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정위 “박근혜 정권 때 불법로비 확인”
“이미 끝난 사건에 적용” 소급 논란
공정거래위원회가 2015년 삼성물산과 제일모직 합병 과정에서 내린 ‘순환출자 해소 관련주식 매각 가이드라인’을 2년 만에 바꿔 이를 소급 적용하기로 했다. 당시 공정위 가이드라인에 따라 삼성물산 주식 500만주를 매각한 삼성SDI는 추가로 400만주를 더 팔아야 하는 상황에 처했다. 정권이 교체된 뒤 정부 결정이 뒤집혀 소급 적용되는 것에 대한 찬반 논란이 일고 있다.
김상조 공정위원장은 21일 “2015년 12월 발표한 ‘합병 관련 신규출자 금지 제도 가이드라인’을 바꾸기로 했다”며 “(새 가이드라인은) 삼성물산과 제일모직 합병에도 적용된다”고 밝혔다.
공정위는 2015년 삼성물산과 제일모직 합병 당시 신규 순환출자 문제를 해소하기 위한 방편으로 “삼성SDI가 보유하고 있는 삼성물산 주식 500만주를 팔아야 한다”고 결론 냈고, 삼성은 이를 받아들여 주식을 매각한 뒤 합병을 마무리 지었다. 끝난 일로 여겨졌던 이 문제는 최순실 국정농단 사건에서 삼성이 처분 주식을 줄이기 위해 당시 박근혜 대통령에게 로비를 한 사실이 드러나며 다시 불거졌다. 서울중앙지법은 지난 8월 이재용 삼성 부회장에 대한 뇌물공여 사건 선고에서 공정위 유권해석에서 삼성의 청탁이 성공한 것으로 볼 수 있다고 판단했다.
공정위는 종전 가이드라인이 불법 로비에 의한 것임이 확인된 만큼 뒤늦게라도 규정을 바로잡아 잘못된 조치를 수정해야 한다는 입장이다. 이에 공정위는 합병 과정에서 삼성SDI가 갖게 된 삼성물산 주식 전체(900만주)를 모두 팔아야 한다는 새로운 가이드라인을 내 놨다.
문제는 이번 조치가 “소급입법으로 재산권을 박탈할 수 없다”는 헌법 제13조 등에 저촉될 수 있다는 데에 있다. 형식상 삼성은 공정위 가이드라인을 이행해 합병 절차를 끝냈는데, 공정위는 새 가이드라인을 소급 적용하겠다고 나선 것이기 때문이다.
결국 이번 공정위 조치를 ‘정당한 소급’으로 볼 수 있을 지가 논란의 핵심이 될 것으로 보인다. 시시비비는 법원에서 판가름 날 전망이다. 법원은 일반법은 물론이고 행정법규라 해도 매우 예외적으로만 소급 적용을 허용하고 있다. 대법원은 2005년 근로복지공단 소급적용 사건에서 “행정법규 소급적용은 일반적으로는 법치주의 원리에 반하고, 개인의 권리ㆍ자유에 부당한 침해를 가하며, 법률의 안정을 위협하는 것”이라고 판시했다. 당시 대법원은 ▦일반국민의 이해에 직접 관계가 없는 경우 ▦오히려 이익을 늘리는 경우 ▦불이익이나 고통을 제거하는 경우 등에만 예외적으로 소급적용이 허용된다고 밝힌 바 있다.
다만 공정위 조치가 ‘법령’을 바꾸는 게 아니라 ‘판단’을 바꾸는 것인 만큼 소급적용에 해당하지 않는다는 반론도 없잖다. 행정기관의 판단은 불법 요소가 사후 발견되는 등 사정이 달라지면 바뀔 수 있다는 주장이다. 익명을 요구한 한 법학교수는 “법은 그대로 있고 공정위가 유권해석만 바꾸는 것이어서 큰 문제는 없어 보인다”고 말했다.
삼성이 ‘신뢰보호의 원칙’을 내세워 공정위를 상대로 소송을 낼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국민이 행정기관의 행위나 발언을 믿고 후속조치를 했다면 그 신뢰를 보호해야 한다는 논리다. 전임 지방자치단체장의 인허가를 후임 단체장이 번복할 수 없는 게 이에 해당한다. 김 위원장은 “삼성 입장에서는 신뢰 침해를 이유로 소송을 제기할 수 있다”며 “그러나 공정위 입장에서는 과거 잘못을 바로잡아 국민 신뢰를 회복하고 공정한 질서를 확립하기 위한 노력을 계속할 수 밖에 없다”고 강조했다. 세종=이영창 기자 anti092@hankookilbo.com 세종=박준석 기자 memory@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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