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적군, 아군 안 가리고 무례와 막말
골수 지지층 결집 강력한 수단
중도층에 반감 사 선거 패배도
#2
헤게모니 장악 가능한 강력한 도구
SNS 정치 늘며 발언 수위도 높아져
대선 앞두고 ‘파괴적 싸가지’ 경계령
“몸에 안 좋은 사이다에 취해선 안 돼”
지난달 24일 국회 의원회관에서 열린 전시회 ‘곧, BYE! 展’에서 박근혜 대통령 풍자 누드화가 공개된 사건은 박 대통령이 아닌 전시회를 주최한 표창원 더불어민주당 의원에게 타격을 입혔다. 아무리 대통령이 탄핵심판대에 올랐더라도, 지켜야 할 최소한의 도를 넘었다는 비판이 쏟아졌다. 지난해 12월 2일 표 의원이 박 대통령 탄핵안 발의에 반대하는 새누리당 의원 명단을 일방적으로 공개해 항의문자를 유도했을 때만 해도 지지층에선 “잘 했다”는 목소리가 나왔다. 하지만 탄핵 반대파로 잘못 분류된 장제원 바른정당(당시 새누리당) 의원과 “장제원, 이리 와봐”라며 반말 싸움을 벌인 데 이어 대통령 누드화 사건까지 일으키자 표 의원은 일순간 ‘싸가지 없는 정치인’으로 자리매김했다. 민주당은 즉각 표 의원을 윤리심판원에 회부, 논란이 확산되지 않도록 수습에 나섰다. 심판원은 2일 표 의원에 대해 6개월 동안 지역위원장을 포함해 당직을 맡을 수 없도록 하는 중징계를 결정했다. 우상호 민주당 원내대표는 3일 “대선을 앞두고 논란의 씨앗을 키워서는 안 된다”고 말했다. 대선 정국을 앞두고 내려진 ‘싸가지 경계령’이다. 도대체 정치인에게 싸가지란 무엇일까. 단순하지만은 않은 싸가지의 정치학이 작동한다.
적군-아군 가리지 않는 무례와 막말
어떤 일이나 사람이 잘 될 것 같은 낌새나 징조를 가리키는 ‘싹수’는 전라도 사투리 ‘싸가지’로 분한 순간 전혀 다른 의미를 획득한다. ‘버릇 없다’는 뜻의 굳어진 표현 ‘싸가지 없다’에서 싸가지는 사람을 대하는 최소한의 기본 도리가 된다. 비판을 지나친 모독, 독설을 넘은 인신공격, 쟤가 나한테 이럴 수 있느냐는 즈음에 이르면 이념적 지향, 능력의 우열, 인간관계의 유형을 불문하고 싸가지 없음의 잣대가 적용된다.
과거 ‘싸가지 없는 진보’의 대표주자로 꼽혀온 유시민 전 보건복지부 장관은 최근 합리적이고 온건한 정반대 이미지로 재탄생했건만, 그 뒤를 잇는 ‘싸가지의 계보’는 건재하다. 이정희 전 통합진보당 대표가 견줄 이 드문 인물로 꼽힌다. 2012년 대선 당시 TV토론회에서 정책, 맥락을 불문하고 “박근혜 후보를 떨어뜨리겠다”며 몰아붙인 장면은 어떤 이들에겐 “속이 후련하다”는 쾌감을, 일부에겐 “차라리 박근혜를 찍겠다”는 반감을 불러일으켰다. 더불어민주당 소속 이재명 성남시장은 지난 지방선거 당시 형수와의 욕설 싸움 통화 내용이 공개돼 논란이 일었고, 수차례 거친 발언으로 문제가 됐다. 지난해 성남시 청년수당을 비판하는 이들을 “수준 낮은 일베(일간베스트)만 보시면 짝짝이 눈에 정신지체아 되는 수가 있어요”라며 폄하하는 식이다. 이재정 민주당 의원은 지난해 11월 국회 긴급현안질문에서 황교안 총리에게 사이비 종교를 상징하는 오방끈을 내던지고 “답변 태도를 가이드해 드리겠다. 노려보거나 안하무인적 태도로 거만하게 답변하면 안 된다”고 쏘아붙여 이 계보에 이름을 올렸다.
