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정 직종 또는 자격증을 준비하다 방향을 선회한 젊은이들이 중고장터에 내놓은 물건엔 남다른 아쉬움이 묻어 있다. 공무원 시험을 포기하며 내놓은 수험서적이나 아나운서를 꿈꾸며 구입한 화려한 정장, 속기사 시험을 앞두고 두드렸을 키보드와 학원비를 감당하지 못해 내놓은 네일아트 재료까지, 구매가와 판매가의 차액만으로 값어치를 매길 수 없는 열정과 노력, 인고의 눈물이 그 안에 담겼다. 냉혹한 현실을 버텨 내기에 가진 돈과 시간이 모자랐던 아쉬움의 뒤끝, 불안과 초조를 극복하지 못한 스스로에 대한 원망은 이제 훌훌 털고 다른 이의 꿈을 응원하고 있다. 구매자에게 친절하고 상세한 조언을 건네는가 하면 무리한 가격 흥정마저 애잔한 마음으로 수용한다. 한때 절박했던 자신의 모습을 보는 듯 해서다. 눈물의 중고매물과 함께 처분하고픈 청춘들의 한숨 서린 이야기를 모았다.
#1 비정규직 차별에 무너진 아나운서의 꿈
아나운서 자켓, 원피스, 구두 팔아요! (새것들이에요ㅠㅠㅠ)
이제는 아나운서 준비를 안 해서 팝니당!
김민영(25)씨는 지난달 12일 인터넷 카페 ‘아도사(아나운서에 도전하는 사람들의 모임)’에 베이지색 원피스, 구두와 함께 다홍색 재킷을 매물로 내놓았다. 대학시절 스피치 동아리 활동에 이어 6개월간 학원을 다니며 키워 온 아나운서의 꿈을 접었기 때문이다. 김씨는 “어렵게 구매한 데다 카메라 앞에서 얼굴을 잘 받쳐줘 애착이 컸지만 계속 갖고 있으면 볼 때마다 미련이 남을 것 같아서 팔기로 했다”고 말했다.
의상도 의상이지만 그동안 투자한 시간과 노력, 비용을 생각하면 김씨 가슴은 미어진다. 임대료와 생활비 등 비용이 엄두가 안나 서울행을 포기하고 경남 양산에서 부산에 있는 학원을 매주 두 차례씩 오갔다. 아나운서가 워낙 취업경쟁이 치열한 직종인 데다 몇 백만 원에 달하는 학원비와 메이크업 비용을 부모님께 지원받다 보니 부담감과 초조함 외에 죄송한 마음까지 겹쳤다. 그래서 더 악착같이 준비했다. 학원 외에도 하루 4시간씩 스피치 연습을 했고 토익과 한국어 공부도 놓지 않았다.
아이러니하게도 아나운서의 꿈은 방송 일을 접하면서 사그라지기 시작했다. 천신만고 끝에 라디오 리포터 시험에 합격했지만 비정규직이었다. 기대 이하의 임금수준에 미래에 대한 불안감까지 겹치면서 김씨는 결국 화려한 아나운서 대신 일반 기업체 취업이라는 현실적인 길을 선택했다.
#2 나이 때문에…
원피스 5, 재킷 2, 구두 1 팝니다(아나운서 준비생들 도움 될 거에요)
사이즈는 조금 큰 55, 작은 66정도로 생각하시면 돼요
2년 전 스포츠 아나운서의 꿈을 포기한 장유미(29)씨 역시 2년여의 준비 기간에 구입한 여러 벌의 아나운서 의상과 구두를 한꺼번에 처분했다. 관공서 인턴을 하며 학원비를 마련하는 등 꿈을 향해 거침없이 달려온 그가 끝내 넘지 못한 장애물은 나이였다. 장씨는 “다른 지망생들에 비해 늦게 시작한 탓에 경쟁에서 밀린 것 같다”며 “결혼이나 임신을 하면 활동에 제약이 많기 때문에 업계에선 어리고 예쁜 지원자를 선호하는 분위기”라고 말했다.
