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소련이 모피 생산량 늘리기 위해
동아시아 동물 유럽까지 옮겨 놓아
몇 년 전 중국에서 모피 생산을 위해 대량으로 사육되는 너구리의 모습이 담긴 동영상이 공개된 적이 있습니다. 영상을 보면 그야말로 아비규환입니다. 모피의 질을 좋게 한다는 이유로 살아있는 너구리의 피부를 벗겨내기도 하거든요. 영상을 끝까지 보는 것이 참 쉽지 않더군요.
너구리는 아마도 설치류를 제외하면 우리나라에서 가장 많이 볼 수 있는 야생 포유류 중 하나일 겁니다. 농촌에서야 고라니가 흔하게 나타나지만, 도심까지 포함하면 말이죠. 최근에도 야생 너구리가 도심에 출몰했다는 뉴스가 나오기도 합니다. 사실 너구리는 못사는 지역이 없을 정도로 넓게 퍼져있습니다. 단지 사람을 무서워하는 야생동물의 특성 때문에 숨어 지낼 뿐이죠.
밤에 돌아다니는 작은 개
너구리의 학명(Nyctereutes procyonoides)에서 ‘Nukt-’는 밤을 뜻하고 ‘ereutes’는 방랑자를 뜻합니다. 밤에 돌아다니는 방랑자인 셈이죠. 종명의 ‘pro’는 ‘작은’을 뜻하며 ‘cyon’은 개를 지칭하는 말이니 결국 너구리의 학명은 ‘밤에 돌아다니는 작은 개’라는 의미가 됩니다.
개과에 속한 너구리는 하나의 속에 한 종밖에 없는 독특한 동물입니다. 너구리속은 약 900만년 전에 출현했지만 대부분 340만년 전부터 78만년 전 사이에 멸종하고 지금은 너구리만 남았다는 연구가 있습니다.
너구리의 유전자를 분석해보니 많은 여우속 동물의 공통 조상 격이더라는 연구 결과도 있습니다. 남미 산 여우와 비슷한 것으로 알려진 너구리의 두개골은 작지만 단단하고 약간 정방형입니다.
육식 동물에서 발견되는 송곳니와 큰 어금니(열육치)는 발달하지 않았습니다. 어금니는 평편하고 다른 개과 동물보다 1.5배에서 2배 정도 긴 소화기관이 발달해 있습니다.
몸통은 긴 편인데 다리는 짧아 잘 뛰지 못합니다. 총 길이는 45~71㎝ 정도이며, 몸체의 3분의 1에 못 미치는 12~18㎝ 정도인 꼬리는 뒷발의 발목관절 정도까지 내려오며 땅에 끌지는 못합니다.
귀는 짧고 털에서 살짝 돌출된 정도이지만 쉽게 알아볼 수 있습니다. 체중은 계절에 따라 변화가 심한데 3월에는 3㎏ 정도였는데 8~9월에는 수컷의 경우 6.5~7㎏에 이르기도 합니다.
겨울털과 동면, 너구리의 겨울나기
너구리는 영하 25도까지 떨어지는 동북아 기후를 견디기 위해 겨울털을 가지고 있습니다. 겨울털은 조밀한 속 털과 120㎜에 이를 만큼 길고 거칠며 두꺼운 겉 털로 이뤄집니다. 야생동물 구조센터에서 관찰한 결과 5~6월 사이에 솜털이 빠지는데, 여름 털은 더 짧고 밝아집니다.
너구리는 개과 동물 중 동면을 하는 유일한 동물로 알려져 있습니다. 동면에 대비해 초겨울까지 피하지방을 18~23%, 복강지방을 3~5%까지 축적합니다. 이 정도 수준까지 체지방을 축적하지 못한 경우 겨울철에는 죽는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겨울 동면시기에는 체내 대사율을 25%까지 떨어뜨리기도 한다는군요.
러시아의 우수리지방과 같은 곳은 겨울폭풍이 오는 시기에만 잠깐 동면을 한다고도 합니다. 겨울철에 적설량이 15~20㎝까지 쌓이면 신체활동을 줄이고, 굴에서 150~200m 정도까지만 움직인다고 하는군요. 먹이가 더 풍부해지고 암컷의 발정이 시작될 무렵인 2월부터 활동성이 증가합니다.
