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학중앙연구원
당대 기록·언론보도 추적해
‘…언론의 신라상 왜곡’ 발간
열광의 경주 개발 이유 밝혀
경주라 하면 모두들 어릴 적 수학여행 풍경 한 자락쯤은 풀어놓을 수 있다. 그런 경주는 어떻게 지금과 같은 문화관광의 도시가 되었을까. 가까이는 박정희 전 대통령 시절의 개발 사업이 있었고 그 이전에는 일제 시대가 있었다. 분단 이후 남한이야 유서 깊은 역사 도시로 부각시킬 곳이 경주밖에 없었다 하지만, 일제는 왜 경주여야 했을까.
한국학중앙연구원이 24일 내놓은 ‘일제 강점기 언론의 신라상 왜곡’은 이 문제를 다루고 있는 연구서다. 일제는 경주를 적극 개발했다. 그러나 개발의 맥락은 그들이 원하는 바를 만족시키기 위함이었다. 연구서는 당대의 기록과 언론보도를 통해 그것이 무엇인지 추적한 작업이다.
일제의 경주 사랑은 오래됐다. 1910년 강제병합 직후 1912년 발간된 ‘조선총독부 월보’에는 경주를 두고 “일본 제국이 자랑할 바”라는 표현이 이미 등장한다. 1916년에는 ‘고분 및 유물 보존 규칙’ 등 문화재 관련 법규정이 마련된다. 이는 일본 본국보다 3년이나 빠른 것이다. 한 해 앞선 1915년에는 경주고적진열관이 만들어졌고 이는 1926년 조선총독부박물관 경주분관으로 확대 개편됐다. 경주 열기의 정점은 1921년 금관총 발굴이었다. ‘금의 나라’ 신라에 대한 열광이 이어지자 1927년 경주 일대 개발을 위한 사전 조사가 진행되기도 한다.
이런 열광의 배후에는 다양한 이유가 있었다. 일단 조선 남부를 일본이 운영했다는 ‘남선경영설(南鮮經營說)’의 영향이다. 경주도 일본 식민지였거나, 식민지인 주변의 영향을 크게 받았다고 봤다. 현실적 필요성도 있었다. 가령 화랑은 1941년 태평양전쟁 발발 이후 조선 청년들의 징집 필요성이 대두되자 화랑의 ‘임전무퇴’ 그 자체가 중요한 가치가 됐다. 김덕원 명지대 강사는 “조선 각계 명사들은 학병출진을 독려하며 조선의 청년을 화랑으로 호명하고 있다”고 말했다.
또 ‘선량한 관리자’의 이미지도 있다. 후진적인 조선을, 선진적 일제가 이처럼 잘 돌봐 주고 있다는 이미지다. 민족의 소멸을 은연중에 각인시키는 역할도 한다. 삼국시대는 유아, 신라는 청년, 고려는 장년, 조선은 노년에다 비유했다. 신라를 보여 준다는 것은 가장 화려했던 청년 시절을 부각시킨다는 의미도 되지만, 동시에 노년의 조선이 마침내 죽었으니 더 이상 신경 쓰지 말라는 메시지이기도 했다.
영광의 신라라는 이미지는 저항을 봉쇄하는 역할도 했다. 강희정 서강대 연구교수는 “경주의 유적과 유물을 찬란한 과거 역사의 산물로 규정한 것은 현실에 대한 자조와 회한을 불러오기 위한 것”이라면서 “현실을 인정하고 안주하게 만들기 위한 의도”라 덧붙였다. 과거에 대한 지나친 신비화는 결국 현실도피일 뿐이다.
조태성 기자 amorfati@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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