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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주항쟁 30년, 명동성당 농성 주역들의 동행

입력
2017.06.10 04: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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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때 명동은 요즘의 광화문광장

성당 들어온 시위대 경찰이 봉쇄

비폭력 규칙 지킨 시민의식 빛 발해

-성당 밖에선 시민들 지원 시위

첫날엔 시위대 대부분 굶어

여고생ㆍ직장인들 도시락 등 넣어줘

-촛불집회는 6ㆍ10의 새 버전

과거 폭력집회는 시대의 아픔

6개월 평화 촛불집회 엄청난 일

기춘(왼쪽) 당시 명동성당청년단체연합회장과 양권식 민주항쟁 당시 명동성당 보좌신부가 6일 오후 서울 중구 명동성당에서 1987년 6월을 회상하고 있다. 홍인기 기자
기춘(왼쪽) 당시 명동성당청년단체연합회장과 양권식 민주항쟁 당시 명동성당 보좌신부가 6일 오후 서울 중구 명동성당에서 1987년 6월을 회상하고 있다. 홍인기 기자

“오늘 우리는 전 세계 이목이 주시하는 가운데 40년 독재 정치를 청산하고 희망찬 민주국가를 건설하기 위한 거보(巨步)를 전 국민과 함께 내딛는다.” (6ㆍ10국민대회 선언문 중)

1987년 6월 10일, ‘민주헌법쟁취국민운동본부’(국본)는 서울 중구 대한성공회 대성당에서 6월항쟁의 신호탄을 쏘아 올렸다. 거리엔 시민들이 쏟아져 나왔다. 독재 타도를 부르짖었고, 민주주의 쟁취를 외쳤다. 경찰이 무차별 최루탄을 발사했고, 쫓기던 시민들은 명동성당으로 밀려들었다.

자의반 타의반으로 시작된 농성은 5박 6일, 110여시간 동안 계속됐다. 성당 바깥에선 학생들과 넥타이부대의 지원투쟁이 더해졌다. “현 정권에게 국민의 분노가 무엇인지를 보여주겠다”는 6ㆍ10국민대회 선언은 명동성당 농성을 기폭제로 삼아 항쟁으로 확대됐다.

민주화를 바라는 시민의 열망과 염원이 빚어낸 ‘무계획’ 농성. 73명이 시위 과정에서 크고 작은 부상을 입기는 했지만, 자진 해산 형태로 평화롭게 마무리됐다. 여기엔 현장에서 농성을 이끌었던 기춘(58) 당시 명동성당청년단체연합회장과 양권식(58) 당시 명동성당 보좌신부의 보이지 않은 노력이 있었다. 스스로를 “일꾼이자 창구”라 부르는 그들이 6일 오후 명동성당에서 다시 만나, 30년 전 당시 기억을 나눴다.

“당시 명동은 오늘날 광화문광장”

기춘(이하 기)=당시 명동은 대학가를 제외하자면, 시민들이 ‘진실’을 접할 수 있었던 유일무이한 공간이었어요. 광주학살 사진전 같은 게 대표적이죠. 매년 5월 명동성당에서 광주의 진실을 알리는 사진전을 열었는데, 당시만 해도 광주의 실상이 (언론을 통해) 일반 사람들에게는 알려지질 않았거든요.

양권식(이하 양)=사진전은 명동성당청년단체연합회가 중심이 됐죠.

기=부천경찰서 권인숙 성고문 사건(1986년) 규탄대회도 기억에 남네요. 명동성당에서 규탄대회를 열었는데, 그 때 함성이 지금 롯데백화점 있는 곳(약 500m)까지 들렸어요. 그 소리를 듣고 일반 시민이 집회에 동참하기도 했는데, 아마 서울에서 일반 시민이 자발적으로 집회에 참여한 건 그 때가 처음이었을 겁니다.

양=그땐 골목골목에 ‘백골단’이라는 체포조 경찰이 숨어있어서 시위대가 조금만 목소리를 높여도 금방 잡아갔어요. 그런 엄혹한 시절, 명동은 거의 유일하게 목소리를 낼 수 있는 공간이었고, 더구나 성당에는 공권력이 들어올 수 없었기 때문에 그 역할(분출 통로)을 충실히 했던 거죠.