한국의 상황은 조금 다른 것 같습니다. 굴에서 쉬는 짧은 기간을 제외하고서 웬만해서는 동면을 하는 것 같지는 않습니다. 동면하는 너구리가 연구된 핀란드보다는 위도가 낮아서 겨울철 추위가 심하지도 않고 적설량도 많지 않기 때문인데요. 너구리의 움직임을 제약하는 조건이 심하지도 않고 먹이 구하기도 그리 어려운 것은 아닐 겁니다.
너구리와 오소리는 발가락이 다르네
너구리와 비슷하게 생긴 동물로는 오소리와 라쿤이 있습니다. 우리나라에는 라쿤 보다는 오소리가 많이 살고 있어 착각할 때가 있긴 하지만 완전히 다른 동물입니다.
족제비과에 속하는 오소리는 영화에 나오는 울버린과 친척입니다. 족제비과에는 수달, 족제비, 담비 등이 있는데 이 중 오소리가 너구리와 가장 비슷하게 생겼죠.
너구리와 오소리의 차이는 발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오소리는 앞뒤 모두 5개씩의 발가락을 가진 반면 너구리는 4개의 발가락을 가지고 딛죠. 오소리의 앞 발톱은 굴을 파거나 먹이를 찾는 데 적극적으로 활용할 수 있을 정도로 길지만 너구리 발톱은 그렇지 않습니다. 오소리의 발바닥은 흰색에 가깝지만 너구리 발바닥은 검다는 것도 차이입니다.
너구리의 귀가 오소리보다 크다는 점, 너구리의 코는 검지만 오소리의 코는 살구색에 가깝다는 점으로도 구분할 수 있겠네요. 오소리는 산간지역에 주로 서식하고 너구리는 산에서부터 저지대까지 다양하게 서식하고 있으니 사람들의 눈에 더 자주 띄는 것은 너구리겠죠.
아무 음식이나 잘 먹는 너구리
너구리는 곤충부터, 설치류, 식충류, 양서파충류와 조류, 어류, 갑각류와 사체 등까지 먹는 잡식성이지요. 기회가 닥치는 대로 아무 것이나 잘 먹는다는 뜻에서 ‘기회적 일반섭식종’이라고도 합니다. 계절적으로 출현하는 먹이에 따라 주 먹이는 계속 바뀔 수 있어 환경적응력이 좋은 종인 셈이죠.
민가 주변의 너구리 똥을 살펴보면 사람이 먹고 남은 음식물 찌꺼기가 포함된 경우가 많습니다. 고춧가루나 조기 머리뼈, 구운 오징어, 심지어 소화가 안된 비닐장갑이 나타나는 경우도 있습니다. 가을에는 은행을 먹기도 하는데 은행의 과육은 먹고 은행알은 그대로 배설한 배설물 덩어리들도 발견됩니다. 거미도 무척이나 좋아해서 위 안에 거미만 가득 찬 개체도 확인된 바 있죠. 일단 먹을 수 있는 것은 먹어두는 습성이라 위 안에 동일 먹이물질이 한 가득 들어있는 경우가 많은가 봅니다.
너구리의 소통은 화장실에서
너구리는 배설할 때 공동화장실(분장)을 만드는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이를 통해 다른 너구리들과 소통을 하기도 하는데요. 연구에 따르면 공동화장실을 사용하는 목적은 각 가족 구성원이나 외부침입자를 가리는 방식이라고 하네요. 주로 후각 정보를 통해 같은 종 내부에서 서로를 인식하는 방법이랍니다.
여우처럼 짖지는 않습니다. 대신 끙끙대는 신음소리 같은 소리를 내지요. 다양한 소리를 내기는 하지만 매우 특징적인 소리는 없습니다. 다만 공격하거나 방어를 할 때는 매우 날카로운 “꺅-“하는 괴성을 지르기도 합니다. 으르렁대기도 하지만 심하게 소리가 크지는 않습니다.
너구리는 다양한 자세를 통해서 이야기하기도 합니다. 예를 들면 꼬리를 움직여 우월성을 표현하거나 발정 준비를 나타내죠. 직접적인 접촉은 주로 부모 자식간, 부부간에서 중요한 소통의 수단이 됩니다.
