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인 34%가 현금 없이 외출
걸인ㆍ노점상 수입 갈수록 줄어
‘스마트폰 앱 구걸’까지 생겨나
미국 워싱턴DC의 관광 명소인 조지타운 거리. 지난 20여년 동안 이 거리에서 행인들에게 구걸한 돈으로 생계를 이어온 존 설리번씨는 요즘 갈수록 삶이 고달프다. ‘걸인’이라는 게 원래 힘든 직업이지만, 분홍색 종이 고래 모자 때문에 ‘고래 아저씨’(Whale Man)라는 별명을 얻을 만큼 이 동네 터줏대감으로 지내온 그도 생존의 위협을 느낄 정도로 상황이 좋지 않다.
지나가는 사람들에게 컵을 내밀어 보지만 동전이나 지폐를 내미는 확률이 최근 눈에 띄게 줄었다. 미국인들의 인심이 야박해졌기 때문이 아니다. 신용카드 혹은 스마트폰 때문이다. 예전 같으면 선뜻 1, 2달러를 줬을 법한 선한 얼굴의 행인들이 “죄송해요. 신용카드 말고는 주머니에 잔돈이 없네요”라며 지나치기 일쑤다. “내일은 드릴게요”라고 말하고, 실제로 약속을 지키는 고마운 사람들도 있지만 평균 수입이 5, 6년 전보다 눈에 띄게 줄었다.
가끔 하루 수백달러를 버는 사례가 언론에 오르내리지만, 학술조사에 따르면 미국 걸인의 평균 수입은 하루 50달러 안팎으로 최저임금에도 미치지 못한다. 그런 사람들에게 최근 진행된 전자화폐의 급속한 보급은 심각한 충격으로 다가오고 있는 것이다.
워싱턴포스트 역시 행인들의 잔돈으로 생계를 이어온 미국 거리의 노점상과 걸인들이 갈수록 혹독한 운명에 처할 것으로 전망했다. 이 신문에 따르면 미국인의 34%가 이미 실물화폐를 거의 지니지 않고 외출하고 있다. 또 그나마 지금은 20~30달러가량을 갖고 다니는 38%가량의 시민들도 ‘신용카드와 스마트폰 때문에 곧 잔돈 없이 다니게 될 것’이라고 응답했다. 실제로 워싱턴 시내 거리에서 신문을 팔고 있는 로버트 워런은 “하루 7시간 일해도 30달러(3만5,000원)를 벌기 힘들다”고 말했다. 이는 워싱턴 지역 최저임금(시간당 12.5달러)의 3분의1에 불과한 수준이다.
일부에서는 미국 걸인들도 시대 변화에 맞춰 ‘디지털화’를 해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화폐혁명의 미래를 다룬 ‘현금의 저주’(Curse of Cash)의 저자인 케네스 로고프 하버드대 교수는 스마트폰 앱으로도 적선을 받는 스웨덴 걸인들의 사례를 소개하며 미국에서도 비슷한 변화가 나타날 것으로 예상했다. 미시간 주 디트로이트의 극소수 걸인들도 스마트폰에 신용카드 인식기를 부착해 구걸하는 경우가 있다.
그러나 여전히 대다수 미국 걸인들은 전통방식을 고수하고 있다. 조지타운의 ‘고래아저씨’ 설리번씨는 워싱턴포스트와의 인터뷰에서 “걸인이 스마트폰을 내밀면 누가 돈을 주겠느냐”고 말했다. 그는 또 자선단체와 걸인들을 연결해주는 스마트폰 앱에 대해서도 “구속받지 않고 누군가에게도 빚을 지지 않는 삶을 원한다”고 거부했다.
워싱턴=조철환 특파원 chcho@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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