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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타르시스, 배철현의 비극 읽기] 엉겨 붙어 풀어질 줄 모르는 복수의 피

입력
2017.08.12 04: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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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브르 박물관에 소장된 그리스시대 와인항아리 ‘피쏘스’. 겉면에는 아가멤논 무덤에 있는 오레스테스, 엘렉트라, 헤르메스가 그려져 있다.
루브르 박물관에 소장된 그리스시대 와인항아리 ‘피쏘스’. 겉면에는 아가멤논 무덤에 있는 오레스테스, 엘렉트라, 헤르메스가 그려져 있다.

복수는 흔히 ‘해를 당한 피해자가 자신이 당한 해를 그와 동등하게, 혹은 그 이상으로 가해자에게 가하는 행위’라고 알려져 있다. 복수는 폭력을 동반하고, 그 폭력은 다른 폭력의 유발로 이어진다. 복수는 가해자와 피해자의 구분을 무너뜨리고, 정의와 불의의 경계도 희미하게 만든다.

복수라는 행위를 가만히 응시해보자. 그 복수를 행하는 주체가, 피해를 당한 그 당사자가 아니다. 자신이 불의하게 당한 피해 때문에, 그는 자신도 모르는 강력한 감정의 지배를 받는다. 바로 그를 사로잡은 ‘분노(憤怒)’다. 고대 그리스인들은 이 분노로 가득한 복수를 의인화하여 여신으로 섬겼다. 복수의 여신 이름은 ‘네메시스(nemesis)’다. 네메시스 여신은 자신의 분수를 모르고, 자신에게 맡겨진 운명을 소중하게 생각하지 않는 사람을 벌한다.

오만한 자, 복수 당하리라

분노의 여신 네메시스는 ‘오만’한 자를 벌한다. 오만이란 자신에게 주어진 유일무이한 임무를 무시하거나 당연한 것으로 여겨 낭비하는 사람은 ‘오만’하다. 그리스 비극의 주인공들은 ‘오만’하기 때문에 비극적이다. 인생이라는 무대에서 자신에게 부여된 임무는 고유하다. 그것은 비교가 불가능하고, 남들과 경쟁 대상도 아니다. 자신이 그 임무를 찾아 최선을 다해 완수했느냐가 가장 중요하다.

고대 그리스어로 ‘오만’을 ‘휴브리스(hubris)’라 부른다. 휴브리스는 피해자에게 창피를 주고 욕보이는 행위다. 어떤 사람이 ‘오만’한 행위를 하는 이유가 있다. 자신의 본래의 모습을 잃고 자신 안에 존재하는 ‘쾌락’을 자극하여 얻는 희열 때문이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오만’을 피해자에게 창피를 주는 행위라고 정의한다. 가해자가 무슨 해를 당해서가 아니라, 자기 스스로 그런 폭력적인 행위로 ‘희열’을 느끼기 위해 폭력을 행사한다. ‘오만’한 자는 자신의 미래를 한 치 앞도 볼 수 없는 장님이 된다.

봄을 맞는 안테스테리아(Anthesteria) 축제

‘제주(祭酒)를 바치는 여인들’은 오만한 자를 복수하는 이야기다. 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오만한 자인 아가멤논을 죽인 그의 부인 클리템네스트라를 다시 살해하려는 그들의 아들 오레스테스의 복수에 관한 이야기다. 아이스킬로스 3부작 비극 ‘오레스테이아’의 두 번째 작품으로 첫 번째 작품 ‘아가멤논’과 세 번째 작품 ‘자비로운 여신들’사이에 낀 경계자다.

아르고스라는 도시는 슬픔에 빠졌다. 10년 만에 트로이에서 돌아온 왕, 아가멤논이 왕비 클리템네스트라에 의해 살해당했기 때문이다. 고대 아테네에서는 까마득한 옛날부터 ‘안테스테리아(Anthesteria)’라는 축제가 있었다. 이 축제는 봄을 시작한 춘분에 그 전해에 숙성시킨 와인 항아리를 개봉하는 의식이다. 3일 동안 진행되는 이 축제는 사제가 술의 신인 디오니소스를 위해 마련한 와인 항아리인 ‘피쏘스(pithos)’의 마개를 정성스럽게 열면서 시작한다.