너구리의 적, 늑대
해외에서는 늑대가 너구리의 주된 포식자로 알려져 있습니다. 너구리는 달리는 속도가 느려 늑대에 잡히기 쉽고, 늑대도 굴을 파는 습성을 가지고 있기 때문인데요. 일부 지역에서는 여우가 새끼 너구리를 잡아먹는다는 보고도 있지만 우리나라에서는 늑대든 여우든 모두 사라진 동물들이어서 당분간은 이런 문제가 없겠습니다.
다만 우리나라에 돌아다니는 유기견 중 극도로 야생화 된 개는 너구리를 공격할 가능성이 매우 높으며, 수렵 철에는 사냥개들이 너구리를 재미 삼아 죽이는 경우도 많습니다. 시골에서는 진돗개가 수시로 너구리를 물고 오는 걸 보신 분들도 많습니다. 수리부엉이도 충분히 어린 너구리들을 먹이로 삼을 수 있습니다.
일본에서는 매년 11만~37만 마리의 너구리가 도로에서 죽음을 맞는다고 하네요. 우리나라에서도 아직 연구 자료는 부족하지만 가장 빈번하게 ‘로드 킬’로 희생되는 중형 포유류 중 하나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굴 생활하는 너구리, 전염병에 약하다
너구리 수렵이 허용되지 않은 우리나라에서 가장 큰 위협 요인은 질병일 것입니다. 너구리에게 가장 중요한 질병은 아마도 개선충증, 개홍역과 광견병이 아닐까 합니다.
개선충증은 굴 생활을 하는 너구리에게 전면적으로 퍼질 가능성이 높고 건강한 너구리도 감염이 될 수 있습니다. 털이 심하게 빠지거나 심한 가려움증, 표피박리, 만성 피부염 등을 유발하고 체중 감소도 일으킵니다. 피부 병변이 심해 ‘너구리 에이즈’라고 불리기도 합니다.
감염된 동물과 접촉할 경우 사람에게도 감염되지만 증식하지 못하고 자연적으로 없어집니다. 하지만 감염이 되면 한동안 가려움으로 고생을 좀 할 겁니다. 특히 겨울철에 두드러지는데 일본의 너구리 폐사의 가장 큰 원인 중 하나로 지목되기도 합니다. 겨울은 너구리가 살아남기 가장 힘든 계절인 만큼 몸의 면역능력이 떨어져 더욱 잘 발생할 개연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개홍역은 반려견과 함께 생활하는 사람들이라면 익숙할 수 있는 질병입니다. 일반적으로 종합예방접종에 포함된 질병인데, 이 바이러스에 감염이 되면 초기 3~6일간은 체온이 올라가고 이 시기에는 눈곱과 콧물이 많이 나오며 다소 침울해지고 식욕을 잃게 됩니다. 소화기, 호흡기계에서 문제가 발생하기도 하는데 기침과 콧물을 시작으로 기관지염이 발생하고 폐렴으로 진행되기도 합니다. 바이러스가 퍼지기 전까지는 야생너구리에게서 알아차리기 어렵기 때문에 접촉을 조심해야 합니다.
광견병은 중요한 문제를 안고 있습니다. 개나 다른 가축, 심지어는 사람에게도 영향을 미치기 때문인데요. 해외에서는 해당 지역의 너구리를 대량 살처분 하는 경우도 보고되고 있습니다. 2012, 2013년 경기 안산의 시화호에서 광견병에 걸린 너구리를 발견한 적이 있죠.
인간은 모피를 얻기 위해 너구리 사육량을 늘려 왔습니다. 너구리가 동유럽에서 서유럽으로 퍼져나간 이유도 구 소련이 모피생산량 증대를 위해 동아시아 동물인 너구리를 강제로 동유럽으로 옮겨 놓았기 때문이죠. 유럽으로 이주한 너구리는 적응력과 식성, 번식능력 때문에 급격히 퍼져 나갔고 광견병과 같은 질병의 주요 숙주가 되기도 했습니다.
모피는 현대 사회에서 동물권과 관련해 논란이 일고 있습니다. 많은 동물 보호단체가 모피문제를 지적한 바 있죠. 몇 년 전부터 우리나라에서 겨울 최고의 패션 아이템으로 자리잡은 라쿤털도 사실은 너구리털일지도 모릅니다.
많은 사람들의 옷장에 걸린 두꺼운 외투, 그 모자에 달린 털에도 너구리는 남아 있습니다.
김영준 국립생태원 동물병원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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