휴가철마다 대통령이 여행가방에 넣었다는 ‘책 리스트’가 발표되곤 했다. 하지만 그 책의 문구를 인용한 연설문을 본 기억은 없다. 왜 우리 대통령에게 책은 정상회의 기념촬영장에서 입는 한복처럼 정무적 상징에 그치는 걸까.
버락 오바마 전 미국 대통령 예를 들지 않아도, 지도자에게 책은 민의의 창구이자 참모 못지않은 조력자다. 아무리 경험 많고 지적인 권력자라도 ‘읽는 게 힘이다’. 문화예술계 명사 5인에게 차기 대통령이 읽으면 좋을 책 10권을 추천 받았다.
황현산 문학평론가·고려대 명예교수
① 주역 (김인환 번역·고려대출판부·2015)
흔히 ‘점치는 책’으로 오인 받지만 삶의 기저에 흐르는 보편 원리를 규명하려는 철학서다. 여러 사람에 의해 쓰여 연속된 구성을 찾기 어렵다. 그 구멍과 틈은 삶의 영역을 겨누고 있으며 거기서 파생되는 수많은 희로애락을 맛보고 다스리고 달래고 누리려는 노력으로 가득 차있다. 운명의 맥, 시간의 무의식을 짐작하는데 매우 좋은 책이다. 옛날 사람들이 군자는 시대를 알아야 한다고 말하는데 그 ‘시대를 아는데’ 중요한 책이라고 생각한다.
② 라모의 조카 (드니 디 드로 지음·고려대출판부·2014)
대통령이 쉴 때 읽을만한 풍자소설이다. 유명한 작곡가 장 필립 라모의 조카인 주인공은 기인이다. 빛을 보지 못한 예술가의 재능은 삶에서 발휘된다. 그는 다른 사람들의 희생을 통해 삶을 살아간다. 부자들을 이용해먹고, 이익을 볼 수 있다면 어떤 비위도 맞춘다. 18세기 지식인을 통해, 민주주의를 구성하는데 명석한 지도자가 얼마나 중요한가를 풍자적으로 전달한다. 복잡하게 쓰여, 읽는 동안 저절로 ‘두뇌회전’이 되는 건 보너스다.
정유정 소설가
③ 철학자의 늑대(마크 롤랜즈 지음·추수밭·2012)
괴짜 철학자가 11년간 늑대와 동거하며 쓴 일기다. 인본주의를 벗어나 “살아 있는 모든 것은 존재의 타당성을 지닌다”는 전제로 평등에 대해 논한다. ‘개체조절’이라는 미명하에 인간 편의로 동물을 학살하는 문제에 대해서 생각하게 하는 책이다. 간디는 동물을 대하는 태도를 보면 그 나라 수준을 알 수 있다고 말했다. 국가 지도자는 당장 정책부터 발표할 게 아니라, 아니라 폭 넓은 시야로 인본주의를 벗어나서 평등을 바라볼 수 있어야 한다.
④ 재레드 다이아몬드의 나와 세계 (재레드 다이아몬드 지음·김영사·2016)
국가간 빈부격차의 원인을 찾고 해답을 제시한다. 예상치 못한 부분에서 미래 성장 방향을 짚는 세계화 시대에 걸맞은 인문서다. 인류에 재앙에 온다면 그 원인을 국가간 불평등, 자원 남용, 핵으로 꼽는다. 재앙을 막기 위해 당연히 부국의 ‘노블레스 오블리주’ 실천을 강조한다. 부유한 나라가 가난한 나라를 도와야 최소한 테러 같은 재앙을 막을 수 있다는 말이다.
강맑실 한국출판인회의 회장ㆍ출판사 사계절 대표
⑤ 궁궐의 우리 나무(박상진 지음·눌와·2001)
정신 없는 일정으로 바쁠 대통령에게 답답한 일상의 숨구멍 같은 시간을 권하고 싶다. 바로 궁궐을 산책하는 일이다. 청와대에서 가까운 경복궁이나 창덕궁, 아니면 창경궁. 그곳에 가면 옛 궁궐 뿐만 아니라 수많은 나무들이 아름드리 자기 자리를 지키고 있다. 궁궐의 나무지도를 펼쳐 들고, 5월이면 하얀 꽃을 수북수북 피워내는 이팝나무 아래 앉아 이 책을 읽노라면, 정책 과제가 술술 풀릴지도 모른다.
