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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읽는 중동] 밸푸어의 67단어 편지, 팔레스타인 재앙의 씨앗 되다

입력
2017.11.17 18:00
20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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팔레스타인 시위대가 밸푸어 선언 100일을 맞아 2일 가자지구에서 영국에 항의와 사과를 요구하는 시위를 벌이고 있다. AP 연합뉴스
팔레스타인 시위대가 밸푸어 선언 100일을 맞아 2일 가자지구에서 영국에 항의와 사과를 요구하는 시위를 벌이고 있다. AP 연합뉴스

올해는 마르틴 루터 종교개혁 500주년, 러시아 혁명 100주년이 되는 해이면서도 밸푸어 선언 100주년이기도 하다. 1917년 11월 2일, 당시 영국의 외무장관 아서 밸푸어는 유대인 부호 로스차일드에게 보낸 서한에서 “영국 정부는 팔레스타인 땅에 유대인을 위한 민족의 집을 세울 것을 지지하며, 이 목표의 달성을 위해 최선의 노력을 다할 것”이라고 약속했다. 불과 67개의 단어로 구성된 이 편지 한 장은 이후 중동사를 통째로 바꿔 버렸다.

제1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자 영국은 오스만제국의 영토 내에서 패권을 장악하기 위해 지그재그식 전략 외교전을 펼친다. 1915년에는 “팔레스타인의 독립을 보장해 주겠다”는 맥마흔 선언을, 1916년에는 중동지역의 세력권 분할을 놓고 프랑스와 비밀 합의인 사이크스ㆍ피코 협정을, 그리고 1917년에는 “유대인을 위한 민족의 집(유대 국가가 아님) 건설을 지지한다”는 밸푸어 선언을 하기에 이른다. 제국의 이해관계에 따라 갈팡질팡 거리는 상호 모순적 외교로 한쪽이 환호하는 동안 다른 쪽은 분통을 터트렸다.

같은 땅을 놓고 이중 계약서를 쓴 영국의 조치는 두고두고 재앙의 불씨가 됐다. 밸푸어 선언은 유대 시온주의자들을 고무시켜 30년 후 이스라엘 국가 건설의 초석이 됐다. 하지만 아랍인에게는 용납할 수 없는 영국의 배신이었다. 영국은 밸푸어 선언에서 “팔레스타인에 거주하는 비유대인 공동체의 시민권과 종교의 권리를 침해하지 않는다”는 조건을 달고 있기는 하지만, 애당초 팔레스타인의 독립에는 관심조차 없었다. 이 시기를 무대로 삼고 있는 영화 ‘아라비아의 로렌스’가 잘 보여 주듯, 강대국의 장난으로 인해 중동은 ‘피투성이의 역사’를 갖게 됐다.

밸푸어 선언으로 시온주의 운동에 불이 붙으면서 반유대주의로 배척받던 유럽의 유대인들이 팔레스타인으로 대거 몰려 들어왔다. 이들은 30년간에 걸쳐 팔레스타인인들과 갈등, 충돌, 암살, 살상으로 얼룩진 세월을 보냈다. 약 70만 명의 팔레스타인인들은 이 과정에서 자신들의 땅에서 쫓겨났다. 더 이상 갈등 조정능력을 상실한 영국 정부는 이 문제를 국제 사회에 떠넘기고, 급기야 유엔은 1947년 11월 유엔총회결의안 제181호를 통해 시온주의자들에게 팔레스타인 땅 절반을 분할해 줘야 한다는 일명 ‘팔레스타인 분할 결의’를 채택했다. 유대인은 즉각 환호하고 이듬해 독립국가를 선포했고, 아랍ㆍ팔레스타인은 이에 반대해 전쟁을 일으킨다.

이스라엘의 아모스 오즈는 자전적 소설 ‘사랑과 어둠의 이야기’(2002)에서 이날의 감격을 상세하게 묘사한다. “아버지는 1947년 11월 29일 밤, 거기서 나를 어깨에 태우고 우리가 춤추는 이들과 흥청거리는 이들 사이를 돌아다닐 때 ‘아가, 꼭 잘 보렴, 아들아, 그것 모두를 잘 살피렴, 죽는 날까지 이날 밤을 잊지 못하게 될 거니까, 우리가 떠나 없어지고 나면, 네 아이들, 네 손자들, 네 증손주들에게 오늘 밤에 대해서, 말하게 될 거야’라고 말했다.”

하지만 훗날 팔레스타인 교과서는 이렇게 쓰고 있다. “이 선언은 전 세계에서 가장 기이한 국제 문서 중 하나일 것이다. 이 선언의 저자는 원주인이자 땅을 소유할 자격이 있는 팔레스타인의 아랍 민족을 희생시켜가며 자기가 소유한 것도 아닌 땅을 소유할 자격이 없는 단체에 넘겼다. 이 때문에 한 나라가 무력에 의해 몰수당하고, 전 민족이 쫓겨나기에 이르렀다. 이는 역사상 전례가 없는 일이다.”

최근 밸푸어 선언 100주년(11월 2일)을 맞은 팔레스타인인들은 이ㆍ팔 분쟁의 근본 원인으로 이 선언을 꼽고, 당사국 영국에 책임을 물으며 공식 사과를 받기 위해 의회 청원 운동을 개시했다. 아울러 팔레스타인 정부는 전쟁 범죄에 책임을 물어 영국을 상대로 국제형사재판소(ICC)에 제소했다. 2002년 당시 잭 스트로 영국 외무장관은 밸푸어 선언을 ‘명예롭지 못한 결정’이라 했고, 2013년 노동당 제러미 코빈 하원의원은 ‘영국의 역사적 과오’라며 사과했지만, 아직까지 정부 차원의 사과는 없었다.

오늘날까지 이ㆍ팔 분쟁 해결의 묘수는 없다. 지난달 영국 정부는 밸푸어 선언 100주년 기념 심포지엄 ‘중동에서의 영국의 역사적 책임’에서 “모두의 동등한 권리에 기반을 둔 팔레스타인과 이스라엘의 평화적 미래 건설을 지지한다”고 선언하며 ‘두 국가 해법’을 재확인하고 나섰다. 하지만 심포지엄에 불참한 갈등 당사자 이스라엘의 베냐민 네타냐후 총리는 그것은 ‘마지막 몸부림’이라며 폄하했다.

밸푸어 선언 100년, 이 선언이 역사적 의미를 가지려면 적어도 “비유대인 공동체의 시민권과 종교적 권리를 보장한다”는 명시적인 약속이 지켜져야 할 것이다. 지난 100년 동안 팔레스타인의 권리가 심각한 침해를 받아왔기 때문이다. 또 이 선언의 역사적 평가는 두 민족 간에 평화로운 공존의 길을 찾고, 이 지역에서 비극적인 유혈 폭력 사태가 멈추는 날 비로소 내려질 것이다. 오늘날 강대국들이 먼 훗날 역사적 책임과 평가를 두려워하는 마음으로, 갈등이 남아 있는 지구 곳곳에 대한 외교적ㆍ군사적 판단과 결정에 대해 심사숙고해야 할 때다.

최창모(건국대 융합인재학부 교수, 중동연구소 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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