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흘마다 열리는 오일장이 있다. 닷새에 한 번 서는 전통 오일장과 달리 태백 통리에는 매월 5ㆍ15ㆍ25일 장이 열린다. 도시의 재래시장이 비바람 막고 햇볕을 가리기 위해 대부분 천장을 덮었지만 이곳엔 그런 것도 없다. 지붕 없는 시장으로는 전국에서 가장 큰 규모로, 난장의 기분을 제대로 살렸다.
없는 것 빼고 다 있다…장 구경 재미 ‘쏠쏠’
태백에서 삼척 도계로 넘어가는 길목, 황연동 통리마을 주차장에 차를 대고 횡단보도를 건너자 고소한 냄새가 발길을 유혹한다. 붕어빵과 뻥튀기, 전기통닭구이 가게에서 풍기는 달콤하고 매콤한 냄새가 한겨울 찬 공기를 가른다. 그 사이에 사탕가게가 파고 들었고, 옆에는 소반과 큰 상이 인도를 점령하고 길게 늘어서 있다. 도로 옆 다소 넓은 공터는 지역 주민들의 난전이다. 채소와 약재, 잡곡을 조금씩 담은 소쿠리와 고무 대야가 통로 양편으로 오밀조밀하게 펼쳐진다.
여기까지는 맛보기다. 본격적인 시장은 공터를 지나 통리역(폐역)으로 이어진 500여m 골목이다. 통영에서 올라온 해삼과 멍게, 보성의 바지락과 꼬막, 서해안 대하, 부산 어묵까지 전국의 해산물이 다 모였다. 갓 튀겨낸 닭고기에 양념을 발라 강정 만들고, 뜨거운 족발을 썰어 내는 사장님의 손놀림이 바쁘다. 김이 모락모락 피어 오르는 어묵 항아리 주변에는 여행객들이 모여 이야기 꽃을 피우며 추위를 녹인다. 설설 끓는 대형 가마솥에서 퍼 담는 쇠고기국도 장터에서 빠지지 않는다. 메밀 가루로 얇게 부친 배추전과 전병, 수수 부꾸미와 꿀 호떡의 유혹도 지나치기 힘들다.
통리오일장에서 제일의 볼거리는 뭐니뭐니해도 골목 끝자락의 어물전이다. 꾸덕꾸덕하게 말린 황태ㆍ양미리ㆍ가자미, 꽁꽁 얼어붙은 동태와 각종 내장 부산물을 내놓은 생선가게를 지나면 살아 퍼덕이는 생선이 눈길을 사로잡는다. 임시 수족관에선 오징어가 헤엄치고, 대형 양철판 위로는 싱싱한 문어가 꿈틀댄다. 흥정이 끝난 난전 한편에서 채 썬 오징어 회로 소주 한잔 걸치노라면, 적당하게 삶아 건져 낸 문어에서 하얀 김이 피어 올라 장터 분위기는 절정에 달한다. 살아 있는 해산물은 대부분 인근 동해에서 올라온 물건이다. 해발 700m 고지대, 겨울잠에 빠진 것처럼 고요하던 통리는 이렇게 열흘마다 장꾼과 여행객들로 북적거린다.
3번 망한 통리…오일장으로 다시 서다
태백시는 통리오일장에 대해 ‘철암ㆍ장성ㆍ황지 등 태백에서 생산하는 지역 특산물을 비롯해, 동해와 삼척의 해산물, 봉화ㆍ영주 등 경북 북부지역의 농산물이 모이는 곳’이라고 소개하지만, 시장 분위기와 내놓은 물건으로 봐서는 전국 특산물을 다 모아 놓은 모양새다. 없는 것 빼고 다 있는 통리오일장은 그러나 탄광촌의 흥망과 애잔함의 산물이다.