⑥ 수호의 하얀 말(오츠카 유우조 글 아카바 수예키치 그림·한림출판사·2001)
이동하는 시간이 많을 대통령에게 자동차에 그림책을 쌓아 놓고 읽길 권하고 싶다. 그림책처럼 짧은 시간에 긴 울림을 얻을 수 있는 책이 또 있을까. 몽골 초원에서 살아가는 양치기 소년 수호는 하얀 말을 타고 말달리기 대회에서 1등을 한다. 하얀 말에 욕심이 난 원님은 소년을 죽을 만큼 때린 후 억지로 하얀 말을 뺏는다. 슬픔이 묻어 있지만 마두금의 탄생 배경을 통해 진정한 사랑에 대해 묻게 한다.
김원 한국학중앙연구원 교수
⑦ 좋은 전쟁이라는 신화(자크 파월 지음·오월의 봄·2017)
북핵ㆍ트럼프 선제공격론, 전술핵 배치 등 전쟁을 연상시키는 담론이 대선 국면에서 쏟아졌다. 촛불 이후에도 안보나 반북이 마치 당연한 것처럼 여겨지는 현재 정세에서 당선인에게 일독을 권하고 싶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오늘날까지 미국이 주도한 전쟁은 국익과 기득권 집단을 위한 것이었음을 이 책은 냉정하게 진단하고 있다. 냉전 시기 미국의 전쟁, 한국이 동조했던 전쟁의 실체를 인식하고 ‘다른 길’을 찾아야 하는 것이 신 냉전 시기 중요한 역사 인식일 것이다.
⑧ 혼자 살아가기(송제숙 지음·동녘·2016)
성적 소수자, 노동조합원, 여성에 대한 혐오와 배제를 당연한 것처럼 여기는 한국 사회에서 20~30대 비혼 여성으로 사는 삶이 왜 지난하고 고통스런 투쟁일 수밖에 없는지 보여주는 인류학 보고서이다. 대선 토론 과정에서 드러난 것처럼 소수자를 정상, 비정상, 찬성, 반대라는 이분법으로 섣불리 재단하고 ‘국민’이라는 테두리 밖에 두었던 지금까지의 정책에서 벗어나 그들의 지난한 삶을 이해하고 공감하는데 도움을 줄 수 있을 것이다.
천주희 새로운사회를여는연구원 연구원
⑨ 복지의 배신(송제숙 지음·이후·2016)
IMF 이후, 위기는 복지를 출현시켰다. 이 책은 외환 위기 당시 노숙인 문제, 청년 실업 문제에 주목해 국가 복지의 출현이 어떻게 신자유주의적 노동ㆍ복지 주체를 형성하는지 다룬다. 10여년 전 한국사회의 시대적 화두(가족해체, 공공근로, 벤처 창업 등)는 오늘날 ‘사회혁신’, ‘창조경제’ 등으로 다시 출현하고 있다. 이 책은 복지가 위기와 함께 어떻게 현장에서 만들어지고, 혜택을 받을 ‘자격 있음/없음’을 구분하며 주체를 생산하는지 보여준다.
⑩ 아내가뭄 (애너벨 크랩 지음·동양북스·2016)
최근 이슈로 떠오른 워킹맘의 과잉노동과 죽음, 남성 육아휴직은 우리에게 ‘아내’의 존재를 묻는다. ‘아내 가뭄’은 이런 물음에 실마리를 찾아줄 것이다. 여성 남성 모두 경제활동을 하지만, 여전히 여성에게는 바깥일과 집안일을 동시에 요구한다. 처음부터 아내로 태어난 사람은 없다. 하지만 남성을 생계부양자로 보는 사회에서 여성은 남편의 성공과 가족의 안녕을 위해 아내가 되기를 강요 받는다. 공사다망한 여성의 삶과 노동에 주목하지 않는 한 ‘아내 가뭄’은 계속 될 것이다.
정리=조태성 기자 amorfati@hankookilbo.com 이윤주 기자 misslee@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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