트로피의 수난 시대다. 시상자가 위엄과 영예를 한껏 얹어 건네줬건만 수상자는 받은 자리에서 곧바로 팔아버리거나 두 쪽을 내버린다. 좋게 보면 권위(주의)로부터의 유쾌한 탈주요, 나쁘게 보면 경망스럽기 짝이 없는 무례다. 어이 없는 실수에 휩쓸려 주인도 아닌 엉뚱한 이들의 품에 안기느라, 또는 인정 받지 못한 주인의 손에 매달려 있느라 그 빛나는 광채를 잃어버리는 트로피도 있었다. 이 모든 일이 공교롭게 지난달 세계 각처에서 벌어졌으니, 트로피 입장에선 ‘잔인한 2월’이라 할 만하다.
팔려 간 트로피
지난달 28일 열린 2017 한국대중음악상 시상식에서 최우수 포크 노래상을 받은 뮤지션 이랑(31)은 수상 소감 발표 도중 관객을 상대로 트로피를 경매에 부치는 돌발 행동을 했다. “친구가 돈, 명예, 재미 세 가지 중 두 가지 이상 충족되지 않는 시상식은 가지 말라고 했는데 시상식이 재미도 없고 상금도 없다. 명예는 정말 감사하다”고 운을 뗀 그는 올해 소득이 1월 42만원, 2월 96만원에 불과하다며 자신의 월셋값 50만원을 최저 호가로 트로피 경매를 시작했다. 그의 이름과 수상곡(‘신의 놀이’)이 새겨진 트로피는 “메탈릭한 디자인에 큐브 형태가 인테리어 소품으로 훌륭하다”는 ‘경매사’ 이랑의 너스레 속에 곧바로 관객에게 팔리는 신세가 됐다.
전업 예술인 70%가량의 월 소득이 100만원에 못 미치는 현실과 맞물려, 예술적 성취를 격려하는 자리에서 대놓고 ‘돈을 밝힌’ 이랑의 행위를 두고 갑론을박이 벌어졌다. 한쪽에선 오로지 음악성만을 따지는 ‘한국의 그래미상’을 표방하면서도 재정난에서 좀체 벗어나지 못하는 - 그래서 수상자에게 상금을 주지 못하는 - 한국대중음악상의 사정을 감안할 때 이랑이 “재미도 상금도 없다”는 발언과 행동을 한 것은 무례하다고 지적한다. 맞은편에선 “본업이 생업일 수 없는 인디 뮤지션들의 속앓이를 표출한 의미 있는 행위”라고 평가한다.
한 가지 지적할 것은 이랑의 행위가 즉흥극이 아니라 사전 계획된 퍼포먼스로 보인다는 점이다. 그의 트로피 경매는 최저 호가로 금세 낙찰됐는데, 50만원을 죄다 현금으로 지불한 낙찰자는 다름 아닌 이랑의 수상곡 제작에 참여한 인디 뮤지션 김경모였다. 수미일관한 이랑의 마무리 발언 또한 잘 짜인 퍼포먼스의 증거다. “저는 명예와 돈을 얻어서 돌아가겠습니다. 재미는, 나는 없었지만, 보는 분들이 재미있으셨으니까… 다들 잘 먹고 잘 사세요.” 뒤에 남은 논쟁과 무관하게, 이랑에게 이날 시상식은 ‘해피엔딩’이었던 셈이다.
동강난 트로피
지난달 12일(현지시간) 열린 ‘원조’ 그래미상 시상식에선 트로피가 보다 과격한 방식으로 수난을 당했다. 그래미 본상 중 하나인 ‘올해의 앨범상’을 받은 영국 가수 아델(29)이 “내가 아니라 비욘세가 이 상을 받아야 한다”는 수상 소감과 함께 양손으로 트로피를 두 동강 낸 것이다. “비욘세와 트로피를 나누기 위해서 부러뜨렸다”는 게 시상식 후 아델의 설명이니, 나팔 스피커가 달린 축음기 모양의 트로피 장식물을 쪼개 버린 아델의 충격적 퍼포먼스는 ‘선의’에서 비롯했다고 보는 것이 옳을 성싶다.
