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가 낯설어졌다. 인자한 미소와 넉넉한 품으로 자식을 보듬어주던 엄마는 이제 없다. 온기를 빼앗겨 창백한 얼굴엔 살기만이 번뜩인다. 그 엄마가 배우 김해숙(62)이라서 그 낯섦은 커다란 두려움으로 다가온다.
12일 개봉하는 영화 ‘희생부활자’에서 김해숙은 엄마의 이름으로 상상도 못할 파격 연기를 보여준다. 7년 전 강도사건으로 살해 당했지만 자신을 죽인 자에게 복수하기 위해 되돌아온 희생부활자(RV). 영혼도, 좀비도, 환시도 아닌, 미스터리한 존재다. 그렇게 다시 돌아온 엄마가 자신의 아들(김래원)을 공격하면서 벌어지는 충격적인 이야기가 영화에 담겼다.
최근 서울 삼청동의 한 카페에서 마주한 김해숙은 “평소 스릴러 영화를 무척 좋아한다”면서 “어디 내놓아도 자랑스러운, 대단한 작품이 탄생했다”고 자신감을 내비쳤다. 마치 자식 자랑을 늘어놓는 엄마처럼 눈빛과 표정에 애정이 뚝뚝 묻어났다.
1974년 MBC 7기 공채 탤런트로 데뷔해 연기 인생 43년. ‘아버지가 이상해’(2017) ‘그래 그런 거야’(2016) ‘왕가네 식구들’(2014) ‘무자식 상팔자(2013) ‘인생은 아름다워’(2010) 등 숱한 드라마와 ‘마마’(2011) ‘해바라기’(2006) ‘우리 형’(2004) 같은 영화에서 따뜻한 엄마이자 헌신적인 아내 역을 도맡았다. 그러면서도 독립군을 돕는 카페 마담(‘암살’ㆍ2015)과 ‘씹던 껌’이라 불리는 사기꾼(‘도둑들’ㆍ2012), 전신마비된 채 부릅뜬 눈으로 주인공을 파멸에 몰아넣던 시어머니(‘박쥐’ㆍ2009) 같은 도전적인 역할도 놓지 않았다.
작품 안에서 산전수전 다 겪은 베테랑 김해숙에게도 ‘희생부활자’는 쉽지 않은 도전이었다. 하지만 “늘 새로운 캐릭터를 갈구하면서도 정작 낯선 이야기를 선택하기 주저해 왔다는 사실”을 깨닫고는 용기를 냈다. 김해숙은 “여자배우가 출연할 만한 작품이 별로 없는데 이 나이에 이런 기회를 가졌다는 게 큰 상을 받은 것처럼 영광스럽다”며 다시 한번 얼굴 가득 뿌듯한 미소를 머금었다.
-희생부활자라는 설정이 독특하다.
“죽은 엄마가 다시 돌아와 아들을 공격한다니. 시나리오를 읽다가 충격을 받았다. 책장을 덮고 커피를 한 잔 마시며 정신을 가다듬어야 했다. 그런데 다시 읽기 시작한 뒤로는 한번에 독파했다. 나중엔 빨리 촬영장에 나가고 싶어서 몸살이 날 것 같았다.”
-어떤 매력 때문이었나.
“세상에는 이해할 수 없는 초자연적인 현상들이 종종 일어난다. 억울하게 죽은 사람이 자신을 죽인 자를 응징하러 돌아온다는 설정이 흥미로웠다. 왜 엄마가 아들을 죽이려는 지도 드러난다. 상상하기 어려운, 반전에 반전이 거듭된다.”
-영화를 촬영하며 힘들었던 점은.
“아들을 죽이러 온 엄마이니까. 정신적으로 힘들었다. 액션신도 많았다. 위험한 장면 촬영을 앞두고는 밤에 잠이 안 오더라. 나이가 좀 있으니 무섭긴 하다. 비 오는 날 나타나기 때문에 늘 비를 맞아야 했다. 나중엔 비 맞는 게 습관처럼 느껴질 정도였다(웃음).”
-김래원과는 영화 ‘해바라기’와 드라마 ‘천일의 약속’(2011)에 이어서 세 번째 모자 호흡이다.
