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TX 개통 앞두고 계약직 선발
코레일 정규직 전환 약속 저버려
파업하다 280여명 해고 당해
다른 생계 꾸리며 끈질긴 투쟁
1ㆍ2심 승소 판결, 대법원서 파기
지급 받은 4년치 임금 반환 압박
“박근혜 정권 의식한 정치적 판결
달라진 사회 의식ㆍ정부에 기대”
20여개 시민단체와 대책위 결성
“대체 이게 몇 년째인가요?“
지난 3일 오전 서울역 대합실. KTX 스케줄 전광판이 한 눈에 들어오는 실내 한 켠에 자리잡은 ‘KTX 해고 여승무원들의 복직을 위한 서명운동’ 책상 앞에서 한 60대 남성이 깊은 한숨과 함께 이름 석자를 적었다. “파이팅”을 외치며 이 남성이 떠난 뒤 10대 후반부터 20대 젊은 청년들이 연이어 이들의 안부를 물어오며 서명을 이어갔다. 2004년 입사 당시 20대 초반 사회초년생이었던 KTX 해고 승무원들 대부분은 이제 아이 엄마가 됐고, 이날도 임신한 한 참가자의 몸 상태가 나빠져 예정보다 20분 일찍 서명운동을 종료해야 했다. 해고 승무원 김선옥(39)씨는 “해고 뒤 대부분 가정을 꾸리고 계약직 등으로 일하고 있어 예전만큼 활동하긴 어려워졌다”며 “10년 전 ‘저런다고 달라지냐’며 냉소하던 젊은이들이 최근에는 자신들의 문제로 인식해서인지 서명은 물론 1인 시위에 함께 참여하고 싶다고 연락해오는 것도 달라진 풍경”이라고 설명했다.
‘지상의 스튜어디스’라더니
10일로 한국철도공사(코레일)에 열차 승무 서비스 위탁 운영을 중단하고 직접고용을 요구하며 첫 파업(2006년 3월 1일)을 한 지 4,150일. 남아 있는 KTX 해고 여승무원 33명은 지난달 초부터 매주 월요일과 일요일 두 시간씩 서울역과 부산역 대합실에서 10만명을 목표로 서명운동을 진행하며 여전히 복직의 희망을 이어가고 있다. 문재인 대통령 취임 이후 ‘상시ㆍ지속적이고 안전과 관련된’ 공공부문 비정규직(간접 고용)들의 정규직화 바람이 불고 있지만, 11년 전 똑같은 상황에서 직접 고용을 주장하다가 해고된 이들은 여전히 거리를 맴돌고 있다.
KTX 승무원들의 고용은 시작부터 불법 소지가 다분했다. 2004년 4월 1일 KTX 개통을 앞두고 있던 철도청(현 코레일)은 2003년 9월 노동부(현 고용노동부)에 열차승무업무의 외주화(파견ㆍ도급 등) 가능 여부를 질의했고, 특실서비스를 제외하고는 ‘불가’하다는 답변을 받았다. 하지만 기획예산처(현 기획재정부)로부터 필요한 인력을 확보하지 못한 철도청은 건설교통부(현 국토교통부) 권고에 따라 ‘열차의 운전 취급 등 안전 업무’는 철도청이, ‘승객 서비스 업무’는 위탁업체가 맡는 것을 전제로 퇴직 간부들의 모임인 홍익회와 도급계약을 맺고 1년 계약직 여승무원 351명을 선발했다. 당시 홍익회는 채용 홍보 과정에서 “철도청 방침에 따라 계약직으로 모집하지만 향후 정규직 전환과 공무원 신분에 해당하는 복지를 제공할 것”이라고 말했고, 첫 해 13대1, 이듬해 136대 1의 경쟁률을 기록할 만큼 높은 인기를 누렸다. 당시 ‘지상의 스튜어디스’라고 불릴 정도였다.
그러나 입사 후 근무환경은 예상과 달랐다. 애초 외주화의 논리대로라면 열차당 1,000여명에 달하는 승객들의 안전 업무는 열차팀장(코레일 소속) 1명이 해야 했지만 현실은 그렇지 않았다. 당시 해고된 승무원들로 구성된 한국철도노조 KTX열차승무지부의 김승하 지부장은 “외주화 논리라면 팀장 지시에 따라 사고 상황에서 승무원들은 안내 방송만 하면 되지만 실제 열차가 멈추면 열차팀장과 3명의 승무원들이 비상사다리를 함께 펴고 선로에서 이동시키는 등의 안전 업무를 함께 진행하곤 했다”라며 “코레일로부터 화재 진압훈련 등도 열차팀장과 함께 받았다”라고 당시를 회상했다.
정규직 전환 약속도 온데간데 없었다. 매년 위탁업체(홍익회→철도유통(현 코레일유통)→KTX관광레저(현 코레일관광개발))만 바뀔 뿐 고용 형태는 ‘계약직’에 머물렀다. 처우도 기대에 한참 못 미쳤다. 위탁업체 수수료 등을 떼고 받을 수 있는 월급은 120만~130만원 수준이었다.