한편 한국일보 음악 담당 양승준 기자는 “아델이 정말 트로피를 부러뜨렸을까”라는 합리적 의심을 제기했다.(▶관련기사) 아델이 트로피를 동강 낸 순간을 찍은 사진을 보면 힘을 가해 부러뜨렸다고 볼 만한 흔적을 찾기 어렵다는 것이다. 양 기자가 한국인 최초 그래미상 수상자인 음반 엔지니어 황병준씨에 문의했더니 그래미 트로피 장식물은 나팔 스피커와 축음기 본체가 나사 형식으로 이어져 돌려 뺄 수 있는 구조라고 한다.
손 바뀐 트로피
이랑이나 아델의 경우와 달리, 지난달 26일(현지시간) 미국 로스엔젤레스에서 열린 아카데미영화상 시상식은 ‘각본 없는’ 트로피 수난사였다. 시상식 마지막 순서이자 하이라이트인 작품상의 수상작이 잘못 호명되는 바람에, 필름 릴 위에 장검을 짚고 선 기사의 모습을 형상화한 금색 트로피는 2분 25초의 시차를 두고 ‘라라랜드’에서 ‘문라이트’로 건너갔다.
명작 ‘우리에게 내일은 없다’(1967)에서 함께 열연했던 여배우 페이 더너웨이(76)와 함께 작품상 발표자로 나선 원로배우 워렌 비티(80)는 “(수상작이 적힌)봉투를 열었더니 ‘라라랜드, 엠마 스톤’이라고 적혀 있어 한참을 들여다봤다”고 해명했다. 작품상 수상 명단에 영화 제목뿐 아니라 배우 이름도 있어 의아했다는 것. 엠마 스톤은 작품상 발표 직전 여우주연상을 받았던 터라 의구심은 더욱 컸을 것이다.(인상적인 사실은 비티가 공개 망신을 당하는 와중에도 성급히 ‘라라랜드’를 호명했던 파트너 더너웨이를 탓하지 않았다는 점이다.)
지상 최고 시상식을 자부해온 아카데미상의 명성에 먹칠을 한 이 대형 해프닝은 무대 뒤에서 발표자에게 수상작 봉투를 전달하는 일을 담당한 회계사들의 실수에서 비롯한 것으로 밝혀졌다. 이들이 소속된 국제 회계컨설팅회사로 아카데미상 초기부터 수상작 선정 투표를 담당해온 프라이스워터하우스쿠퍼스(PwC)는 공식 사과했다.(▶관련기사)
야유 받은 트로피
영국 축구 명가 맨체스터유나이티드(맨유)의 스타 플레이어 웨인 루니가 지난달 27일 동료들을 대표해 잉글리시풋볼리그(EFL)컵 우승 트로피를 들어올린 것을 두고 뒷말이 무성하다.
맨유가 런던 웸블리스타디움에서 사우스햄튼을 3-2로 꺾은 이날 결승전에서 루니는 내내 벤치에 앉아 있었다. 이날 경기의 주장을 맡아 팀의 구심점 역할을 한 선수는 크리스 스몰링이었고, 승리의 주역은 헤딩 결승골을 포함해 두 골을 넣으며 경기 최우수선수(MVP)로 선정된 ‘이적생’ 즐라탄 이브라히모비치였다. 그럼에도 맨유는 관중석에 나란히 도열한 선수단 한가운데서 가장 먼저 트로피를 높이 치켜들며 승리를 자축하는 역할을 루니에게 맡겼다.
루니가 맨유의 주장이자 최근 구단 역사상 최다인 250골을 넣은 ‘레전드’라는 점을 감안하면 당연한 처사. 하지만 올 시즌 ‘팀의 방해물’이라는 혹평을 들을 만큼 부진한 경기력을 보이는 가운데 중국 이적설까지 돌고 있는 터라, 루니의 일거수일투족에 불편한 심기를 보이는 팬도 적지 않은 게 사실이다. 야유를 받고 있는 ‘캡틴’에게 들리다 보니 트로피도 영예의 광채를 조금 잃은 모양새다.
이훈성기자 hs0213@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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