.
“세계에서 가장 세련된 여성은 지방시를 입는다.” 패션잡지 보그(Vogue)의 찬사는 과장이 아니었다. 재클린 케네디뿐만이 아니다. 오드리 햅번, 그레이스 켈리 등 당대에 이름을 날렸던 패션 아이콘들은 하나같이 위베르 드 지방시(Hubert de Givency)의 드레스를 입고 어디서든 눈부시게 우아한 ‘주인공’이 됐다. 지난 10일, 아흔한 살의 나이로 단잠에 빠지듯 영면한 지방시는 생전 입버릇처럼 말했다고 한다. “천은 살아 있는 존재다. 나는 천이 인도하는 길로 따라갈 뿐이다.” 한 세기에 가까운 시간 동안 그가 ‘천’으로 써내려 온 역사는 과연 어떤 것이었을까.
소년은 무도회장에서 춤을 추지 않았다
늘 구석에 앉던 소년은 눈동자만 바빴다. 무도회장으로 끊임없이 밀려들어오는 여자들의 드레스 자락을 쉼 없이 쫓아야 했으니까. 홀 한가운데에서 그들의 스커트가 한껏 피어났다 오므라드는 광경을 물끄러미 바라만 보는 데에도 시간은 훌쩍훌쩍 지나갔다. 춤은 추지 않았다. 여자들의 장롱에서 가장 ‘자신 있는 드레스’가 한꺼번에 쏟아져 나오는 곳, 소년에겐 보고 있기만 해도 더할 나위 없는 ‘천국’이었다.
지방시는 겨우 걸음마를 시작했을 무렵부터 바다 건너온 형형색색의 천들에 파묻혀 자랐다. 직물 공장 감독이었던 외할아버지의 영향이었다. 1927년 프랑스의 귀족으로 태어나 두 살 때 아버지를 여읜 그에게 외할아버지는 아버지와 다름없었다. 때로는 부드럽고 때로는 거친, 때로는 하늘하늘하고 때로는 도톰한 그 천들의 무수한 감촉 속에서 꼬마는 심심할 틈이 없었다. 여덟 살 땐 비공식 ‘데뷔’까지 했다. 첫 모델은 손때가 켜켜이 앉은 인형. 어머니의 패션 잡지를 훔쳐보며 굴러다니는 원단 조각을 자르고 꿰맨 아이는 금세 손바닥만 한 드레스를 뚝딱 만들어 낸다.
가족의 바람대로 법대에 갔지만 천재성은 숨겨지지 않았다. “시험을 잘 봐야지 천을 만지게 해주겠다는 외할아버지의 으름장에 정말 열심히 공부를 했죠. 손안에 천들이 들어오면 그저 바라보고 만지는 데에만 몇 시간이 순식간에 날아갔어요. 그건 ‘소명’이었습니다.” 무작정 파리를 찾은 청년의 ‘패션 인생’은 그렇게 시작됐다.
그가 처음으로 문을 두드린 곳은 그의 우상이었던 크리스토발 발렌시아가(Cristobal Balenciaga)의 아틀리에였다. 그러나 한 발짝 들어가 보지도 못하고 문전박대를 당했다. 10년도 되지 않아 지방시는 발렌시아가의 아틀리에 바로 맞은편에 자신의 살롱을 열게 된다. 그렇게 스승이자 친구, 서로에게 가장 생생한 영감을 주는 관계로 발전한 이들은 ‘B&G’라는 콤비로 불리며 패션잡지 한 면을 나란히 차지하기도 한다. 실제로 지방시는 “작업을 할 때마다 발렌시아가가 내 어깨에 손을 얹고 있는 것 같은 느낌이 든다”고 밝혔을 정도로 스승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고 한다. 우상이 드리운 그림자가 짙을수록 주변은 금방 시들기도 하는 법. 그러나 거장은 달랐다. 그에겐 그만의 ‘정수’가 있었다.
