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무로가 일제강점기에 주목하면서 점점 바빠지는 이들이 있다. 일본인 배역 ‘구인난’에 숨통을 터준 일본 출신 배우들이다. 스크린에서 자주 만나는 몇몇 얼굴들은 이미 눈에 익다.
배우 김인우(48)가 대표적이다. 영화 ‘암살’(2015) ‘아가씨’ ‘동주’ ‘덕혜옹주’(2016) 등 근현대를 배경으로 한 시대극엔 늘 그가 있다. 지난달 개봉해 호평을 얻은 ‘박열’에 이어 요즘 극장가를 달구고 있는 ‘군함도’에서도 존재감을 빛낸다. 재일동포 3세인 김인우는 일본에서 영화 20여편, 연극 40여편에 출연한 베테랑이다. 힘들었던 시절 영화 ‘파이란’(2001)과 ‘집으로’(2002)를 보고 감명 받아 2008년 한국행을 결심했고, 2009년 영화 ‘굿모닝 프레지던트’로 한국 활동을 시작했다. 이제는 일본인 전문배우 섭외 1순위로 통한다.
그런 김인우가 한국영화 제작자와 감독에게 적극 추천하는 ‘일본인 배우’가 있다. ‘박열’에서 일본제국주의에 맞선 아나키스트 박열(이제훈)과 가네코 후미코(최희서)를 변론한 후세 다쓰지 변호사 역의 야마노우치 다스쿠(47)다. 지난해 KBS 역사드라마 ‘임진왜란 1592’에선 광기 어린 왜장 가메이 고레노리를 연기해 독특한 인상을 남겼다. 일본에서 연극배우로 활동했던 그는 2001년 부천국제판타스틱영화제에 출연작이 초청돼 한국에 왔다가 지금의 아내를 만나 2003년 한국에 정착했다.
김인우와 야마노우치는 연기뿐 아니라 시나리오 번역과 감수, 한국배우들의 일본어 연기 지도도 맡곤 한다. 일본 출신 배우가 직접 매만진 대사와 연기는 일본사람이 보기에도 무리 없을 만큼 자연스럽다. 당연히 영화의 완성도도 올라간다. 충무로가 고마워해야 할, 한국영화계의 숨은 공신이다. 평소에도 “형 동생”으로 부르며 가깝게 지낸다는 두 배우가 최근 한국일보를 찾았다.
일제 시대극의 표준이 된 ‘박열’
원래부터 서로 알던 사이는 아니다. ‘덕혜옹주’를 촬영하던 김인우가 이 영화에서 한국배우들에게 일본어를 가르친 야마노우치의 대사 녹음 파일을 우연히 듣고 “이렇게 발음과 억양이 좋고 연기를 잘하는 일본배우가 한국에 있었냐”면서 먼저 만남을 청했다. 이후 ‘박열’을 준비 중이던 이준익 감독에게 그를 추천했다.
“사실 저도 후세 변호사 역을 탐냈어요. 감독님이 원하는 캐릭터를 골라보라고 하시길래 딱 찍었죠. 그런데 곧바로 ‘장난치는 거지?’ 하시더니 악역인 내무대신 미즈노 렌타로 역을 덜컥 맡기시더라고요. 하하.”(김인우) “캐스팅 되고서 진짜 얼떨떨했어요. 오디션을 보면서도 후세 변호사를 내가 연기할 리는 없다고 장담했거든요. 후세 변호사는 고통받는 조선과 일본의 민중을 위해 헌신한 훌륭한 분이에요. 일본사람이면서도 잘 몰랐던 역사적 인물을 연기하게 돼 큰 보람을 느꼈습니다.”(야마노우치)
김인우는 캐스팅 디렉터나 다름없었다. ‘박열’보다 먼저 촬영한 ‘군함도’에서 만난 신인배우 김준한을 일본 예심판사 역에, ‘군함도’의 일본어 지도를 맡은 일본배우 요코우치 히로키를 교도관 역에 소개했다. 요코우치는 이제훈의 일본어 연기도 도왔다. “예전부터 느꼈지만 김인우 선배의 캐스팅 감각이 정말 뛰어나요.” 야마노우치의 감탄에 김인우가 손사래를 치며 “감독님이 믿어준 덕분”이라고 공을 돌렸다.