기=그때 명동은 지금 광화문광장 정도로 이해하면 좋을 것 같네요. 명동을 민주화 혹은 진실을 위한 장소라고 인식했으니까요. 그래서 1987년 6월 10일 시민들이 얼떨결이든, 원해서든 명동으로 오게 된 거겠죠.

무계획 110시간 농성, 빛나는 시민의식

양=6월 10일 성공회 대성당에서 국본이 타종을 하면서 ‘박종철군 고문치사 조작 은폐 규탄 및 호헌철폐 국민대회’를 선언한 대표들이 (경찰에) 붙잡혀 갔어요. 저도 끌려갔었는데, 얼굴이 알려진 사람이 아닌 데다, 신부복을 입고 있어서 그랬는지 슬쩍 빠져 나와도 (아무도) 안 잡더라고요. (웃음) 명동성당으로 갔는데, 사람들이 (지금) 롯데백화점 있는 데까지 빼곡한 거에요. 정말 어마어마했습니다. 내가 사는 집(명동성당)으로 들어갈 수가 없을 정도였으니까.

기=첫날 저는 없었어요. 원래 행사 전후 집으로 들어가면 잡혀갈 수 있으니, 그날 저녁 국본 회의를 마치고 다른 데서 하루 자고 그 다음날 성당으로 갔죠. 그 땐 명동성당 농성을 예상하지 못했어요. 첫날 상황은 신부님께서 더 잘 아실 것 같네요.

양=교회도 대규모 시위대가 성당으로 모여든 것을 처음 경험했고, 더구나 시위대에 지도부가 있었던 것도 아니니까 당황했죠. 고(故) 김수환 추기경, 함세웅 신부, 김병도 신부가 모여서 “온 사람을 강제로 내쫓을 수 없고, 나가라고 한다고 나갈 수 있는 상황도 아니다”는 말만 반복하면서 그냥 최소한 관리만 하면서 지켜 보고 있었어요. 경찰은 성당을 포위한 채 통제를 쉽게 하려고 그러는 건지, 자꾸 성당 안으로 사람들을 몰아넣는 듯하고. 상황이 이렇게 됐으니 안에서는 질서나 규칙이 필요하겠다 그런 생각을 했죠.

기=아무런 약속도, 계획도 없는 상태였으니까요.

양=첫날은 학생 대표, 노동자 대표 이렇게 그룹별로 지도부를 꾸리는 일이 먼저였죠. 기춘 선생이 시위대 측, 내가 교회 측 입이 돼서 끊임없이 입장을 주고 받았어요. ‘기도하는 공간인 성당 건물 안으로는 들어가지 않는다’ ‘교회가 금과옥조로 여기는 비폭력 자세를 견지한다’ 같은 규칙을 세웠죠. 농성대중도 교회 입장을 금방 이해해주더라고요. 건강한 시민의식이 이런 어려움 속에서 빛을 낸 거죠.

기=다음날 아침 성당에 갔는데, 완전히 포위된 섬이더라고요. 성당 담벼락을 경찰들이 둘러쌌고, 그 안에 사람들이 빼곡하게 들어차 있는데, ‘나가는 순간 연행’이라는 소리가 들리니까, 나가지도 못하게 돼 버린 거죠. 꼼짝없이 견뎌야 하는 상황이 되니까 명동성당 바깥 을지로 일대에서는 ‘구해야 한다’는 시민들의 시위가 이어졌어요. 그 상황이 5박 6일 이어진 겁니다.

양=계성여고 학생들이 도시락, 편지, 꽃 보내준 일도 있었잖아요.

기=첫날 대부분이 굶었어요. (당시 성당에서 농성 중이던) 상계동 주민들이 먹을 것을 나눠줬는데, 어림 없었죠. 약한 사람들 위주로 조금씩 먹고, 대부분 굶었죠. 그런데 성당 바로 옆 계성여고 학생들이 도시락을 가져왔어요. 처음엔 턱없었죠. 근데 3일째 되는 날 도시락이 산더미처럼 쌓여 있더라고요. 전교생이 다 굶고 (자기 도시락을) 가져온 거에요. ‘오빠 언니 힘내세요’ 이런 편지들도 있었고. 남대문 시장에 상인들로 이뤄진 천주교신자공동체가 있는데, 거기서도 속옷이며 생리대며 이것저것 모아서 가져왔어요. 시민들이 김밥을 싸서 보내주기도 하고.