여성의 허리를 자유롭게 한 ‘베이비 돌’ 드레스
“완벽함이란 마네킹에 입혔을 때 아름답게 보이는 옷에 쓰는 말이 아니다. 완벽함이란 그 옷을 마네킹이 아닌 고객이 실제로 입었을 때 나타나는 것이다.” –위베르 드 지방시-
바로 이전 세대의 디자이너 코코 샤넬이 여성의 몸을 코르셋으로부터 해방시켰지만, 단단히 조인 상의로 드러내는 잘록한 허리, 풍만한 가슴에 대한 집착은 사라지지 않았다. 동시대에 활동한 대가 크리스티앙 디올(Christian Dior)은 여전히 여성의 몸을 엄격하게 통제하고 억누르는 ‘모래시계’형 실루엣의 디자인을 선보였다. 이때 지방시가 들고 나온 ‘베이비 돌’ 드레스는 그야말로 파격이었다. 허리선이 어깨까지 올라가고 치마선이 ‘A’자로 풍만하게 퍼지는 드레스가 여성의 허리를 시원하게 해방시킨 것. 종종걸음은 사라졌고 보폭이 큼직해졌다. 코르셋 안으로 잔뜩 구겨져 있던 몸이 풀려나며 운신의 폭에도 여유가 생겼다. 그에겐 한껏 자유로워진 여성들의 움직임도 ‘하나의 패션’이었다. 그의 신조는 이랬다. ‘아름다움이란 나다움에서 나오고, 나다움이란 일상의 움직임에서 나온다.’
“그의 옷을 입으면 노래가 훨씬 더 잘돼요. 그러면서도 아름다움을 잃지 않을 수 있죠.” -오페라 가수 프레데리카 폰 슈타테-
가장 큰 변화는 아름답고 싶은 날의 ‘비장한 각오’가 필요 없어졌다는 것. 드레스를 입는 날이면 여성들은 배 속의 장기가 한 데 뭉쳐진 듯한 고통은 기본, 매 끼니를 새 모이만큼 먹으며 하루를 버텨낼 의지를 다져야 했다. 지방시는 아름답고 싶은 특별한 날들을 일상으로 만들었다. 편안한 멋을 추구하고픈 여성들에게 그의 옷은 분명 해방구였다.
‘원피스’ 드레스가 전부였던 하이 패션계에 ‘투피스’, 즉 상의와 하의가 나눠진 스타일을 본격적으로 도입한 것도 지방시였다. 1952년 스물넷의 나이로 데뷔한 지방시가 처음으로 대중에게 선보인 상품은 드레스가 아니었다. 모델의 이름을 딴 애칭까지 생겼을 정도로 널리 사랑받았던 일명 ‘베티나 블라우스’. 남성용 셔츠에만 쓰였던 면 소재를 사용해 가격을 낮추고 소매 부분에 정교한 러플과 자수를 가미해 품위를 잃지 않았다. 그 덕인지 파리의 여대생도 그의 고객이 됐다. ‘누구나 고급 패션을 접할 권리가 있다’는 발상의 전환은 이때 시작됐다. 가격을 현실화한 기성복 라인 컬렉션엔 셔츠와 스커트, 코트와 바지뿐 아니라 심지어는 우리에게 멜빵바지로 잘 알려져 있는 ‘오버롤’까지 등장했다. 입는 사람의 취향대로 조합해 자신만의 스타일을 완성할 수 있게 한 것. 사실 허리길이도 배꼽의 위치도 제 각각인 여성들 모두에게 어울리는 드레스는 존재할 수 없었다. 지방시는 자신의 옷이 ‘마네킹’이 아니라 살아 움직이는 여성들의 체온과 호흡할 때 비로소 완벽해질 수 있다고 믿었다. 그것이 그의 우상을 비롯한 당대 최고의 디자이너들과는 달랐던 그만의 ‘정수’였다.
