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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중이 독재를 지지해도 민주주의인가

입력
2017.03.03 04: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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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달 28일(현지시간) 대통령으로서 첫 의회 연설에 나선 트럼프. 다들 트럼프를 ‘기괴한 괴물’처럼 묘사하는데 열 올리고 있지만, 웬만한 나라마다 ‘새끼 트럼프’는 하나씩 다 있다. EPA 연합뉴스
지난달 28일(현지시간) 대통령으로서 첫 의회 연설에 나선 트럼프. 다들 트럼프를 ‘기괴한 괴물’처럼 묘사하는데 열 올리고 있지만, 웬만한 나라마다 ‘새끼 트럼프’는 하나씩 다 있다. EPA 연합뉴스

전세계 수많은 트럼프 등장은

민중의 변심이 만든 현상

일상에서 변심의 계기를 찾고

정치ㆍ사회적 해소 통로 마련

트럼프주의 극복할 수 있어

미국 대선이 막바지에 접어든 지난해 11월 초 이스라엘의 일간지 하레츠는 흥미로운 칼럼을 게재했다. 탈세와 여성비하 발언 등 계속되는 악재에도 불구하고 ‘러스트 벨트(Rust belt·미 중동부 쇠락한 공업지대)’의 백인 노동자들을 비롯해 백인 기층민들 사이에서 트럼프의 인기가 여전한 것을 보니 히틀러가 왜 독일에서 집권했는지 이제야 이해가 된다는 논조였다.

문제는 트럼프가 미국만의 특수현상이 아니라는 점이다. 중동부 유럽의 정치권에서 톡톡 튀는 트럼프 유의 정치 신인들에 대한 뉴욕타임스의 지난달 24일자 기사는 ‘트럼프주의’가 지구 도처에서 발견되는 광범위한 현상임을 알려준다. 동유럽에는 반유대주의를 구태여 숨기려고 들지도 않는 헝가리의 빅토르 오르반 총리, ‘교권 파시즘’에 성큼 다가선 폴란드의 야로스와프 카친스키 법과정의당 당수처럼 잘 알려진 트럼프의 선구자들이 있다.

그런데 카친스키와 오르반뿐이 아닌 것이다. 라트비아에서 폴란드, 체코를 거쳐 크로아티아와 세르비아에 이르기까지 준동하는 ‘새끼 트럼프’들의 존재는 ‘트럼프주의’가 동유럽에서 얼마나 뿌리 깊은가를 잘 보여 준다. 그럼 ‘트럼프주의’는 동유럽과 같은 후진국만의 특수한 현상인가?

서유럽도 간단치는 않다. 영국 일간 가디언을 읽는 자신이 무슨 ‘인민의 적’이라도 되는 양 흘겨보는 눈초리에 불안했다는 한 영국 친구의 소식은 ‘브렉시트’의 지지기반이 만만치 않음을 말해 준다. 제레미 코빈이 이끄는 영국 노동당은 1980년대 이래 최약체를 면치 못하고 있다.

극우 정당 인민전선이 약진하고 있는 프랑스 대선 정국이나 모스크를 ‘나치 성전’이라 비유하고 코란의 판매금지조치를 공언하고 있는 네덜란드 극우파가 여론조사에서 1당의 지위를 차지하고 있는 것은 어떤가?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스칸디나비아도 더 이상 예외는 아니다.

민주적 절차를 거쳐 다수의 뜻으로 1930년대 파시즘 체제로 회귀하는 듯한 지구촌의 정치는 “대중이 독재를 지지하면 그것은 민주주의인가, 독재인가?”라는 대중독재의 문제의식을 다시 환기시킨다. 이렇게 보면, 성난 민중이 촛불을 들고 거리로 뛰쳐나와 박근혜 대통령 탄핵 정국을 만든 한국의 경우가 오히려 예외인 것처럼 생각된다.

