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 참 각박하다. 팔걸이인지 칸막이인지 알 수 없는 철재 구조물로 인해 두 동강, 세 동강 난 벤치를 보며 드는 생각이다. 서울 도심에선 아픈 다리 잠시 쉬어가는 데에도 조건이 따라붙는다. ‘눕지 말고 앉아서 쉴 것’
그나마 도심을 벗어나면 벤치 인심에도 훈기가 돈다. 드물긴 해도 작은 벤치 하나가 지역 소통의 매개가 되고 마음의 여유와 온기를 주고받는 공간으로 거듭난다. 야박하기도 하고 훈훈하기도 한 세상 벤치 인심에 대한 이야기다.
#야박한 벤치 인심
“좁아서 불편하고 여럿이 모여 앉을 수도 없고… 이런 걸 왜 만들었는지 이해가 안 된다.” 16일 오후 서울 중구 한국은행 본점 앞 쉼터에서 만난 직장인 최모(38)씨가 벤치 중간의 팔걸이를 가리키며 말했다. 쉼터를 둘러보니 벤치에 설치된 철재 팔걸이는 총 20여개, 자체 너비가 10~30㎝ 정도로 넓고 간격도 촘촘한 까닭에 정작 사람이 앉을 공간은 비좁았다. 개중엔 앉을 수 있는 공간의 폭이 40~50㎝에 불과하거나 그마저 화단의 수풀이 덮고 있는 경우도 있었다. 제법 널찍한 코너 부분은 팔걸이 여러 개를 잇따라 설치해 일부러 공간을 없앤 듯한 느낌마저 들었다.
걸음을 옮겨 순화동 순화문화공원으로 향했다. 노숙인 한 명이 앉아 햇볕을 받고 있는 긴 목재 벤치 위에 30여개의 반원형 팔걸이가 줄지어 박혀 있다. 공원 내 또 다른 벤치들 역시 팔걸이나 돌출된 턱에 의해 2등분 또는 3등분되어 있었다.
이쯤 되니 벤치 팔걸이의 진짜 용도가 궁금했다. 쉼터와 공원 관리를 맡고 있는 관할 구청에 확인해 본 결과 팔걸이의 정체는 누워 자는 행위를 막기 위한 ‘노숙 방지 장치’였다. 중구청 관계자는 “공원 벤치에서 술판을 벌이거나 잠을 자는 노숙인들 때문에 주민들의 민원이 빗발치고 치안 문제도 발생하기 때문에 부득이하게 팔걸이를 설치할 수밖에 없다”며 “다만, 팔걸이가 잘못 설치돼 불편을 초래하는 경우는 곧바로 시정 조치할 것”이라고 밝혔다.
직장인ㆍ관광객 찾는 공원 벤치
노숙 방지 턱 때문에 시민 불편
시 “신설 벤치에 팔걸이 적용 안 해”
예산 탓 기존 벤치 교체 어려워
노숙 방지용 팔걸이는 10여 년 전 노숙인들이 많이 모이는 서울역과 영등포역 주변을 중심으로 설치돼 왔다. 그러나 근본 대책 없이 드러눕지 못하게 하는 것만으론 노숙인 문제 해결에 도움이 안 된다는 지적이 끊이지 않았다. 오히려 그로 인한 시민의 불편과 함께 평등권 및 인권 침해 가능성이 제기되면서 이 같은 ‘노숙인 추방’ 장치가 더 이상 환영을 받지 못하는 추세다. 서울시 도시공간개선단 관계자는 “2010년 이후 팔걸이가 있는 벤치는 우수공공디자인 인증 대상에서 제외하고 있다”며 “각 자치구에 이러한 개념을 설명하고 인증 제품 사용을 권장하고 있으나 기존에 설치된 벤치의 경우 구청의 인력이나 예산 문제로 인해 회수 또는 교체하는 경우가 드문 것으로 안다”고 말했다.
#훈훈한 벤치 인심
지난해 11월 서울 강북구 우이신설경전철 솔샘역 2번 출구 앞 담벼락에 A4 용지 크기의 손 글씨 호소문이 붙었다. “이곳에 벤취(벤치) 2개만 만들어 주시면 좋겠습니다. 다리가 아파서 쉬어 가게요”라는 내용이었다. 주민들에 따르면 삼각산119안전센터에서 시작해 이곳 솔샘역을 지나 삼양동자치회관까지 이어지는 200m 구간 길은 경사가 매우 심해 노인들이 중간에 쉬어갈 수 있는 공간이 꼭 필요했다.
절실한 호소에 대한 응답은 2달여 만인 12월 29일 그 자리에 벤치 2개가 들어서는 것으로 이루어졌다. 벤치를 설치한 강북구청 관계자는 “11월 23일 호소문 내용을 접한 후 우이신설경전철 측과 벤치 설치 문제를 조율했으나 진행이 지지부진했던 게 사실”이라며 “늦게나마 설치한 벤치가 주민들의 휴식에 도움이 됐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주민들, 특히 노인들은 새로 생긴 벤치가 반갑고 누군가 쓴 호소문이 고맙다. 주민 박승진(87)씨는 17일 벤치를 바라보며 “이쪽 길은 경사가 가팔라 올라오기 힘든데 의자가 생겨서 참 잘됐다. 날이 따뜻해지면 몸 불편한 사람들이 요긴하게 쓸 수 있을 것 같다”고 말했다.
“다리 아파서…” 익명 호소문
구청 움직여 벤치 새로 설치
온정 나누는 훈훈한 벤치 인심
누군가 붙인 자작시 한 편이 평범했던 벤치 풍경을 따뜻한 시화 작품으로 바꿔 놓기도 한다. 지난해 7월 경기 고양시의 한 공원길. 새로 설치된 벤치 등받이에 한 주민이 ‘강선 공원 길 의자’라는 시를 써 붙였다. 누가 쓴 시인지 알 순 없지만 “쉬어 가세요 앉아 보세요”라는 운율에 끌려 멈춰선 주민들이 고개를 끄덕이며 시를 읽었다. 인근의 또 다른 공원엔 한 고등학교 봉사동아리 회원들이 재능기부 차원으로 그린 그림이 벤치마다 자리 잡고 있다. 익살스러운 고양이 캐릭터부터 풍경화까지 다양하게 꾸며진 벤치 하나하나가 작품이다. 그 앞을 지나치는 것만으로도 주민들은 마음의 휴식을 얻고 있다.
박서강기자 pindropper@hankookilbo.com
김주영기자 will@hankookilbo.com
박미소 인턴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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