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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국은 팔짱, 은행은 갈팡질팡... 혼돈의 '가상화폐 실명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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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국은 팔짱, 은행은 갈팡질팡... 혼돈의 '가상화폐 실명제'

입력
2018.01.26 04:40
18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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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행 자율로 하되 책임 묻겠다”

당국 명확한 지침없이 압박하자

신한ㆍNH농협ㆍIBK기업 등

“신규 계좌 개설 안한다” 결정

거래소, 편법 회원 모집 나서고

투자자들은 “혼란스럽다” 불만

24일 오후 서울 시내 한 가상화폐거래소에 설치된 시세 전광판 앞을 한 시민이 지나가고 있다. 연합뉴스
24일 오후 서울 시내 한 가상화폐거래소에 설치된 시세 전광판 앞을 한 시민이 지나가고 있다. 연합뉴스

불과 닷새 뒤면 가상화폐 거래실명제가 시행(30일)되는 상황에서 은행들이 또 다시 “신규 투자자는 받지 않겠다”며 입장을 번복했다. 겉으로는 “신규까지 받으면 영업점 업무가 폭증할 것”이란 이유를 내 세웠지만 실상은 금융 당국이 “은행 자율적으로 결정하되 법적 책임은 철저히 물을 것”이라고 압박한 영향이 컸다. 정책의 방향성을 명확히 제시해야 할 금융당국은 뒤로 숨어 버렸고 은행들은 갈팡질팡 행보를 되풀이하면서 투자자와 시장 혼란만 가중되고 있다.

가상화폐 계좌 실명 시스템을 갖춘 6개 은행 가운데 현재 가상화폐 거래소와 계약을 맺고 있는 신한(빗썸ㆍ코빗ㆍ이야랩스), NH농협(빗썸ㆍ코인원), IBK기업(업비트) 등 3개 은행 관계자는 25일 “실명제가 시행돼도 신규 계좌는 개설하지 않기로 결정했다”고 밝혔다. 이들은 또 “일단 기존 고객만 실명계좌를 발급해줄 예정이고 신규 계좌를 트는 것은 추후 시장 상황을 보고 판단하겠다”고 덧붙였다. 사실상 신규 고객을 받는 것을 무기한 연기하겠다는 뜻이다.

KB국민ㆍKEB하나, 광주은행 등도 실명제 시스템은 구축했지만 가상화폐 거래소와 계약은 하지 않은 상태다. 국민은행 관계자는 “신규 계좌를 트려면 거래소와 계약 체결부터 해야 하는데 진행되고 있는 게 없다”며 “거래소 계약과 신규 계좌 제공 여부 등은 모두 신중히 검토할 것”이라고 말했다. 다른 은행들도 같은 입장이다.

그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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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러한 은행들의 태도는 불과 2주 전과 180도 달라진 것이다. 지난 12일 오후 금융당국은 이들 6개 은행과 실명거래 점검회의를 갖고 “이달 말 예정대로 실명제를 시행해달라”고 당부했고, 이에 은행들은 같은 날 동시에 신규 계좌 개설을 시작하기로 합의했다.

결정이 뒤집힌 것은 최근 금융당국의 발표 때문이다. 금융위원회는 지난 23일 실명제 시행일 발표와 함께 ‘자금세탁방지 가이드 라인’을 내놨다. 대책의 큰 줄기 자체는 예고돼 왔던 사안이었지만 문제는 거래소의 금융거래 목적과 자금의 원천을 확인하도록 하는 가이드라인의 총 책임자를 ‘은행’으로 지정하는 데서 생겼다. 이날 김용범 금융위원회 부위원장은 “내부적으로 위험 관리 없이 가상계좌가 제공되면 은행들이 자금세탁과 관련해 심각한 평판 위험에 노출될 것”이라며 “(가이드를) 지킬 자신이 있을 때만 해야 한다”고 밝혔다. 가상화폐 거래소와 신규계약이든, 신규 투자자 유치든 은행 자율로 할 수 있지만 법적 문제가 생기면 철저히 책임을 묻겠다는 엄포였다.

새로운 금융 영역인데다가 미래 예측도 어려운 상황에서 금융당국이 명확한 지침을 주지 않고 “자율로 하라”고 책임을 떠넘겨 버리자 은행들은 혼돈에 빠졌다. 발표 직후 “신규 계좌 불가”(기은), “보류”(신한), “일단 추진”(농협) 등으로 서로 다른 입장을 내다 결국 모두 “신규는 불가”로 입장을 바꿨다. 이러한 결정을 이젠 나머지 은행들도 따르는 형국이다.

가상화폐 거래실명제 혼란상은 처음이 아니다. 지난 11일에도 정부의 ‘거래소 폐지’ 발언에 신한은행이 실명제 도입을 무기 연기하겠다고 발표했다 일부 투자자의 불매운동 움직임과 당국 개입으로 철회한 바 있다. 사실상 보름 간 입장이 3번이나 바뀐 꼴이다.

오정근 건국대 교수는 “당국이 가상화폐에 대한 명확한 정의도 없이 영세 거래소가 난립할 때까지 나 몰라라 있다가 피해자가 속출한 뒤에야 궁여지책으로 은행한테 알아서 결정하고 책임도 지라고 하는 건 문제”라고 꼬집었다. 그는 “우리나라처럼 당국이 금융회사를 휘두르는 ‘관치’ 금융 체제 하에서는 은행들의 운신 폭이 좁기 때문에 당국이 명확한 신호를 주고 적극 대처할 책임이 있다”고 주문했다.

거래실명제가 시행돼도 신규 투자자 확보가 어려워지면서 가상화폐 거래소들은 각종 편법을 동원한 신규 회원 유치에 나섰다. 국내 1위 거래소 업비트는 이날부터 그간 중단했던 신규회원의 투자를 재개했다. 가상계좌로 원화를 충전해 코인을 사는 기존 방식과 달리 빗썸 등 다른 경쟁 거래소에서 사둔 가상화폐를 업비트 계정으로 옮긴 뒤 그 가상화폐로 업비트에서 다른 코인을 살 수 있도록 하는 방식이다. 본인 확인은 휴대폰인증 등을 통해 진행하고 있다. 단 입금은 안되고 출금만 가능하다. 업비트 홍보를 맡고 있는 두나무 관계자는 “본인확인을 거친 데다 암호화폐로 다른 코인을 사는 방식이라 정부 지침에도 어긋나지 않는다”고 말했다.

당국과 은행들의 오락가락 행보에 거래소까지 편법 회원 모집 등에 혈안이 되면서 시장과 투자자만 고스란히 피해를 보고 있다. 이달 초 2,700만원도 넘었던 비트코인은 최근 1,300만원대까지 급락한 상태다. 대형 거래소 신규가입이 막힌 뒤 규모가 작은 거래소에서 가상화폐를 투자해오고 있는 간호사 이은미(30)씨는 “분명 이달 초엔 실명제가 시행되면 신규회원 가입이 가능해진다고 정부가 말했는데 은행들은 반대로 신규가입이 어렵다고 하니 혼란스럽다”고 말했다. 성태윤 연세대 교수는 “금융당국이 규제를 강화하더라도 재산권은 침해하지 않겠다는 원칙을 명확히 해야 한다”며 “지금처럼 은행이 신규거래 자체를 꺼릴 정도의 규제는 바람직하지 않다”고 밝혔다. 강아름 기자 saram@hankookilbo.com 허경주 기자 fairyhkj@hankookilbo.com 김동욱 기자 kdw1280@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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