보수 정당이라고 다른 것도 아니다. 지난해 4ㆍ13 총선을 앞두고 새누리당 내 친박(박근혜)계와 비박계의 공천 주도권 싸움에서 드러난 민낯은 가관이었다. 친박 윤상현 의원은 친박계가 만든 살생부가 비박계인 김무성 대표에게 전달됐다는 언론 보도 후 지인과 전화 통화에서 김 대표를 겨냥해 “그 새끼 죽여 버리게. 죽여버려. 내가 당에서 가장 먼저 그런 새끼 솎아내서 공천에서 떨어트리려 한 거여”라며 막말을 쏟아냈다. ‘살생부’가 비박계의 음모라고 본 윤 의원의 막말에 새누리당 내부 갈등은 극단으로 치달았고, 윤 의원은 탈당했다가 당선 후 복당했다. 새누리당 소속 홍준표 경남지사는 지난해 7월 자신의 사퇴를 촉구하며 단식 농성 중인 정의당 소속 여영국 경남도의원을 향해 “쓰레기가 단식한다고 되는 게 아니야. 개가 짖어도 기차는 간다”고 힐난했다. 세월호 유족들에게 막말을 쏟아낸 이완영 새누리당 의원의 이름도 빠질 수 없다. 김진태 새누리당 의원은 지난달 14일 박 대통령 탄핵 기각을 위한 태극기 집회에 참석해 “세월호 7시간 의혹은 인류 역사상 최악의 악질 선동”이라고 주장했다. 앞서 지난해 10월 박근혜 대통령의 국군의 날 기념사를 “북에 대한 선전포고”라 비판한 박지원 국민의당 원내대표를 향해 “주파수가 북한에 맞춰져 있다. 왜곡과 선동으로 눈이 삐뚤어졌는데 뭔들 제대로 보이겠나”라고 비판했다.
‘핵사이다’ 지지층 결집의 효과적 수단
공방을 벌이더라도 품위 있는 정치, 지성적인 논쟁을 보고싶은 유권자들에게 이 같은 무례와 막말은 반감을 유발하고 정치 전반에 대한 혐오를 부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싸가지 계보’가 대가 끊기지 않는 데에는 그 효용이 있기 때문이다. 반대층을 향한 싸가지 없는 언행은 지지층을 결집시켜 헤게모니를 차지하는 가장 강하고 효과적인 도구다. 상처받은 상대가 휘청거리는 반응을 목격할 때 우리 편은 더할 나위 없는 카타르시스를 느끼며 지지를 강화한다. 강준만 전북대 신문방송학과 교수는 책 ‘싸가지 없는 진보’에서 반대편에 대한 싸가지 없는 언행은 지지자들을 열광시키는 동시에 단합의 대열로 이끌 수 있다고 분석했다. 그는 “독설과 욕설을 앞세운 카타르시스 효과를 노린 담론만이 호황을 누리고 있다”고 진단했다. 싸가지 없는 정도를 넘어 ‘꼴통’쯤으로 평가된 도널드 트럼프 미 대통령이 이민자 등을 향한 막말로 백인 남성의 표심을 얻은 것도 같은 맥락이다.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를 통해 정치인과 대중이 직접 소통하는 접점이 커지면서 싸가지 없는 언행이 늘고 있다는 시각도 있다. 정치인의 메시지가 순식간에 전파되고 실시간으로 대중의 반응을 확인하면서 발언 수위가 갈수록 높아지고 있다. 최광기 토크컨설팅 대표는 “정치인은 자극적 말을 하면 즉시 다수가 호응하기 때문에 이를 통해 정치적 파워가 생긴다고 본다”며 “이런 쌍방향 소통을 경험하다 보니 감성적으로 접근하려는 경향이 강해진다”고 설명했다. 특히 대중적 인지도를 높여야 하는 초선 의원들에게 SNS 호응은 ‘마약’과도 같다.
