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 아주 인상 깊은 동영상을 한 사회관계망서비스(SNS)에서 본 적이 있다. 서방 어느 나라 유치원으로 보이는 곳인데 겨우 예닐곱 살 정도 되는 어린 소녀가 또래 친구들과 어울리는, 언뜻 평범해 보이는 영상이었다. 그러나 소녀의 한쪽다리는 눈에 확 띄게 다른 아이들과는 달랐다. 소녀는 과거 육상선수로 유명했던 남아공 출신의 ‘오스카 피토리우스’의 다리와 똑같이 생긴 보장구를 달고 있었다. 사고나 질병으로 다리를 잃고 긴 재활의 시간을 보낸 뒤 유치원에 나온 첫날 상황으로 보이는 영상 속에서 소녀는 환하게 웃고 있었다. 감동은 그 소녀를 맞이하는 또래 친구들의 환영 분위기에서 크게 다가왔다. 문을 열고 들어온 그 소녀를 친구들은 환호와 박수로 맞았고, 이내 손을 잡고 마당을 뛰어다녔다. 무엇보다 그 소녀의 다리를 전혀 의식하지 않는, 아름다운 장면이 길게 펼쳐졌다. 그 모습이 어찌나 감동적이었던지, 영상을 보는 내내 눈을 뗄 수 없었다.
그 영상의 여운을 길게 새기면서 근래 들어 지난 내 삶의 궤적을 돌아보고 있는 나를 의식하게 된다. 집안보다는 바깥을 제집 삼아 꽤 오래 세상을 떠다닌 시간들이었다. 사람에 대한 관심이 주된 동기이기에 주어진 생의 무게 속에서 사람들이 어떻게 삶을 이루어 가는지 알고 싶었다. 조금은 더 가까이에서 ‘보고’ 싶은 마음도 컸다. 그들 대부분은 소위 사회적 약자에 속하거나 어려운 처지에 놓인 이들이었다.
더 구체적인 이유는 아마 ‘더 나은 세상’에 대한 욕구에서 나온 것이 아닐까 싶다. ‘더 나은 세상.’ 언뜻 꽤 거창해 보이는 그 이상적인 세상을 위해 지난 나의 궤적이 온전히 합당했다고 자부할 일은 사실 그리 많지 않다. 대단한 성과도 없었고 타인의 어려움 앞에 좌절하거나 안타까움에 주저앉았던 순간이 더 많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고단한 생의 형태를 지닌 이들의 곁을 가까이 함으로써 나는 무엇을 얻었을까. 근래 자주 지나간 내 삶의 궤적을 돌아보는 이유는 그 답을 찾기 위함이라 생각하게 된다. 무언가를 이루어서가 아니라 여전히 더 나은 세상을 이루어가는 것에 나름의 역할자로서 다시 한번 스스로를 곧추 세우기 위함이다. 스스로 멍석을 까는 일인지는 모르나 오랜 기간 타인이 삶 언저리를 살피면서 ‘생각의 전환’이라는 큰 선물을 받았다고 자부하고 싶다.
‘어떻게 사람을 바라볼 것인가.’ 사진을 자기 내재관점의 표현수단으로 삼고 있는 나에게 이 질문은 이제 일종의 화두이자 사람과 삶에 대한 근원적인 질문이 되어 있다. 이는 타인의 삶이 지닌 외양의 형태를 비롯해 빈곤, 장애, 피부색 등등의 차별이 여전히 존재하고 있음을 전제하면서, 그런 것들에 우선해서 어느 한 사람의 존재가치를 훼손해서 바라보지 않겠다는 것을 뜻한다. 또한 이전에는 그런 차별기제에 갇혀 지나친 연민과 동정의 감정으로만 타인의 삶을 바라보았다는 자성의 목소리이기도 하다.
더 나은 세상을 위해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란 결국 ‘어떻게 사람을 바라 볼 것인가’라는 자문을 스스로 내려놓지 않는 것에서 다시 신발끈을 고쳐 매는 것이 아닐까.
임종진 달팽이사진골방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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