디오니소스 신은 상징적으로 겨울 내내 항아리 안에서 ‘죽었다가’ 이 봄에 다시 항아리 밖으로 나와 부활을 시도한다. 이제 봄이 겨울을 정복할 참이다. 과거에 대한 기억과 미래에 대한 욕망과 희망이 공존하고, 죽음에 대한 공포가 생명에 서서히 대치된다. 안테스테리아 축제는 서로 다른 감정들과 양립할 수 없는 세계를 모두 경배하는 축제다. 죽은 자들을 불러내 새로운 삶의 원친으로 만들려는 봄을 즐거워하여, 겨울 내내 항아리 안에서 죽은 듯 지낸 와인을 밖으로 불러내, 만물을 소생시키는 땅에 제주를 뿌린다. 이 의례에 참여한 자들은 이 제주를 마심으로 봄에 새로 싹을 내미는 꽃처럼, 새로운 모습으로 변신을 시도하는 봄의 축제다.

호메로스와 아이스킬로스의 ‘오레스테스’

아이스킬로스는 ‘제주를 바치는 여인들’에서 죽었던 인간을 부활시킨다. 오레스테이아의 첫 번째 작품 ‘아가멤논’에서 아버지 아가멤논과 함께 상징적으로 죽은 그의 아들 오레스테스를 새로운 인간으로 각색하여 부활시킨다. 기원전 8세기 호메로스의 ‘오레스테스’와 기원전 5세기 아이스킬로스의 ‘오레스테스’는 전혀 다른 인물이다.

호메로스의 ‘오디세이아’에서 오레스테스는 아트레우스 가문과 왕권의 회복을 원한다. 그는 어머니 클리템네스트라를 피해 외국으로 도망했다가 돌아와 아버지 아가멤논을 살해한, 자신의 어머니와 그의 정부 아이기스토스를 아무런 양심의 가책도 없이 살해한다. 그런 후, 그는 “아르고스 시민들을 위해 장례를 선포한다.” 오레스테스는 사라질 위기에 빠진 아르고스의 왕권을 확립하였다. 아이스킬로스의 ‘제주를 바치는 여인들’에서 오레스테스는 역설적이며 야누스적이다. 그는 아버지의 원수를 갚아 어머니를 죽여야 하는 운명이다. 그는 정의롭기도 하고 불의하기도 하다. 아이스킬로스는 오레스테스의 심리로 깊이 여행하여, 그 마음에서 일어나는 생각들을 무대에 올렸다.

오레스테스의 내적 변화

만일 아이스킬로스의 3부작 ‘오레스테이아’가 야만에서 문명으로 가는 전이(轉移)의 과정이라면, ‘제주를 바치는 여인들’은 그 중심인물인 오레스테스가 소년에서 청년이 되기 위한 통과의례 과정을 심리적으로 보여준다. 이 작품에서 오레스테스는 깊은 수렁에 빠져 고민한다. 아이스킬로스는 오레스테스의 내면에서 일어나고 있는 변화의 과정에 주목한다. 그는 아버지의 복수를 위해 어머니를 살해해야 하는 오레스테스의 운명에 공감하고 함께 깊이 고민한다. 마치 포도즙이 겨울 내내 피쏘스 안에서 자신을 와해시켜 포도주로 거듭나듯이, 오레스테스는 자신을 억누르는 피할 수 없는 운명과 대결하여, 새롭게 태어나야 한다.

이 비극작품에 등장하는 장소인 비밀 방, 들판, 그리고 아가멤논의 무덤은 오레스테스를 변화시키는 ‘피쏘스’다. 이곳에서 오레스테스는 복수에 가득한 과거의 자신과 연민으로 거듭나려는 자신이 만나 창조적인 고뇌에 빠진다.

