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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복 72돌, 잊혀져 가는 독립운동] 장병하 지사 “3년 공들인 학생 비밀결사조직 거사일 허무하게 발각돼 분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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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복 72돌, 잊혀져 가는 독립운동] 장병하 지사 “3년 공들인 학생 비밀결사조직 거사일 허무하게 발각돼 분루”

입력
2017.08.13 2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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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 끌려가 총알받이 되느니

‘뜻 깊게 죽자’는 마음으로 합류

악질 일본인ㆍ친일파 처단 목적

안동농림학교 9회생 중심으로

83명 모였지만 일망타진 당해

유공자 인정 받는데도 우여곡절

54년 만에 받은 표창인데 “가장 좋은 곳에 걸어놔야죠”

장병하 지사가 3일 오후 대구 달서구 자택에서 함께 독립운동을 했던 안동농림학교 친구들의 사진을 펼쳐보고 있다. 곽주현 기자
장병하 지사가 3일 오후 대구 달서구 자택에서 함께 독립운동을 했던 안동농림학교 친구들의 사진을 펼쳐보고 있다. 곽주현 기자

“‘우리에게도 나라가 있다. 태극기라는 게 있다’ ‘충칭(重慶)에 있는 임시정부에는 독립운동을 하는 사람들이 많다’ 그런 얘기를 손에 땀을 쥐면서 가만가만 들었습니다.”

태평양전쟁이 한창이던 1942년, 열네 살 소년이던 장병하(89) 지사는 처음으로 ‘독립’이라는 두 글자를 들었다. 경북 안동(당시 읍)에서 유일한 중등학교였던 안동농림학교 동기생 몇 명이 모여 비밀리에 조직한 ‘조선독립회복연구단’에 발을 들인 직후였다. “그대로 있다가는 다 군대 끌려가 총알받이가 될 판이었어요. 이왕 죽을 거면 뜻 깊게 죽자는 마음으로 뛰어들었죠.”

하루하루가 무기력하고 힘든 때였다. 학교에서는 아침마다 일본 왕이 살고 있는 궁성이 있는 동쪽을 향해 절을 하게 한 뒤 ‘천황에 충성한다’는 내용이 담긴 ‘황국신민의 서사’를 외우게 했다. 수업 시간에는 총검술, 도하훈련 등이 진행됐다. 사람이든 물건이든, 쓸만한 것은 어떤 명목을 붙여서라도 징발해갔다.

주변에서는 자꾸 사람들이 사라졌다. “그때는 완전 ‘이한제한(以韓制韓)’이었어요. 일본인들은 뒤에서 점잖게 있고, 못된 짓은 우리나라 사람들이 다 하게 만들고.” 사람들끼리 귓속말을 할 때도 일본어를 사용해야 했다. 그땐 누구도 ‘우리가 일본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을 것’이라 상상하기 어려웠다.

학생 비밀결사 조직이던 조선독립회복연구단의 모태는 학교에서 보낸 근로봉사였다. 장 지사 동기 황병기(1923~1998) 지사가 방문한 곳이, 공교롭게도 임시정부 초대 국무령을 지낸 석주 이상룡(1858~1932) 손자 이병화(1906~1952)의 집이었다. 그에게 영향을 받아 뜻 맞는 친구들이 모인 게 조직의 시작이다. 황 지사와 같이 독서모임을 하던 장 지사는 독립 이야기를 듣고는 “가슴이 뛰었다”고 했다.

하지만 조직 결성 자체가 쉽지 않았다. ‘경찰서와 헌병대를 습격해 무기를 강탈, 악질 일본인과 친일파를 처단하고 안동 주민들 모두와 만세를 부르자’는 목적을 가진 비밀 조직은 무려 3년에 걸친 노력 뒤에야 만들어졌다. “아주 시간을 많이 들여서 어떤 사람인지 떠보고, 확신이 들었을 때만 내 정체를 얘기할 수 있었죠. 아니면 내가 죽으니까요.” 장 지사는 안동농림학교 9회생(26명)을 중심으로 조직에 꼭 필요한 사람들을 골라 모았다. 경찰서 습격을 위해 주먹깨나 쓴다는 사람을, 무장봉기 후 홍보를 위해 라디오 방송 경험자를 끌어들이기도 했다. 참모부, 연락부는 물론 다칠 경우를 대비해 위생부까지. 그렇게 목숨을 건 청춘 83명이 모였다.

첫 거사 날짜가 마침내 정해졌다. 1944년 3월 10일. 착실하게 준비도 됐다. 그런데 뭔가 이상했다. 그날 안동농림학교 학생들은 경찰서 체육관에서 진행되는 시국강연회에 강제로 참석해야 했다. 그리고 장병하 윤동일 손성한, 익숙한 이름이 한 명씩 호명돼 불려 나갔다. 모두 조선독립회복연구단원이었다. “알고 보니 3일 전에 이미 경찰이 다 파악하고 핵심 지도부 애들을 잡아갔다 하더라고요. 점 조직이다 보니 우리도 알 수가 없었던 거죠.” 그렇게 학생 50여명이 한 자리에 제대로 모여보지도 못한 채 허무하게 일망타진됐다.

모진 고문이 시작됐다. “곡괭이 자루로 때리고, 얼굴에 고춧가루 물을 부어요. 기절하면 배를 눌러서 억지로 토하게 만들고. 손톱 밑에 대침을 박아 넣어서 손톱이 다 빠진 애도 있었어요.” 그렇게 끔찍했던 옥살이가 5개월 정도 진행되고, 마침내 광복이 찾아왔다. 단원 모두가 기소유예로 일시에 석방됐다.

어리둥절한 상태에서 거리로 나오니 사람들이 만세를 부르고 있었다. “일제 앞잡이 노릇을 하던 사람들이 가장 목소리가 큽디다.” 친일파는 처벌받지 않았다. 독립지사를 고문하던 경찰은 다시 그대로 경찰이 됐다. 독립운동을 했다고 알아주는 사람도 없었다. 국민들은 좌익과 우익으로 나뉘어 싸우기 시작했다. 황 지사는 당시를 회상하며 “뭐가 맞고 틀린 건지 하나도 모르겠더라”라며 “그러라고 목숨 걸고 버틴 게 아니었는데”라고 말끝을 흐렸다.

독립유공자로 인정받기까지도 우여곡절이 많았다. 독립운동가들 조사 기록이 통째로 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회(반민특위)에 넘어가 있었는데, 1949년 반민특위 습격사건으로 몽땅 불에 타버렸다. 60년대 부산까지 가서 겨우 찾은 ‘사건기록부’는 신청 단계에서 반려됐다. 증빙이 충분히 안 된다는 이유였다. 세월이 흘러 99년, 5ㆍ18민주화운동 관련자들에게 포상을 주는 과정에서 서류가 다시 발견됐다. 소재가 확인된 30여명에게 대통령 표창이 주어졌다. “54년 만에 햇빛을 봤습니다. 우리가 이런 일을 했다는 걸 겨우 인정받은 셈이죠.” 황 지사는 집안 가장 잘 보이는 자리에 표창장을 걸어놨다.

아흔을 목전에 둔 지금, 장 지사는 당시의 참상과 조선독립회복연구단 활동을 기록으로 남겨두는 일에 열심이다. ‘역사를 알아야 다시 나라를 안 빼앗긴다’는 생각에서다. “젊은이들이 역사 공부를 열심히 하면 좋겠어요. 이렇게 잘 살게 된 오늘이, 저절로 온 게 아니라는 걸 알아줬으면 좋겠습니다.”

대구=곽주현 기자 zooh@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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