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주기 전에는 그는 다만 하나의 몸짓에 지나지 않았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주었을 때 그는 나에게로 와서 꽃이 되었다.”
꽃도 이름을 불러주는데, 딸기는 왜 모두 그냥 ‘딸기’일까? 딸기의 이름을 찾아 보기로 했다. 재래시장에 나가 봤더니 ‘꿀딸기’‘왕딸기’, 심지어 ‘설탕 딸기’라고 이름 붙여 팔고 있었다. 세상에 그런 딸기는 없다. 크고 단 과일을 좋아하는 소비자를 홀리기 위해 고민 없이 써 놓은 홍보용 카피에 지나지 않는다.
딸기 포장재에 붙은 스티커를 들여다 봤다. 꽤 많은 정보가 담겨 있다. ‘더 행복한 딸기∙전남 담양’‘상큼한 예향 참 딸기∙충남 예산∙설향’‘우리 흙에서 키운 딸기 향∙경남 거창∙설향+죽향’‘지리산 단계 딸기’‘맘愛담은 딸기’‘순창 장수촌 딸기’ 등이다. 이 스티커들이 내세우는 건 공통적으로 재배 지역과 브랜드 두 가지다. 딸기의 이름이 제대로 적힌 것은 소수다. ‘설향’‘죽향’만 딸기 이름이다.
춘행, 환타, 모모이로홋페8고, 킹스베리, 엔에스9호, 금실, 만년설, 무하. 2016년 국립종자원에 출원 등록된 딸기 이름이다. 조금 낯설다. 그렇다면 매향, 설향, 싼타, 죽향, 육보, 장희는? 여섯 딸기 이름 중 설향, 죽향을 비롯해 두어 가지만 알고 있어도 딸기를 많이 아는 셈이다. 매향과 설향 여섯 딸기는 가장 많이 재배되는 주요 품종이다. 한국농촌경제연구원(KREI) 집계에 따르면 2015년 전국에서 설향 81.3%, 장희 6.1%, 죽향 5.9%, 매향 2.5%, 육보 1.3%, 싼타 1.1%가 재배됐다. 이외 품종들은 1.8%에 불과했다.
국립종자원에는 모두 91종의 딸기가 생판(생산과 수입판매), 출원 등록돼 있다. 1998년 수홍, 설홍, 미홍이 처음 등록된 이후 88종의 딸기가 딸기 시장에 나온 셈이다. 국립종자원에 등록하지 않은 딸기 종류도 숱하게 스쳐갔다.
노지에서 하우스로, 일본 품종에서 한국 품종으로
딸기는 이르면 11월부터 수확하는 겨울 제철의 채소류 과일이다. 병환이 깊은 부모를 위해 효자가 한겨울 눈밭에서 따왔다는 구전 동화 속 딸기는 산딸기다. 유럽 중부 출신인 딸기가 한반도에 들어온 시기는 1900년대 초반, 일제강점기의 일이다. 미국 종자가 일본을 거쳐 한국에 정착했다.
딸기가 왜 겨울이 제철이냐고? 옛날에는 오뉴월 과수원 사래마다 딸기 넝쿨이 있었다고? 맞다. 원래는 노지에서 딸기를 키우던 시절도 있었지만 한 달 반 남짓한 수확기로는 채산이 맞지 않았다. 초여름부터는 경쟁 과일이 쏟아져 나오고, 수입 과일도 봇물이다. 딸기가 겨울로 제철을 옮긴 것은 시설재배가 일반화하면서부터의 얘기다. 1990년대부터다. 이제 노지 재배를 거의 찾아볼 수 없다. 참외 등도 이미 하우스 재배가 많이 보급됐지만 귤 말고는 경쟁 과일이 없는 겨울 과일 시장을 딸기가 선점했다. 11월부터 4월까지 길게는 반 년 내내 수확할 수 있다.
