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항서 창원시 축구팀 감독이 베트남 국가대표팀의 지휘봉을 잡았다는 소식에 베트남 언론들은 주요 뉴스로 다루며 높은 관심을 보였다. 새 감독을 환영한다는 반응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대체적으로 큰 기대는 걸지 않고 있다는 분위기다.
베트남 유력 일간지 중 하나인 탄닌은 2일 “박항서 감독이 한국 내에서도 평판이 좋다”면서 “특히 한국을 아시아 최초의 월드컵 4강팀으로 만들어준 거스 히딩크 감독과 호흡을 맞췄다”는 점을 강조했다. 베트남이 선수들을 유럽 훈련법으로 육성하고 있는 만큼 히딩크 감독의 축구 철학을 공유하고 있는 박 감독에게 높은 점수를 준 것이다. 특히 신문은 히딩크 감독이 그의 도움으로 한국을 아시아에서는 처음으로 월드컵 4강 대열에 올린 점을 거론하며 박 감독에게 기대감을 간접적으로 내비치기도 했다.
냉랭한 분위기
하지만 관련 기사에 달린 인터넷 댓글에서는 ‘실망스럽다’는 베트남 축구 팬들의 반응이 주를 이룬다. 하 루씨는 “그의 능력에 대해 잘 모르지만, 한국인 감독 선임은 축구보다는 베트남의 관광이나 경제에 더 큰 이익이 될 것 같다”며 베트남 축구협회(VFF)의 결정에 불만을 표시했다. 쩡 응우옌씨는 “베트남 축구협회의 결정을 이해할 수 없다”며 “후 탕 감독을 다시 데리고 오라”고 공개적으로 요구했다. 탕 감독은 8월 말 막을 내린 동남아시안(SEA) 게임에서 선수들이 기대치 이하의 경기력으로 4강 진출에 실패하자 경질된 베트남인 감독이다.
일간 뚜이쩨도 지난달 30일자 신문에서 처음으로 박항서 감독 선임 소식을 사실 중심으로 비교적 ‘건조하게’ 전한 뒤 2일자 신문에서는 창원시청이 대전코레일과 주말에 가진 경기에서 2대 1로 패한 사실을 전했다. 박 감독에 쏠린 베트남의 관심이 만만치 않음을 내비친 대목이다. 일부 네티즌들은 “9,500만 코치의 나라에 오신 걸 환영한다”며 비꼬았고, 또 다른 네티즌들은 “그에 대해 아는 게 없는 만큼 좀 지켜볼 필요가 있다”는 신중론을 펼치기도 했다. 베트남 인구는 9,500만명으로, 이들 사이에서 가장 인기 있는 스포츠는 축구다.
외국인 감독 무덤 베트남
자신을 베트남 축구광이라고 밝힌 호찌민시의 한 30대 시민은 “외국인 감독 중 그 누구도 베트남에서 성공한 예가 없다. 박 감독의 앞날도 순탄하지는 않을 것”이라며 “하지만 그가 15년 전 한국에서 쓴 신화를 베트남에서도 쓸 수 있기를 바란다”고 말했다. 박 감독도 국내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쉽지 않겠지만 도전하고 싶었다”며 베트남행 결정 배경을 밝힌 상태다.
실제 베트남 축구 국가대표팀은 감독이 자주 바뀌기로 악명 높다. 국가대표팀이 꾸려진 뒤 처음으로 A매치(국가대표팀 간 경기)를 치른 1991년 이후 지금까지 26명(재선임 포함)의 감독이 스쳐 갔다. 평균 1년엔 한번씩 감독이 교체된 셈이다. 박항서 감독은 27번째 베트남 국가대표팀 감독이다.
박 감독 이전까지 외국인 감독 선임은 13차례 있었다. 2008년 4월부터 2011년 3월 말까지 거의 3년간 대표팀을 이끈 포르투갈 출신의 엔리끄 칼리스또 감독이 최장 재임 기록을 보유하고 있다. 칼리스또 감독은 앞서 2002년에도 베트남 대표팀 지휘봉을 잡은 적이 있지만 당시에는 4개월을 채 넘기지 못했다. 현지 감독 중에서는 직전 감독인 후 탕 전 감독이 1년 5개월로 최장 기록을 갖고 있다. 이 외에도 오스트리아, 일본, 독일, 브라질 등의 감독들이 거쳐갔지만 결과를 내기 전에 물러나야 했다. 이전 26명의 감독 중 계약 기간을 넘긴 경우는 정확하게 50%인 13명이다. 이 기록을 기준으로 할 때 박 감독이 2년으로 알려진 계약 기간을 채울 가능성은 50% 수준이다.
AFF 게임 우승이 최대 성적
베트남 축구협회는 축구팬들의 반발에 후 탕 전 감독을 1년 5개월만에 내쳤지만, 베트남 국가대표팀의 성적은 초라한 수준이다. 국제축구연맹(FIFA) 랭킹 130위에, 월드컵에 나간 적은 한 번도 없다. 후 탕 감독은 브루나이를 포함해 동남아국가연합(ASEANㆍ아세안) 10개국이 참가하는 SEA 게임에서 4강 진출에 실패했다는 이유로 지난 8월에 경질됐다. 지난 2008년 엔리끄 칼리스또 감독 재임 당시 동남아의 월드컵으로 불리는 AFF 게임 우승이 최고 기록이다.
이 때문에 베트남 SEA 게임에 출전한 대표팀이 지난 7월 황선홍 감독이 이끄는 K리그 올스타팀을 1대 0으로 격파하자 베트남에서는 ‘난리’가 났다. 경기가 열렸던 하노이 미딩경기장 주변 일대는 자동차와 오토바이들이 늦게까지 경적을 울리며 자축 파티가 벌어지기도 했다. 한국의 FIFA 랭킹은 51위다.
2년이라는 계약기간 외에 연봉 등 박 감독의 구체적인 계약조건은 확인된 게 없지만, 동남아 감독 중에선 최고 대우로 알려져 있다. 현지 관계자는 “그만큼 박 신임 감독에게 거는 기대가 크다는 뜻”이라며 “한국이 베트남의 경제 발전뿐만 아니라 스포츠의 수준도 한 단계 높여주기를 바란다”고 했다. 현지 언론들은 박 감독의 기본 연봉을 과거 엔리끄 칼리스토 감독이 인센티브를 더해 받은 연봉 26만4,000달러(약 3억300만원) 수준으로 분석했다. 박항서 감독의 베트남 대표팀 축구감독 선임으로 한국은 베트남에서 사격, 펜싱, 양궁, 태권도, 유도, 레슬링 등 총 7개 종목의 국가대표팀을 이끄는 나라가 됐다.
호찌민=정민승 특파원 msj@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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