“‘해바라기’를 촬영할 때 (김)래원이가 20대였는데 나이에 비해 의젓하고 말수가 적었다. 오죽하면 내가 ‘영감’이라고 불렀겠나(웃음). 처음엔 후배여도 대하기 어려웠는데 어느 날 촬영장에 빙수를 만들어 가져와 깜짝 놀랐다. 컴퓨터 바탕화면에 내 사진을 깔아놓고는 작품에 몰입하는 모습도 봤다. 지금도 그런 마음씀씀이와 열정은 변함이 없다. 무뚝뚝하지만 늘 한결같다. 몇 년간 서로 연락을 안 해도 다시 만나면 어제 만난 듯이 편하고 반갑다. 10년 뒤에는 또 어떤 모습일지 기대된다.”
-곽경택 감독과는 첫 작업이다.
“평소에 흠모하던 감독이다. 사람 사는 모습을 진솔하게 담아내는 그의 영화들을 좋아했다. 그런데 ‘희생부활자’는 내 예상을 벗어나는 이야기였다. 곽 감독에게 의지하면서 함께 도전할 수 있어 좋았다. 감정 연기에도 큰 도움을 받았다. 곽 감독은 굉장히 섬세한 연출자다. 그의 영화가 왜 인간적인지 알게 됐다.”
-‘암살’ ‘도둑들’ ‘박쥐’ 등 영화에서는 색다른 캐릭터를 많이 연기했다.
“배우는 똑같은 역할도 다르게 표현해야 한다. 기회가 왔을 때 변신을 못하면 안 된다. 운도 따랐다.”
-필모그래피에 전환점은 언제였나.
“‘해바라기’와 ‘무방비도시’(2008)가 아닐까 싶다. ‘해바라기’에선 아들을 죽인 살인범을 아들로 품는 엄마였고, ‘무방비도시’에서는 소매치기 엄마였다. 똑같이 엄마라는 인물이어도 영화에선 다르게 표현될 수 있다는 걸 느꼈다. 도전심을 자극하는 역할이었고, 배우로서 존재감을 보여줄 수 있는 기회였다. ‘박쥐’에서는 전신마비 된 인물을 연기했다. 피할 수도 있는 역할이지만 나에게는 연기 인생에 한 획을 그은 작품이었다. ‘도둑들’도 마찬가지다. 언제 또 그런 역할을 해보겠나. 너무나 행복하다.”
-‘국민 엄마’라 불릴 만큼 수많은 엄마 캐릭터를 연기해 왔다.
“어느 순간 엄마도 ‘장르’라는 생각이 들었다. 각자 생김새와 이름이 다르듯 수많은 모정이 있을 거다. ‘희생부활자’에서도 엄마 역이다. 그런데 아들을 죽이러 오는 엄마다. 엄마라는 캐릭터에도 수많은 모습이 존재할 수 있다. 쉬워 보이지만 정말 어려운 연기다. 매번 엄마 역할을 맡더라도 차별점을 찾아내려고 정말 피나는 노력을 쏟고 있다.”
-아들 딸로 만난 배우가 정말 많겠다.
“기억이 안 날 정도다. 그들이 한자리에 모이려면 큰 체육관을 빌려야 할 거다(웃음).”
-실제로는 어떤 엄마인가.
“아무래도 일을 다하다 보니 자식에게 모든 걸 쏟지 못했다. 그런데도 잘 자라줘서 고맙다. 아이들이 엄마 일에 큰 관심을 안 가져준 것도 고맙다. 아이들이 누구의 딸이라는 사실이 알려지는 걸 원치 않아서, 나도 철저하게 아이들의 사생활을 지켜줬다. 그게 예의이자 도리다. 한번은 딸 아이가 대학 4학년일 때 취업이 걱정돼 ‘배우가 되고 싶지 않냐’고 물어본 적이 있다. 단호하게 ‘싫다’고 하더라. 다행이다 싶었다(웃음). 지금은 자기 일 잘하고 있다.”
-후배들에겐 롤모델로 꼽히고 있다.
“배우의 꿈을 이루기 위해 열심히 연기하는 후배들을 엄마 같은 마음으로 보듬어주고 싶다. 내 작품에 나오는 아들 딸을 사랑하려고 한다. 그들에게 따뜻한 선배, 인간적인 선배이고 싶다.”
-캐릭터에 몰입하기 위해 어떤 준비를 하나.
“복잡하게 생각하지 않는다. 감정이 가장 중요하다. 그 인물이 돼 연기한다. 감정에 몰입해 있을 때는 주변 사람이 옆에 다가오지도 못할 만큼 예민해진다.”
-가장 행복한 순간은 언제인가.
“연기를 하고 있는 매 순간 행복하다. 인생 살면서 한 가지 일만 꾸준하게 좋아하기도 힘든데, 그 일을 하면서 사랑까지 받고 있으니 얼마나 행복한가.”
김표향 기자 suzak@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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