이에 승무원들은 2005년 12월 철도노조에 가입하며 본격적으로 코레일 측의 ‘위장도급’을 주장하며 이듬해 3월 1일 첫 파업에 나섰다. 코레일 직원과 업무가 구분되지 않으며 사실상 위탁업체가 아닌 코레일 측의 지휘를 받는 형태로 코레일이 이들을 직접 고용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두 달 뒤인 5월 19일 코레일 측은 업무에 복귀하지 않은 승무원 280여명을 해고하는 초강수를 뒀다.
벼랑 끝에서 다시
이후 지난한 싸움이 계속됐다. 해고 여승무원들은 노숙ㆍ단식ㆍ삭발에 고공철탑투쟁까지 강행했고 교수, 변호사, 종교인 등 각계 인사들도 이들의 직접고용을 촉구했지만 코레일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결국 2008년 11월 생계를 위해 떠나고 남은 34명은 실제 사용자가 코레일인지 위탁 업체인지 여부를 가리기 위한 근로자지위 확인 청구 소송을 제기했다. 판결은 순조로웠다. 법원은 1심(2010년 8월28일)과 2심(2011년 8월19일)에서 승무원들의 손을 들어줬다. 1심 판결문에 따르면 법원은 “철도유통이 업무수행의 독자성을 갖추지 못한 채 피고(코레일)의 일개 사업부로 기능해 피고가 원고를 채용한 것과 같은 묵시적 근로계약관계가 성립된다”라고 밝혔다. 철도유통이 코레일이 100% 지분을 가진 자회사인 점과 코레일 소속 열차팀장들이 승무원들을 서비스 업무수행을 확인하고 평가한 점 등이 판단의 근거였다. 2심에서도 법원은 “코레일 소속 열차팀장과 여승무원의 공통업무가 다수 존재해 도급 계약으로 보기 어렵다”고 판단했다. 당시 승소로 부당해고가 인정돼 승무원들은 4년간의 임금 8,640만원(월급 180만원 적용)을 지급 받았다. 복직도 눈 앞으로 다가온 듯 했다.
그러나 4년 뒤 모든 것은 물거품이 됐다. 코레일의 상고에 2015년 2월 대법원 1부(주심 고영한 대법관)는 “열차팀장과 KTX여승무원의 업무는 같은 공간에서 이뤄지며 서로 협조할 여지가 없지 않지만, 화재 등 비상사태에서 열차팀장의 지시를 받는 것은 이례적인 상황에서 응당 필요한 조치로 KTX여승무원 고유 업무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낮다”며 “철도유통이 승객 서비스업을 경영하면서 직접 고용한 승무원을 관리하고, 인사권을 독자적으로 행사했다”라며 원심 판결을 깨고 파기환송했다. KTX 열차 내 안전을 직접 담당하는 직원은 코레일 소속 열차팀장 단 1명이라고 판단한 것이다. 당시 대법원 파기환송 현장은 눈물바다가 됐다. 권두섭 민주노총 법률원장은 “대법원 판결대로라면 승무원이 아픈 승객을 보고 팀장과 이야기하라고 하며 지나가도 책임이 없게 되는 것”이라며 “같은 공간 안에서 안전 업무에 대해 팀장과 승무원이 유기적으로 일해 혼재할 수밖에 없는데도 위장도급이 아니라며 상식을 벗어난 판단을 한 것”이라고 주장했다. 그 해 12월 민주화를위한변호사모임은 “우리 사회의 간접고용 문제를 확산시키고 불법 파견에 면죄부를 부여한 판결”이라며 대법원 판결을 ‘2015년 최악의 걸림돌 판결’로 선정했다. 공공부문의 민영화를 밀어부친 박근혜 정권을 의식한 정치적 판결이 아니냐는 논란도 거세게 일었다.
KTX 승무원들은 벼랑 끝으로 내몰렸다. 이미 지급받았던 4년치 임금 8,640만원도 코레일에 되돌려 줘야 했다. 암담한 현실에 한 승무원은 대법원 판결 보름 뒤 3살 아이를 남겨두고 세상을 등져 조합원은 33명으로 줄었다. 2016년 4월과 5월 코레일은 해당 임금이 부당이득이니 반환하라는 내용증명을 발송하며 압박했고 연 이자 등을 포함 이는 현재 1인당 1억원 가량으로 불어났다. 코레일 관계자는 “법원의 판단대로 절차에 맞게 환수 조치를 진행할 것”이라고 말했다.
KTX 해고 승무원 33명을 포함해 종교ㆍ여성 관련 20여개 시민단체들은 지난 5월 29일 ‘KTX 해고승무원 문제 해결을 위한 대책위원회’를 출범시켰다. 문재인 대통령이 대선 후보 시절 KTX 승무원 문제를 전향적으로 해결하겠다고 맺은 정책협약 등을 내세우며 복직과 코레일 측의 부당이득금 환수 철회를 요구하고 있다. 김승하 철도노조 KTX열차승무지부장은 “당시 판결은 안전 업무에 대해 공공부문의 간접고용을 인정한 정치적인 판결”이라며 “정부가 전향적인 대책을 마련해 무분별한 공공부문 외주화 문제를 해결해 줄 것을 기대한다”고 말했다. 그들은 지금 애타게 정부와 사회에 묻고 있다. “우리는 다시 KTX에 오를 수 있을까요?”
정준호 기자 junhoj@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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