김상구 태백문화관광해설사는 ‘세 번 망한 통리’라고 말문을 열었다. 1940년 철암과 동해를 연결하는 철도 개통으로 통리는 첫 번째 전성기를 맞는다. 개통 당시 통리역은 중간기착역이지만 종착역이고 시발역이었다. 바로 아래 삼척 도계와는 300m 표고차이 때문에 1.1km 구간에 선로를 깔지 못했다. 동해로 가는 사람들은 통리역에 내려 심포리역까지 걸은 후 다시 열차에 올라야 했고, 무거운 짐은 쇠줄에 매단 가공삭도로 운반했다. 짐꾼들도 두 역 사이를 부지런히 오가며 물건을 져 날랐다. 통리역 인근에는 자연스럽게 열차 승객과 짐꾼으로 붐볐고, 식당도 번성했다. 그러나 1963년 미 개통 구간이 완전히 연결된 후 통리는 위기를 맞는다. 짐꾼은 떠나고, 식당을 하던 사람들도 현재 태백의 중심인 황지로 옮겨갔다.
쇠락해가던 통리가 부활한 건 1982년 한보광업소가 문을 열면서부터다. 직원만 1,200명으로 통리의 부흥을 이끌었던 한보탄광은 그러나 1997년부터 내리막길을 걷다 2008년 완전히 문을 닫는다. 통리오일장이 선 것도 이 무렵으로, 어떻게든 지역을 살려 보려는 몸부림이었다. 그러나 시련은 두 번으로 끝나지 않았다. 2014년에는 동백산역에서 도계까지 터널로 바로 연결하는 선로가 개설돼 통리역도 문을 닫았다. (현재는 하이원추추파크가 폐 선로를 이용해 레일바이크를 운영하고 있다.) 철길까지 없어지며 통리는 사실상 세 번 ‘망한’ 셈이다.
현재 태백과 동해를 연결하는 38번 국도는 열차도 다니지 않는 통리 철도건널목을 지나 지그재그로 휘어지며 도계로 이어진다. 이 도로가 그나마 오일장을 지탱하는 버팀목인데, 장차 터널로 직선화할 계획이어서 통리는 철도에 이어 도로도 비껴 가는 지역으로 전락할 가능성이 크다. 길이 새로 나더라도 열흘마다 700고지 산골마을을 들썩이게 만드는 오일장의 정감만은 지속되길 기대해 본다.
태양의 후예와 태백의 후회, 그리고 만회
통리에 간다면 드라마 ‘태양의 후예’ 세트장도 함께 보길 권한다. 오일장에서 불과 1.5km 떨어진 백병산 자락에 자리 잡고 있다. 최고시청률 38.8%를 기록하며 인기를 끌었던 2016년 당시, 시청자들이 세트장을 찾았을 때는 붕괴된 (발전소) 건물 외에는 아무것도 남아 있지 않았다. 사전 제작으로 촬영을 끝낸 후 모두 철거했기 때문이다.
드라마가 그렇게 인기를 끌 줄 몰랐던 태백시는 뒤늦게 ‘우르크 태백부대’라는 이름으로 건강클리닉과 막사, PX 등을 복원하고 인근 군부대의 도움을 받아 트럭과 헬기까지 배치했다. 붕괴된 건물 앞에서 ‘송혜교ㆍ송준기 커플’이 되어 사진을 찍을 수 있고, 군복과 의사 가운 등을 입고 드라마의 주인공이 되어 볼 수도 있다. 우르크 성당 내부도 복원하고, 또 다른 촬영지였던 그리스 자킨토스 섬 홍보관도 설치했다. ‘태백의 후회’로 남을 뻔한 촬영지는 이런 우여곡절로 다시 여행객을 불러 모으고 있다. 단 우르크 성당은 촬영장이 아닌 통리에 세웠다. 통일성을 유지하지 못한 것 같아 다소 아쉽다.
‘태양의 후예’ 세트장은 한보탄광이 있던 자리로 실제로 드라마처럼 화사하지는 않다. 무너진 발전소는 철거 예정이던 한보탄광 건물이었고, 뒤편 산중턱에는 동백산역으로 석탄을 실어내기 위해 뚫은 터널과 선로가 그대로 남아 있다. ‘송송 커플’처럼 달콤하지는 않더라도 통리의 꿈이 쓸쓸하게 남은 흔적을 돌아보는 것도 괜찮을 듯하다.
태백=최흥수기자 choissoo@hankookilbo.com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