시나리오도 배우들의 손을 거쳤다. 최희서가 번역한 일본어 대사를 김인우가 가다듬었고, 김인우마저 헷갈리는 어려운 단어와 표현들은 야마노우치가 감수했다. “이 영화의 90%는 실화”라고 호언한 이 감독의 자신감이 어디에서 나왔는지 알 것 같다.
“역사적 사실이 틀리면 안 되니까 인우 선배가 단어 하나도 허투루 넘기지 않으셨던 것 같아요. 누구든 이 영화에 나온 일본 자료나 번역이 틀렸다고 절대 따져 물을 수 없을 겁니다.”(야마노우치) “‘박열’의 일본어 수준이 상당히 높아요. 배우가 번역했기 때문에 캐릭터에 맞는 어투까지도 담아낼 수 있었어요. ‘박열’이 일제강점기 시대극의 표준을 만든 거라고 봅니다.”(김인우)
시대극에선 언어도 연기만큼 중요
김인우가 ‘박열’에 특별한 애정과 책임감을 쏟은 데는 이전 한국영화들의 일본어 표현에 대한 안타까움도 깃들어 있다. “저처럼 한국영화를 좋아하는 일본사람들이 정말 많아요. 그런데 일본어가 어설프면 몰입이 확 깨져요. 작품성도 떨어질 수밖에요.” 김인우는 몇 년 전 감수로 참여했던 영화 한 편을 예로 들었다. 후시녹음을 입힐 때 김인우는 주연배우의 일본어 대사가 자연스러운 음성을 골랐지만, 감독은 “느낌만으로” 꼭 다른 음성을 선택하더라고 했다. 나중에 그 영화의 일본어가 어색하다는 비판을 접하고 김인우는 자기 탓인 것만 같아 얼굴이 화끈거렸다.
두 배우는 “언어도 연기만큼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한국의 문화콘텐츠가 세계화된 요즘 시대엔 더 그렇다. “주요 배역에는 캐릭터가 일본인이어도 꼭 한국배우가 캐스팅돼요. 연기력이 부족할 거란 선입견 때문인지, 숱하게 오디션에 도전했지만 좀처럼 기회가 오지 않더군요. 현장에서 일본어 지도를 하는 일이 더 많았습니다.”(야마노우치) 두 배우는 “대사가 많은 일본인 역할은 더빙을 하거나 일본배우에게 맡겨줬으면 좋겠다”고도 바랐다. 이들의 쓴소리에는 한국영화에 대한 애정이 듬뿍 담겨 있다. ‘시대 배경상 일본인 악역이 많아 아쉽지 않냐’는 물음에도 “최근 일제강점기를 다르게 접근하는 영화적 시도들이 늘고 있어 반갑다”고 했다.
“역사를 바로 알자는 것이지, 일본을 무작정 비난하려는 게 아니니까, 악역을 맡아도 부담은 없어요. 저만의 색을 녹여 섬세하게 표현하는 게 더 중요하죠. 그래서 관객에게 욕먹으면 뿌듯해요. 연기를 잘했다는 뜻이니까. 다만 ‘일본놈’이라고 매도하는 댓글은 좀 서운합니다.”(김인우) “어떻게든 캐릭터를 납득시키는 게 배우의 ‘작업’이라고 생각해요. 재료가 많고 적음의 차이가 있을 뿐이죠. 일본어 연기를 지도할 때도 그 점을 많이 강조하곤 합니다.”(야마노우치)
앞으로 두 배우를 스크린 안팎에서 더 자주 보게 될 것 같다. 김인우는 “작품 활동이 점점 더 재미있어진다”며 “한국어도 제법 늘었다”고 유쾌한 웃음을 터뜨렸다. 야마노우치도 “어떤 역할이든 잘 소화해서 한국영화에 도움이 되고 싶다”고 바람을 보탰다.
김표향 기자 suzak@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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