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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 가슴으로 쓴 편지] “비정규직 꼬리표 없는 세상이 되게 노력할게”

입력
2017.12.29 04:40
1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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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공항 비정규직으로 시설유지관리 업무를 하는 유창목씨. 불합리한 간접고용에 대한 오랜 문제제기 끝에 결국 내년 정규직으로 전환된다. 유창목씨 제공
인천공항 비정규직으로 시설유지관리 업무를 하는 유창목씨. 불합리한 간접고용에 대한 오랜 문제제기 끝에 결국 내년 정규직으로 전환된다. 유창목씨 제공

사랑하는 두 딸, 아인이 다인이에게

너희가 열 달만에 아빠 엄마에게 찾아왔을 때를 생각하면 말로 표현할 수 없을 정도로 기뻤다. 세상의 모든 것을 다 가진 느낌이었단다. 세상 모든 부모님들이 그렇단다. 하지만 한 편으로는 부모로서 너희를 책임질 수 있을지 평생의 걱정이 시작되기도 했단다.

아빠는 인천공항에서 토목시설 유지관리 일을 8년째 하고 있다. 2001년 개항부터 지금까지, 지금부터 인천공항이 존속할 때까지 반드시 필요한 일이란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아빠와 동료들은 지난 17년 동안 근로계약서를 1년 마다 다시 쓰고, 3년 뒤 용역업체가 변경될 때 혹시나 고용승계가 안되면 어떡하나 두려움을 떨칠 수가 없었지. 소위 간접고용 비정규직인 아빠가 과연 너희들에게 안정적인 생활을 보장해줄 수 있을지 늘 걱정할 수밖에 없었단다.

아빠와 동료들은 고용불안, 저임금, 용역업체 중간착취로 힘들어했어. 부당한 일들이 많아서 노동조합을 만들고 업체, 공사를 상대로 목소리를 냈어. 처음에는 노조 만들면 그나마 갖고 있던 일자리마저 잃어 너희를 위험에 빠뜨릴 까봐 주저하기도 했었단다. 하지만 노동자는 그대로인데, 용역업체만 바꿔가며 불안과 차별을 강요하는 간접고용 비정규직을 너희들에게까지 물려줘서는 안 된다는 마음이 커지고 용기로 냈다. 그런 동료들이 모이기 시작했고, 하나하나 바로잡아가기 시작했단다.

하지만 세상의 벽은 높고도 강하더구나. 권력을 독점한 부패 정치세력들, 병석에 누워서도 수백 조원 배당을 챙겨가는 재벌들, 분단과 분열을 조장하는 보수언론들은 계속 비정규직으로 살아가라는 강요를 멈출 줄 몰랐다. 노동개악을 통해 정규직 노동자들에게도 ‘과보호’라며 권리를 포기하라고 겁박했지. 더욱 불평등하고, 불안정한 세상에서 우리 딸들을 키울 수밖에 없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끝 모를 어둠 속에서 지쳐가고 있을 때 거짓말처럼 마법같은 일이 생겼단다. 불통 대통령의 국정농단이 세상에 알려지고 촛불을 든 평범한 사람들이 ‘탄핵’이라는 위대한 변화를 이끌어냈거든. 나중에 너희들 교과서에 나올 역사적 사건이란다. 촛불로 탄생한 새로운 대통령은 취임 직후인 5월 12일 인천공항을 깜짝 방문해 비정규직 제로 시대를 선언하고 1만 명 비정규직을 정규직으로 전환하겠다고 약속했다. 10년 동안 아빠와 동료들이 어렵게 싸워왔던 노력이 결실을 이루는 순간이었어. 그 땐 너희를 세상에서 처음 만났을 때만큼이나 행복했었다.

인천공항 비정규직 유창목씨(오른쪽)이 작업을 앞두고 동료들에게 안전수칙을 설명하고 있다. 유창목씨 제공
인천공항 비정규직 유창목씨(오른쪽)이 작업을 앞두고 동료들에게 안전수칙을 설명하고 있다. 유창목씨 제공

비정상의 정상화 과정은 쉽지 않았지. 17년의 간접고용 장벽이 높다는 걸 11월 23일 정규직 전환 공청회를 보며 확인했단다. 너희 할머니 나이 정도의 환경미화원이 눈물을 흘리며 정규직 직원들에게 도와달라고 하자 “무임승차다~ 시험보고 들어와라”하며 야유와 고성으로 적대감을 표현하는 모습에 절망감마저 들었단다. 정규직, 비정규직이 고용의 형태가 아니라 신분이 되고, 비정규직이 무능과 혐오의 대상이 돼버린 현실이 안타까울 따름이었다.

하지만 결국 12월 26일 인천공항공사 노사가 정규직 전환에 합의하고 이제는 고용불안 없는 직장, 일한 가치를 인정받는 직장을 만들 수 있게 되었다. 차별 없이 연대하는 세상을 향해 민주노총은 한 걸음씩 나아가고 있단다.

우리 딸들도 언젠가는 성인이 되고 직장생활을 하게 되겠지. 인천공항에서 시작된 ‘정규직ㆍ비정규직 꼬리표 없는 평등한 세상’이 전국으로 퍼져나갈 수 있도록 아빠가 노력할게. 그 길에 상처도 받을 수 있고, 조금 위험할 수도 있지만 우리 딸들이 살아갈 다음 세대를 위해 누군가는 해야 할 일을 마다하지 않을 거란다. 우리 딸들은 따뜻하고 평등한 세상에서 살길 바란다. 앞으로도 더욱 밝고 씩씩하게 자라다오. 사랑한다.

인천공항 토목시설유지관리업체 비정규직 노동자 유창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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