“여성은 단순히 옷을 입는 것이 아니라, 그 안에서 살아간다” –위베르 드 지방시-
햅번과 지방시, 서로를 지탱한 ‘평생의 동반자’
“햅번? 햅번이 누군데? 캐서린 햅번?” “아뇨, 오드리 햅번인데요.”
당대 최고 미녀와 당대 최고 디자이너의 운명적 만남은 사실 그다지 운명적이지는 않았다. 지방시는 오드리 햅번이 누군지도 몰랐다. 당시만 해도 <로마의 휴일>이 유럽에 배급되지 않았던 상황. ‘햅번’이라면 대부분이 미국 출신의 유명 배우 캐서린 햅번으로 넘겨짚었다. 하지만 아틀리에의 문을 두드린 건 낯익은 중년의 명배우가 아닌 한참 앳된 스물네 살짜리 영국 아가씨였다. 티셔츠에 슬리퍼, 짧은 머리 위에 곤돌리에 모자를 푹 눌러쓴 그가 쏟아질 듯 큰 눈으로 영화 의상 제작을 부탁했다. ‘다음 컬렉션 준비로 바쁘니 그냥 돌아가라’고 달랠 때까지만 해도 지방시는 이 어린 배우가 ‘평생의 뮤즈’가 될 것이라고는 상상하지 못했을 것이다. 지난 시즌의 옷이라도 입어보고 싶다는 간청을 허락했을 때에도 큰 기대는 하지 않았다. 그러나 몇 분 뒤 그의 드레스를 입고 등장한 햅번의 모습을 보고 난 후에야 그는 예감했다. 서로의 존재를 지탱하는 평생의 동반자가 되리라는 것을.
영화<사브리나>로 처음 맺어진 파트너의 인연은 동업자에서, 친구로, 때론 연인으로, 결국엔 평생을 함께할 동반자로 조금씩 모습을 바꾸며 40년을 이어졌다. <티파니에서 아침을>에 등장한 오드리 햅번의 ‘리틀 블랙 드레스’는 영원히 ‘지방시’라는 브랜드를 한 컷으로 대표하는 이미지가 됐고, 지방시의 클래식하면서도 우아한 드레스는 그 어떤 배우도 넘볼 수 없는 햅번만의 고결한 입지를 다져줬다.
“우리는 다른 디자이너와 배우들처럼 ‘계약 관계’를 맺지 않았죠. 그냥 서로를 사랑했어요. 그게 유일한 비결이었죠.” –위베르 드 지방시-
세기의 우정은 1993년 오드리 햅번이 암으로 세상을 떠나며 끝을 맺는 줄 알았다. 하지만 1995년에 열린 지방시의 마지막 쇼에서 오드리 햅번의 아들 션 페러는 지방시가 햅번의 60세 생일에 선물했던 장미 덤불에서 자른 하얀 장미 다발을 그에게 선사한다.
“지방시의 드레스만이 나를 나로서 느끼게 하는 유일한 것이죠. 그는 디자이너가 아니라 누군가의 개성을 창조해낼 줄 아는 사람이에요.’ –오드리 햅번-
“우아함의 비밀은 자기 자신을 드러내는 것”
지방시는 말했다. “몸이 옷 모양을 따라가는 것이 아니라 옷이 몸의 개성을 따라야 한다.” 그는 ‘우아함의 정형’ 같은 것은 없다고, 누구나 자기 자신만의 우아함이 있다고 믿었다. 또한 지방시는 드레스에 갇혀 있던 여성의 몸뿐 아니라 정형화된 멋에 갇혀있던 정신도 해방시켰다. 이제는 역사가 된 그를 두고 후대는 평가한다.
‘그는 여성에게 옷을 입혔지만, 여성은 그가 창조한 옷을 입고 삶을 호흡해왔다.’-카트린 조안-
그의 옷을 입었던 여성들은 누구보다 자신과 자신의 삶을 오롯이 사랑할 수 있었다.
박지윤 기자 luce_jyun@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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