분노에 가득한 어린아이와 같은 자신이 넓은 사회로 진입하기 위해서 내가 아닌 공동체와 심지어는 원수와 화해해야 하는 딜레마가 그를 성인으로 변화시킨다. 이 과정에서 자신만의 이데올로기라는 소용돌이에서 헤어나지 못하는 유아적인 순진함이 서서히 죽고, 다양한 경험을 수용하는 온전한 인간, 사회의 중요한 자신이 되는 시민으로 탄생한다. 오레스테스는 이 과정 중에 심리적으로 정신적으로 깊이 상처를 경험할 수 밖에 없다. ‘제주를 바치는 여인들’는 오레스테스의 끔찍한 고통의 경험을 통해 우리로 하여금 재생과 빛의 세계를 바라보게 만든다.

오레스테스의 성인식

어머니 클리템네스트라가 아버지를 죽이고 아르고스의 왕이 된 후, 세월이 지났다. 오레스테스는 육체는 떠나있었지만, 마음은 복수로 나날이 불타오르고 있었다. 그는 이제 아버지의 원한을 풀기 위해 낯선 땅에서 자신의 고향으로 돌아간다. 오레스테스는 친구 필라테스와 함께 아르고스로 돌아와 아버지 무덤을 찾았다. 그리고 죽은 자들을 인도하는 헤르메스 신에게 기도한다. “아버지의 권능을 지키시는 지하의 헤르메스여! 부디 내 편이 되어 나의 구원자가 되어주소서! 나는 추방되었다가, 이 나라로 돌아와 여기 무덤가에 서서, 내 말씀을 들어주십사 큰 소리로 아버지를 부르고 있습니다.”(1-4행)

그는 자신의 머리카락을 잘라 두 타래로 나눠 하나는 아버지 무덤에, 하나는 자신을 키워준 이나코스 강에 바친다. 이나코스강은 자신을 키워준 아버지와 어머니 모두를 상징한다. 그는 아버지를 위한 애도를 자신이 독립적인 인간이 되기 위한 성인식과 연결시킨다. 그는 아버지가 돌아가셨을 때, 장례식에 참여하여 울지도 못하고, 시신을 운구할 때 손을 내밀지도 못한 과거의 자신을 책망한다.

분노의 불길이 치솟는 오레스테스

오레스테스가 자신의 머리카락 타래를 놓자마자, 멀리서 여인들이 검은 옷을 입고 다가오는 것을 목격한다. 그리고 손에는 포도주인 제주를 들고 온다. 이 여인들은 노래한다. “어머니 대지가 마신 피, 복수를 부르는 살인의 피는 엉겨 붙은 채 풀어질 줄 모르고, 두고 두고 고통을 주는 아테(ate)는 역병의 잔이 다 찰 때까지 죄진 자를 벌하지 않는다네. 처녀의 침실이 한번 더럽혀지면 치유할 길이 없듯이, 이 세상 강물을 한 곳에 모두 모아도, 살인의 핏자국은 지울 수 없다네.”(66-74행)

이 슬픈 노래를 들은 오레스테스는 자신 안에 잠자던 분노의 불길이 타오른 것을 감지하였다. ‘아테’는 고대 그리스어로 자신의 비극을 초래하는 결정적인 실수나 미혹이다. 이 노래를 들은 오레스테스는 스스로 미혹에 사로잡혀, 무모한 결정을 내린다. 아테의 특징은 자신에게 다가올 비극을 알지 못하는 장님성이다. 오레스테스는 분노에 휩싸여 자신을 파멸시킬 비극적인 사건을 결정한다. 그는 아버지를 죽인 어머니를 살해할 것이다. 오만으로 휩싸이면 장님이 된다. 그 장님은 자기 스스로에게 해를 가하는데, 그것이 바로 ‘네메시스’ 복수다.

배철현 서울대 종교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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