양=신부님이나 수녀님들은 드나드는 게 자유로웠으니까 전달책이 됐죠. 하여간 시민들이 수단방법을 가리지 않고, 뭐라도 하나 더 넣어주려고 방법을 강구했어요.

그리고 30년, 민주주의를 말하다

양=나와 기춘 선생 같은 실무자들은 밖으로 못할 얘기들이 많죠. 무엇보다 우리가 지금 말해야 할 건 그때 우리는 무엇을 지향했었고, 그 일을 통해 무엇을 얻었고, 우리는 어떤 변화된 삶을 살고 있는지 같은 것들이어야 합니다.

기=(당시 항쟁으로) 국민이 스스로 민주주의를 쟁취했다지만, 그 뒤로 또 정치가 말썽을 일으키고, 잠잠해지려고 하면 또 말썽을 일으켰어요. 어떻게 보면 악순환이 반복되고 있는 것 같지만, 또 그 과정에서 극악한 형태의 부정은 퇴출되고, 점차 약화되고 있잖아요. 민주주의가 발전해왔다는 것만큼은 인정해야죠. 사실 이번 촛불집회도 1987년 체제의 산물이잖아요. 개헌을 통해 만들어진 탄핵이라는 절차가 작동된 거니까.

양=언젠가 기 선생이 했던 얘기가 갑자기 떠오르네요. “세상에 오물을 끼얹는 사람도 있지만, 오물 속에 앉아서 오물을 씻어내는 사람도 있다”고, “누군가는 그 역할을 해야 한다”고. 그런 사람들이 사회를 발전시키는 동력인 것 같아요.

기=촛불집회는 (민주항쟁) 업그레이드 버전으로 봐도 될 것 같아요. 6개월 동안 시민들이 그 추운 광장에서 엄청난 절제력을 보여줬어요. 그런 점은 정말 스스로 자랑스러워 해도 된다고 봐요.

양=게다가 평화집회였잖아요, 수개월을 거치면서도.

기=‘무석무탄’이 아니라 ‘무탄무석’인 거죠. 최루탄이 없으면 돌멩이도 없다. (웃음)

양=저도 철거민 따라다니며 운동할 때 땅속에 묻혀도 보고 했는데, 제 신분이 신부인데도, 저도 모르게 손에 돌멩이를 쥐고 있더라고요. (폭력 집회는) 시대의 아픔인 거죠. 저는 종교인이잖아요. 그래서인지 6월 민주항쟁, 촛불집회 등을 보면서 ‘세상을 바꾸는 건 건강한 사람들의 선한 의지구나’라는 생각을 했어요. 사실 촛불은 사람들 하나하나의 마음에서 받들고 있는 정성이라고 봅니다.

기=하소연할 곳 없는, 가난하고 힘 없는 사람들이 더 많이 광장에 나오고, 또 우리가 껴안아 줄 수 있는 그런 세상이 오겠죠.

정리=신은별 기자 ebshin@hankookilbo.com

▶기춘(58) 당시 명동성당청년단체연합회장은 1984년 서울대 정치학과를 졸업한 뒤 천주교 정의구현사제단 간사, 천주교 사회운동협의회 사무국장을 역임했다. 이후 청와대 행정관을 거쳐 재외동포재단 사업이사로 활동했다.

▶양권식(58) 당시 명동성당 보좌신부는 도시빈민위원회 간사를 겸임하며 가난한 사람들 옆에 섰다. 이후 미국 가톨릭대학에서 공부한 뒤 종로구 세검정성당, 노원구 중계동성당을 거쳐 현재 송파구 가락동성당 주임신부로 있다.

1987년 6월, 민주주의를 외치는 시민들로 둘러싸인 명동성당 전경. 기춘 제공
1987년 6월, 민주주의를 외치는 시민들로 둘러싸인 명동성당 전경. 기춘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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