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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류문명 이끈 ‘이주’… 이제 그 시대는 끝났나

입력
2017.04.14 04: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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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자리 빼앗는다” 경제 논리에

“범죄와 테러” 안보 논리에

이주민 설 자리 잃어가

시리아에서만 500만명 난민 발생

난민 90%는 캠프 보호 못받아

인류는 공존과 공멸 갈림길에

지난달 28일 촬영된 요르단의 시리아 접경지역 자아타리 난민캠프에 머물고 있는 시리아 난민들의 모습. 자아타리=AFP 연합뉴스
지난달 28일 촬영된 요르단의 시리아 접경지역 자아타리 난민캠프에 머물고 있는 시리아 난민들의 모습. 자아타리=AFP 연합뉴스

인류의 역사는 사실상 이주(移住ㆍ유목)와 정주(定住ㆍ농경)의 드라마였다. 인류는 약 150만~200만 년 전, 아프리카 중부 사바나 지대를 떠나 미지의 땅으로 옮겨가기 시작했다. 더 나은 생존 환경과 풍족한 먹거리를 찾아, 무수한 생존의 위험을 넘어, 한 곳에 안주하지 않고, 낯선 것에 대한 호기심과 모험심에 이끌려 끊임없이 이동했다. 이에 비해 고대문명은 불과 5,000~8,000년 전, 가축화와 작물화에 성공한 인류가 ‘비옥한 초승달’ 지역에 정주한 후에야 탄생했다. 자크 아탈리의 ‘호모 노마드(Homo Nomad)’에 따르면, 인류문명의 실마리는 대부분 유목민의 창안물이며, 한 곳에 머물며 살던 정주민이 발명한 것은 고작 국가와 세금과 감옥과 총 뿐이었다. 인류 사회의 DNA는 본디 그렇게 떠돌아다니며 교류하고, 모험하며 새로운 환경에 적응하면서 창조적으로 진화해왔다.

초기 인류의 이주가 비교적 자발적인 것이었다면, 오늘날 국경 넘어 발생하는 다양한 이주는 대체로 ‘비자발적’ 특성을 띤다. ▦기후 변화나 천재지변 등으로 인한 생태적 이주 ▦정치적 불안정이나 전쟁 및 분쟁, 내전 등으로 인한 정치적 이주뿐만 아니라 ▦식량과 노동시장 등 자원 배분과 부의 구조적 불평등이 낳은 경제적 이주 ▦혈연, 언어, 종교, 문화적 차이에서 비롯한 문화적 이주 등 양상도 매우 다양하다.

그 중에서도 난민은 가장 비참한 비자발적 이주에 속한다. 유엔난민기구(UNHCR)의 ‘강제이주민 글로벌 동향 2015’에 따르면, 2015년 강제 이주민 수는 약 6,500만 명으로, 지구촌 인구 중 113명 중 한 명이 난민인 것으로 나타났다. 특히 국외 난민 중 절반은 시리아, 아프가니스탄, 소말리아 등 중동-아프리카 3개국에서 발생했다. 모두 21세기에 일어난 전쟁 난민들이다.

2010년 ‘아랍의 봄’ 이후, 민주화의 퇴행적 과정에서 발생한 시리아 내전은 주변 아랍국 및 유럽행 탈출 러시로 이어지면서 지난 6년 간 급기야 500만 명이 넘는 난민을 양산했다. 2012년 내전 초기 시아파인 시리아 정부군과 수니파인 반정부 세력 간의 교전으로 인한 정치적 불안정으로 약 50만 명의 난민이 발생했고, 2013년 반정부 세력 간 분열로 이슬람과 비이슬람(쿠르드) 반군 사이의 교전이 확산되면서 난민은 230만명까지 늘어났다. 수니파 무장단체 이슬람국가(IS)가 독립국가 창설을 선포한 2014년 6월 이후 시리아 내전은 이라크 지역까지 확대되고, 미국과 미국의 우방 연합국(바레인, 사우디아라비아, 요르단, 아랍에미리트 등)이 IS에 대한 공습을 단행하면서 현재까지 500만 명이 넘는 시리아 난민이 발생했다. 시리아인 다섯 명 가운데 한 명이 나라를 떠난 셈이다.

더 큰 비극은 난민 가운데 10%만이 터키, 레바논, 요르단 등 주변 아랍국에서 설치한 난민캠프에서 의료, 교육 서비스 등 약간의 지원을 받고 있으며, 90%는 이조차도 없이 난민캠프 밖에서 생존에 필요한 최소한의 조건도 보장되지 않은 삶을 살고 있다는 점이다. 이들 대부분은 주로 대도시 저임금 불법 노동자로 연명하거나 아동 노동학대, 조혼 강요, 나아가 각종 범죄에 노출돼 있다. 난민들이 목숨을 걸고 유럽으로 가기 위해 ‘죽음의 바다’로 불리는 지중해를 건너는 데에는 이유가 있는 것이다. 이 같은 실태는 2015년 9월 세 살배기 아일란 쿠르디의 죽음으로 주목 받기도 했다.

하지만 난민문제에 관한 각국 입장은 조금씩 다른 상황이다. 독일의 메르켈 총리는 인도주의에 입각해 기본적으로 난민을 수용하겠단 입장이지만, 몇몇 국가의 극우세력은 자국의 정치ㆍ사회적 안정을 위해 난민 배척을 주장하고 있다. 우리나라의 경우 무관심 속에 시리아인 약 200명이 ‘준난민’ 신분으로 들어와 있다.

자본과 노동의 자유로운 이동은 교통수단과 정보통신의 발달과 함께 인간과 문화의 흐름을 크게 바꾸어 놓았다. 디지털 노마드라는 신인류의 탄생에 이르기까지 지구촌에서는 이주의 글로벌화, 이주의 가속화와 함께 이주의 차별화, 이주의 정치화도 동시에 진행 중이다. 특히 2001년 9ㆍ11 테러 이후, 이주민은 안보에 위협적인 존재로 낙인 찍혔다. 이주민이 자국민의 일자리를 빼앗고, 복지에 무임승차한다는 경제 논리와 그들이 범죄와 테러와 폭동으로 안보를 위협한다는 안보 논리에 휘둘려 이주자들에 대한 규제, 감시, 구금, 추방은 정당화돼 왔다. 이로 인해 호모 노마드가 수 천 수 만년 간 발전시켜온 이주와 교류를 통한 포용적 문화 다양성, 사회 통합, 약자 보호, 쫓겨나지 않고 소속해 정착할 권리, 낯선 이웃에 대한 환대 등 인류 공영의 생존 유전자는 더 이상 설 자리가 없어졌다.

그러나 이주와 정주, 유목과 농경, 떠남과 머묾, 초국가와 국가 사이의 여러 갈등은 전혀 새로운 현상이 아니다. 둘 사이가 조화와 상생, 대화와 융합이라는 공존(共存)의 법으로 나아가느냐, 아니면 경쟁과 적대, 갈등과 분쟁이라는 공멸(共滅)의 길로 나아가느냐는 전적으로 우리의 선택에 달려있다. 인류는 모두 이주자인데, 환대가 넘쳐나던 이주의 시대는 끝이 난 것일까?

최창모 건국대 융합인재학부 교수ㆍ중동연구소 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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