한국은 2002년 국제신품종보호동맹(UPOV)에 가입하면서 식물 품종 재산권이 도입됐다. 한국 품종을 외국에서 재배하면 품종에 대한 로열티를 받고, 반대로 한국에서 외국 품종을 재배하면 로열티를 주게 됐다. 유예기간은 10년이었는데, 딸기에 문제가 있었다. 중앙과 지방의 육종기관에서 딸기 품종 개발을 게을리한 적은 없지만, 시장을 점유하고 있던 딸기가 모두 일본 품종이었다. 한국농촌경제연구원이 내놓은 2005년 자료에 따르면, 육보 52.7%, 장희 33.2%로 재배 품종 중 85.9%에 달했다. 각각 ‘레드펄’‘아키히메’라는 본명을 지닌 일본 품종이다. 10년 뒤엔 상당한 로열티를 일본에 지불해야 한다는 의미였다.
정부 지원을 받아 딸기 육종 사업이 활발히 이뤄졌고, 마침내 히트작이 나왔다. 2005년 품종 육성에 성공한 ‘설향’이다. 재배 비율은 2007년 28.6%로 시작해 2009년 51.8%, 2010년 56.6%, 2011년 68.2%, 2012년 70%, 2013년 75.4%, 2014년 78.4%로 빠르게 성장했다.
‘설향의 아버지’는 충남도농업기술원 논산 딸기시험장 김태일 장장이다. “정부와 지방자치단체에서 힘을 쏟은 덕분에 더 빠르게 보급됐다. 물론 딸기 자체의 장점도 우수했다. 키우기 쉽고 수확기가 빠르면서도 소출이 많아 생산자들이 선호했다. 소비자들은 크기와 맛에 만족했다. 설향보다 먼저 육종한 매향은 맛이 더 좋지만 병충해에 약하고 비료 반응도 예민해 키우기 까다롭다. 이 때문에 설향만큼 널리 퍼지지 않고 수출용 품종으로 자리 잡았다.”
‘설향’에서 시작…품종 다양화
문제는 설향이 너무 대세라는 것이다. 뛰어난 국산 품종을 보급해 국부 유출을 막은 것까지는 좋았지만, 딸기 다섯 중 넷이 같은 품종이라는 것은 지나친 획일화다. 지난 10년 간 딸기 육종의 목표가 국산 품종 보급이었다면, 앞으로 10년의 목표는 품종 다양화다. 김대영 농촌진흥청 원예원 채소과 연구사는 “설향 단일 품종의 점유율이 과도한 것은 문제”라며 “설향은 뛰어난 품종이지만 봄철 고온기에 품질이 떨어지는 단점이 있다”고 말했다. 그는 “현재 육종하는 딸기의 목표는 설향을 넘어서는 것이라고 해도 과하지 않다”며 “설향의 장점을 모두 갖고 단점을 극복한 딸기 품종을 육성하는 것이 목표”라고 덧붙였다.
김대영 연구사가 육종한 새로운 품종이 얼마 전 나왔다. 이름은 농촌진흥청 인터넷 홈페이지에서 공모 중이고, ‘14-5-5’가 ‘태명’이다. 2014년도부터 육종해 다섯 번째 교배 조합에서 다섯 번째로 선발한 품종이라는 의미다.
딸기 시장의 ‘설향으로 대통합’ 문제는 설향을 육종한 김태일 장장도 지적한다. “수확기가 늦은 육보와 죽향 등이 나오는 2월 전에는 딸기가 설향 일색이다. 그러다 보니 굳이 품종을 표시할 필요도, 구분해 먹을 필요도 없다. 크기와 외관, 유통 단계에서 맛으로 등급만 나누고 있다. 그러나 품종마다 가진 맛과 향의 분명한 차이가 있다.”
우수한 품종이 새로 나와도 소비자들이 모르고 지나간다면 무슨 소용인가. 소비자들이 다양한 품종을 찾기 시작하면 더 빠른 변화가 가능하다. 현재 딸기 주산지에서 내세우는 것처럼 딸기의 재배 지역을 따지는 것은 큰 의미가 없다. “시설재배가 일반화한 딸기 재배 환경에서는 지역에 따른 환경 차이보다는 품종과 재배 기술이 더 큰 영향을 미친다. 품종 개념이 자리 잡으려면 적어도 4,5가지 품종이 경쟁하는 환경이 만들어져야 한다.” 김태일 장장의 얘기다. 그는 “장기적으로 지역과 품종을 연계한 마케팅 전략이 필요하다”며 일본 사례를 들었다. “일본은 각 현마다 대표 딸기 품종을 개발해 좋은 결과를 얻고 있다. 명물이 된 현의 딸기는 상당히 고가에 가격대가 형성된다.” 문정훈 서울대학교 농경제학부 교수도 “쌀 이외 농산물에도 품종 표기가 필요하다”고 말했다. 현재 딸기 품종은 개별 포장 또는 개별 포장을 담은 종이 상자에 자율적으로 표기하고 있다.
