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거리 가수 새미
찰스 키핑 글, 그림ㆍ서애경 옮김
사계절 발행ㆍ32쪽ㆍ1만500원
벚꽃이 피기도 전인데 ‘벚꽃 엔딩’을 기다린다. 언제부터인가 노래 한 소절 변변히 쫓아 부를 줄 모르는 음치가 되어버렸는데, 어느 봄날 이 노래가 입에 착 붙었다. ‘모름지기 음치도 흥얼거릴 수 있어야 ‘노래’라고 할 만한 것이다’라고 흐뭇해하면서. 리듬이나 박자가 흥겨운 것은 물론, 가사의 첫 구절이 ‘그대여 그대여 그대여 그대여 그대여’라고 만만하게 시작해주는 것이 고맙다. ‘오늘은 우리 같이 걸어요 이 거리를’이라든가, ‘몰랐던 그대와 단 둘이 손 잡고’라든가, ‘흩날리는 벚꽃 잎이/ 울려 퍼질 이 거리를’ 같은 노랫말은 과하지 않게 시적(詩的)이다. 사내들 넷이서 벚꽃길 산책을 나갔다가 다정한 커플들의 위세에 눌려 어서 꽃이 지길 바라며 만든 ‘벚꽃 엔딩’이라지만, 무엇보다도 이 노래를 들을 때면 가수의 몸에서 출렁거리는 봄밤의 쓸쓸한 행복감이 사무치게 밀려든다.
찰스 키핑의 그림책 ‘길거리 가수 새미’의 주인공도 노래 부를 때의 행복감을 한껏 즐긴다. 거리의 지하도 속에서 북치고 노래하고 춤추며, 자기의 공연을 즐기고 사랑하는 이들이 건네는 박수와 동전으로 살아가는 새미의 조촐한 행복은 인기 가수로 키워주겠다는 서커스 단장의 꾐에 빠져 팔자에 없는 어릿광대 짓을 하면서 부서지는데, 우연히 흥행업자에게 발탁되면서 더 큰 불행을 겪는다. 철저히 기획된 아이돌 가수로 급부상하고, 그러자마자 새로운 스타에게 자리를 내어주며 쇼비즈니스의 소모품이 된 것이다.
어린이와 함께 보는 그림책으로는 너무 우울하고 괴기스럽다는 평을 듣는 키핑의 작품 중 ‘길거리 가수 새미’도 예외가 아니다. 일일이 색을 분리해 석판으로 찍어낸 이미지 위에 따로 선을 그려 윤곽을 만들고 왁스나 스펀지 등을 이용해 다양한 효과를 낸 이른바 ‘키핑 스타일’이 풍성하게 펼쳐진다. 엄청난 규모의 스타디움 공연 장면은 팝아트에 가깝다. 펼침 장면 왼쪽에는 비현실적으로 작고 화려한 형광 컬러 박스에서 연주하는 새미, 오른쪽 장면에는 넋을 잃고 열광하는 수많은 얼굴로 가득 차있다. 바로 이 장면에서 새미는 관중들이 자기 노래를 듣고 즐기며 환호하는 것이 아니라 유명세와 공연 그 자체에 열광한다는 사실을 얼핏 깨닫는다.
주인공이 겪는 비참한 자각은 텔레비전 카메라 앞에서 립싱크 상황을 거듭 겪으면서 더욱 깊어지고, 저택의 소유자가 되어서도 해소되지 않는다. 곧 새미를 대체하는 새로운 스타가 기획되고 조명되면서 철저히 잊혀진 스타 가수는 집과 재산을 모조리 투자해 자기 이름의 주인공이 등장하는 우주 영화 ‘우주 개척호를 타고 온 새미 스트리트싱어’를 만들고 마침내 빈털터리 신세로 돌아간다.
옛 거리로 돌아간 새미는 자기 노래를 진정으로 즐겼던 친구들-거리의 개들과 고양이들과 아이들이 알아봐준 덕분에 다시 노래하며 일어선다. 지하도를 배경으로 등장한 새미가 등에는 심벌즈 붙은 북을 메고 가슴에는 아코디언을 걸고 트럼펫과 무릎 심벌즈로 연주하며 노래하고 춤추면서 진정으로 흥겨움에 차 있는 모습은 첫 장면과 같고도 다르다.
‘자기 기쁨 없이 노래하는 자는 망하리라’는 잠언을 강렬하고도 깊이 있게 풀어낸 키핑은 대체로 자전적인 작품을 만들지만, 이 그림책만큼은 자신이 겪지 않은, 어쩌면 겪을 수도 있었을 일을 다뤘다. 일간지 만화 연재로 안정적인 일을 하다가 ‘마음에 들지 않는 일을 하는 것은 영혼을 망친다’며 일러스트레이터로 길을 바꾸었고, 예순 네 해를 살고 벚꽃 피는 봄에 세상을 떠났으나 생존해 있는 존 버닝햄ㆍ브라이언 와일드 스미스와 함께 영국 3대 그림책 작가로 손꼽힌다.
이상희 시인ㆍ그림책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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