비록 자신은 포기했지만 다른 이의 꿈을 응원하는 마음이 게시물 곳곳에서 읽힌다. 장씨는 인터넷 카페 ‘중고나라’에 매물을 올리며 의상마다 미세하게 다른 사이즈와 착용감을 상세히 소개했다. 얼굴색과 조화가 중요한 만큼 구매자의 색감 판단을 돕기 위해 다양한 필터를 활용해 제품 사진을 찍는 정성을 들였다. 장씨는 “아나운서 지망생에게 옷값이 얼마나 큰 부담인지 잘 알기 때문에 가격을 깎으려는 사람들을 보면 안타깝고 애잔한 마음이 들었다”며 “몇 천 원이지만 택배비를 빼주거나 구두를 얹어 주기도 했다”고 말했다.
#3 진통제 먹으며 키워온 속기사의 꿈
타자 칠 때마다 너무 아파서 눈물을 머금고 포기했습니다 ㅜ
열심히 준비하시는 분이 구매해 주셨으면 좋겠습니다
속기사 준비를 포기한 문지혜(29)씨는 아직 팔리지 않은 키보드를 볼 때마다 다시 시작하고 싶은 마음이 굴뚝 같다. 그러나 빠른 속도로 키보드를 두드리기엔 문씨의 손가락이 너무 약했다. 선천적으로 관절이 약한데다 혈관까지 얇아 약간의 무리에도 손가락이 붓고 통증이 찾아왔다. 손가락이 구부러지지 않아 연습이 불가능한 상황도 반복됐다. 그렇게 1년여 동안 진통제를 먹어 가며 연습을 이어 갔지만 “손가락을 움직이지 않는 것 외에 치료 방법이 없다”는 의사의 소견을 듣는 순간 무너졌다. 문씨는 “속기사가 돼서 부모님께 은혜를 갚고 싶은 마음뿐이었는데 포기할 수밖에 없다니 속이 많이 상했다”고 말했다.
속기사의 꿈을 접은 후 삶은 막막했다. 1년 반 동안의 방황과 세 번의 취업, 퇴직을 거쳐 실내건축디자인을 배우고 있는 문씨는 얼마 전 200만원 넘게 주고 구입한 키보드를 20만원에 내놓았다. 문씨는 “속기사에 미련이 남아 팔지 말지 고민이 많았다”며 “물건을 진심으로 아껴 줄 사람이 사 갔으면 하는 바람”이라고 말했다.
#4 재료비에 학원비까지, 비용부담 때문에 결국…
네일 아크릴파우더 엄청 싸게 팔아요!(거의 새 제품이에요)
친구랑 같이 실기 준비하다가 포기했거든요 ㅠㅠ
박정원(26)씨는 고교시절부터 관심을 가져 온 네일아트 공부를 얼마 전 포기했다. 학원 수강료와 재료비 등 국가자격증 취득까지 들어갈 300만원가량의 비용을 도저히 감당할 길이 없었다. 미술학원 강사나 커피숍 아르바이트를 통해 재료는 겨우 마련했지만 자격증 시험을 통과하는 데 독학으로는 역부족이었다.
제대로 된 시험준비가 필요한 상황에서 맞닥뜨린 비용의 압박 때문에 오랜 꿈을 접어야 했던 박씨의 마음은 착잡했다. 그는 “복잡한 감정이 들어 그냥 버릴까도 생각했지만 제 경험에 비추어 이 길을 준비하는 사람들이 조금이라도 싸게 가졌으면 하는 마음에 팔기로 했다”고 말했다. 새것이나 다름 없는 네일아트 세트를 3분의 1 가격에 내놓은 박씨는 “상대방의 절박한 심정을 감안해 웬만하면 좋은 가격에 넘길 생각”이라고 말했다.
박서강기자 pindropper@hankookilbo.com
김주영기자 will@hankookilbo.com
권도현 인턴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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