중도층의 반감이 선거 결과 좌우
지지층에게는 결집 효과가 있지만, 반대층과 중도층에게 싸가지 없는 언행은 역효과를 낸다. 싸가지 논란으로 부동층의 표를 잃어 선거에 패배하게 된 실례가 다수 존재한다. 야당과 운동권 경험을 바탕으로 권력과 권위에 도전해 온 진보 진영이 주로 ‘싸가지 트라우마’에 시달린다. 문재인 전 민주당 대표는 2012년 대선 패배 1년 후인 2013년 12월 펴낸 대선 회고록 ‘1219 끝이 시작이다’에서 “혹시 우리가 민주화에 대한 헌신과 진보적 가치들에 대한 자부심으로, 생각이 다른 사람들과 선을 그어 편을 가르거나 우월감을 갖지는 않았는지 되돌아 볼 필요가 있습니다. 우리가 이른바 ‘싸가지 없는 진보’를 자초한 것이 아닌가 겸허한 반성이 필요한 때입니다”라고 썼다. 2012년 총선도 김용민 변수가 작용했다고 민주당은 보고 있다. 서울 노원갑에 출마한 김 후보는 투표를 닷새 앞두고 2004년 인터넷 라디오방송 ‘김구라, 한이의 플러스18’에서 했던 “미사일을 날려서 자유의 여신상 XX에 꽂히도록 하자”는 등 반미, 여성 비하, 노인 비하, 교회 모독성 발언이 논란이 돼 사퇴 압박에 몰렸다. 예상을 뒤엎은 민주당의 패배 요인으로 분석된다.
지난해 4ㆍ13 총선에서 새누리당이 무조건 과반 확보라는 예상을 깨고 2위에 그친 것도 윤상현 의원의 막말로 대변되는 친박-비박계의 진흙탕 싸움이 결정적이었다. 윤희웅 오피니언라이브 여론분석센터장은 “새누리당은 유권자의 마음은 안중에 없이 친박, 비박이 사생결단 하듯 싸가지 없는 언행을 일삼은 반면 민주당은 공갈 발언으로 윤리심판원의 징계를 받은 정청래 의원을 공천에서 배제하는 등 과거의 낙인에서 벗어나려 애썼다”고 말했다.
유권자 중 보수와 진보의 고정 지지층이 각각 30%, 20%가 그 때 그 때 지지 정당이 달라지는 부동층, 20%가 절대 투표를 하지 않는 무관심층으로 분류될 때 싸가지는 선거의 당락을 결정짓는 20%의 중도층 유권자에게 영향을 미친다는 게 강준만 교수의 분석이다. 싸가지 없는 정치는 진보적 정치 의제에 찬동하지만 막말이나 거친 태도, 과격하고 극단적인 발언을 싫어하는 진보 지지층 내 ‘태도보수’의 표도 갉아먹는다.
대중의 관심에 취하면 ‘사이다 중독’
독설이 통쾌함을 안길지 혐오를 불러일으킬지 그 경계가 늘 뚜렷한 것은 아니다. 강 교수는 기존 문화에 도전해 변화를 불러일으키는 ‘생산적 싸가지’와 달리 자기중심주의와 극단주의를 바탕으로 하는 파괴적 싸가지는 자신은 물론 속한 조직 모두를 파괴한다고 우려했다. 조기 대선 가능성이 높아지면서 정치권이 ‘싸가지 경고등’을 켜는 것도 이런 이유에서다.
정치 전반에 대한 회의와 혐오로 번질 수도 있다. 정상호 서원대 교수는 “촛불집회를 통해 민주주의를 향한 시민의 인식 수준이 크게 높아졌지만, 정치인들이 품격 잃은 모습만 되풀이할 경우 다시 정치를 외면하게 될 것”이라고 내다봤다.
최광기 대표는 정치인의 성찰이 필요하다고 지적했다. 그는 “정치인은 수시로 내가 왜 정치를 시작했는지를 되돌아보고 진정성을 잃지 않도록 노력해야 한다”며 “그렇지 않고서는 대중의 관심에 취하고, 권력의 단맛에 취하게 되고 실수를 반복할 가능성이 커진다”고 밝혔다. 이어 “소위 요즘 유행하는 게 ‘사이다 발언’인데 사이다는 처음 마실 때는 톡 쏘는 맛이 매력적이지만 시간이 갈수록 김이 빠지고 몸에도 좋지 않다”며 “사이다에 취해서는 안 된다”고 지적했다.
박상준 기자 buttonpr@hankookilbo.com
박재현 기자 remake@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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