‘딸기의 이름’을 찾는 움직임은 점진적으로 일어나고 있다. 백화점에선 이미 일반적이다. 현대백화점 이충훈 바이어의 설명. “몇 년 전부터 품종을 구분해 판매하고 있다. 판매 사원도 품종을 알고 있다가 소비자가 원하는 딸기 품종을 고르도록 돕는다. 포장 박스에 품종이 표기돼 있지 않은 경우가 여전히 많다.”
대기업 계열이 아닌 서울 연희동 ‘사러가 마트’에서도 딸기는 품종으로 나뉜다. “죽향은 이미 고객들이 잘 알고 있어서 품종을 표기해 판매하고 있다”는 것이 김현명 사러가 마트 홍보팀장의 설명이다. 죽향은 어디서나 제 이름을 달고 팔리는 인기 품종이다. 당도가 13,14브릭스로 강해 선호하는 사람이 많고 가격이 비싸다. 설향과 장희의 당도는 10~13브릭스, 육보는 11~13브릭스다.
품종을 다양화하려는 시도 끝에 올해는 꽤나 독특한 딸기 두 종류가 동시에 등장하기도 했다. 논산 딸기시험장에서 나온 ‘킹스베리’는 크기가 주먹만 하다. 품종 육성 과정에서 특이하게 큰 딸기가 맺히는 계통을 시험해 얻어낸 품종이다. 두 농가에서 소규모로 재배해 ‘이마트’에 독점 공급하고 있다. ‘만년설’은 한 농가에서 키우던 장희에서 우연히 발생한 흰 딸기를 육종한 품종이다. 설익은 딸기처럼 거의 흰색에 가까운 딸기다. 단 한 고랑 심은 것을 현대백화점에서 판매 중이다.
품종마다 매력도 각양각색
설향과 장희 딸기는 11월부터 1월 말까지, 죽향과 육보는 2월부터 출하된다. 김태일 장장에 따르면, 설향은 4월에 다시 양분을 비축하고 맛이 좋아져 시장에 또 나온다. 2월 말 현재 출하 중인 설향, 장희, 죽향, 육보, 금실 다섯 딸기를 모아 맛보았다. 설향은 복숭아를 연상시키는 산미가 단맛과 잘 어우러지고 싱그러운 수분이 가득하다. 장희는 서양배처럼 무른 질감에 수분이 풍부하고 신맛이 약해 부담이 없다. 죽향은 꿀처럼 달고 신맛은 과하지 않다. 육보는 딸기 꽃을 먹는 것처럼 달달한 향내가 강하고 크리미한 단맛이 일품이다. 질감이 단단하고 뒷맛이 약간 있다. 올해 새로 나온 품종인 금실은 장미를 연상시키는 향에 단맛과 약한 신맛이 적당히 어우러지고 청포도처럼 신선한 느낌을 준다.
이름 없는 딸기의 이름을 부르자 단지 몸짓에 지나지 않던 딸기에 생생하고 각별한 존재가 더해졌다. 각각의 빛깔과 향을 지닌 딸기들이 여태껏 뭉뚱그려 ‘딸기’라고 불렸다니, 새삼 미안한 일이다. 김춘수 시인의 ‘꽃’으로 이름 없는 이 땅 딸기의 서운한 마음을 전한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준 것처럼 나의 이 빛깔과 향기에 알맞은 누가 나의 이름을 불러다오. 그에게로 가서 나도 그의 꽃이 되고 싶다.”
이해림 객원기자 herimthefoodwriter@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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