그러나 촛불집회의 바로 그 행렬 속에는 박정희의 ‘경제적 자식’과 ‘생물학적 자식’을 연달아 대통령으로 뽑은 민중들이 있다는 것도 직시할 필요가 있다. 불의에 저항하는 숭고한 민중에 대한 불경죄라고 해도 할 수 없다. 박근혜 대통령 탄핵 지지율과 지난 대선 당시 문재인 후보에 대한 지지율의 차이는 대략 그 변심의 크기라 해도 좋을 것이다. 이명박 후보와 정동영 후보의 지지율 격차를 생각하면 변심의 규모는 훨씬 더 크다.

알트 뤼트케 엮음

Everyday Life in Mass Dictatorship: Collusion and Evasion

(Mass Dictatorship in the 20th Century)

Houndmills: Palgrave/Macmillan, 2016

팔그레이브ㆍ맥밀란 ‘대중독재’ 시리즈 총 5권 중 마지막으로 나온 이 책은 민중의 이 ‘변심’을 어떻게 읽어야 하는지에 대한 다양한 역사가들의 제안을 담고 있다. 지구촌 곳곳에 만연한 ‘트럼프주의’에 대한 승리의 가능성은 ‘불의에 저항하는 올곧은 민중’이라는 규범적 도덕주의가 아니라 소소한 자신의 일상적 욕구에 따라 권력과 담합하거나 비껴 가면서 세상을 전유해 온 민중의 역사적 ‘변심’을 이해하는 데서 비롯된다.

일상사의 개척자이자 책의 편집자인 알프 뤼트케가 서문에서 잘 지적했듯이, 권력과 지배는 다양한 사회적 힘과 실천들이 경합하는 열려 있는 공간이다. ‘변심’은 권력에 비해 자신을 실현할 수 있는 수단과 자원이 빈약한 피지배자들이 힘의 비대칭성을 이겨 내고 세상을 전유하기 위한 고투의 흔적일 뿐이다. 이렇게 볼 때, 독재체제에 대한 피지배자의 협력과 담합조차도 단순한 복종의 흔적이기보다는 권력의 의도를 전유하는 다양한 전술이 된다.

예컨대 강제징용은 일본 제국주의의 동원체제의 일환으로 강제되었지만, 징용된 식민지 조선의 노동자들에게 그것은 식민지의 척박한 삶의 곤궁함을 벗어나기 위한 기회이기도 했다. 이탈리아 파시즘 치하의 노동자들에게서 보이듯이 표면적 복종의 언어는 냉소와 무관심 그리고 멸시의 태도를 감추는 보호막인 경우도 많았다. 강제 동원된 야외의 정치 집회는 많은 청소년들에게 끔찍한 억압이기보다는 학교의 억압에서 벗어나는 해방과 일탈의 기회로 환영받았다.

누구나 다 아는 사소한 품질 불량의 소비재에 대한 동독 소비자들의 대규모 항의 편지는 사회주의의 언어로 가득 찼지만, 규정상 인민의 불만에 반드시 답을 해야만 했던 관료들에게 수만 통의 답장을 강요해 그들의 일상을 고통스럽게 만드는 통쾌한 복수였다. 반대로 군수공장의 빈터에서 텃밭을 가꾼 나치독일 노동자의 행위는 일상의 욕구를 충족하기 위한 극히 개인적 행위였지만, 결과적으로 전시경제에 힘을 보태 나치의 전쟁동원체제가 오래 지속되는 계기이기도 했다.

권력에 대한 민중의 변심을 이처럼 일상사의 촘촘한 그물망으로 건져서 하나하나 파헤쳐 보면, 저항과 복종, 담합과 기피, 협력과 불복종의 규범적 이분법은 현실의 비판을 이겨 내기 힘들다. 지구 곳곳에서 각양각색의 트럼프주의 지지자들의 ‘변심’을 기대할 수 없다면, 세상을 이겨 내기가 더 힘들 것이다.

필요한 것은 저항과 복종을 근거로 민중을 이상화하거나 비난하는 근엄한 도덕주의가 아니라 ‘변심’의 미세한 계기들을 복합적으로 읽어 내고 그들의 마음이 흐를 수 있는 정치·사회적 통로들을 만드는 것이다. 대선 후보들을 지켜보는 내 나름의 관전 포인트는 바로 그들이 만드는 이 통로에 있다. 볼 만한 게 있으면 좋겠다.

서강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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