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우자 없는 시간, 부부관계에 반드시 있어야

일정 기간 배우자와 떨어져 독립된 생활을 하는 결혼안식년은 100세 시대의 긴 결혼생활을 더 건강하고 풍요롭게 만드는 묘안이 될 수 있다. 게티이미지뱅크

두 자녀를 키우며 시어머니를 모시고 살아온 김재용(57)씨는 10여 년 전 캐나다 밴쿠버에서 6개월간 결혼안식년을 가진 적이 있다. 머리를 들 수 없을 정도로 심각한 두통에 여러 병원을 돌며 MRI와 CT를 찍어봤지만 이상이 없었다. 의사들은 그저 스트레스를 줄이라고만 권했다. 죽을 것처럼 몸이 아픈 것이 고작 스트레스 때문이라는 걸 믿을 수 없었던 김씨는 더 이상 이렇게 살아서는 안 되겠다 싶었다.

“둘째 아들이지만 어머니를 모시고 싶다기에 뭣도 모르고 좋다고 했죠. 결혼 승낙을 받으러 인사를 갔는데, 이 방에서 시동생이 나오고, 저 방에서 시누이가 나오고, 그 많은 식구에 온갖 대소사가 다 제 몫이었던 거예요. 제가 남편한테 약속한 거니까 반드시 지켜야만 한다고 생각했는데, 막상 그렇게 살다 보니 너무 억울했어요. 돌아보니 나는 없고, 며느리, 엄마, 아내라는 내 역할만 있더라고요.”

‘나는 뭐지? 예전엔 꿈도 많았는데…’ 이런 생각을 수도 없이 하던 때, 김씨는 우연히 문정희 시인의 시 ‘공항에서 쓸 편지’를 읽었다. ‘여보. 일년만 나를 찾지 말아주세요/ 나 지금 결혼안식년을 떠나요/ 그날 우리 둘이 나란히 서서/ 기쁠 때나 슬플 때나 함께하겠다고/ 혼인서약을 한 후/ 여기까지 용케 잘 왔어요. (…)하지만 일년만 나를 찾지 말아주세요/ 병사에게도 휴가가 있고/ 노동자에게도 휴식이 있잖아요/ 조용한 학자들조차도/ 재충전을 위해 안식년을 떠나듯이/ 이제 내가 나에게 안식년을 줍니다/ 여보. 일년만 나를 찾지 말아주세요/ 내가 나를 찾아가지고 올 테니까요.”

결혼이라는 제도의 맹점은 ‘영원히 두 사람이 모든 것을 함께한다’는 그릇된 가정에 기초하고 있다는 것이다. 결혼안식년은 이 치명적 오류에 숨구멍을 내줄 수 있다. 게티이미지뱅크
일년만 나를 찾지 말아주세요

‘결혼안식년’이라는 개념은 김씨에게 구원이 됐다. ‘바로 이거다. 이게 아니면 나는 죽는다. 나부터 살자’는 절박함이 그의 내면에 가득했다. 밴쿠버로 조기유학을 떠나 있던 중학생 딸아이를 돌본다는 명목을 대고 시어머니부터 설득했다. 중학생 아들은 “누나한테도 한번 가봐야 하고 엄마도 많이 아프다”고 설명했더니 흔쾌히 동의했다. 남편은 ‘동공지진’을 일으키며 마음에 안 든다는 내색을 비쳤지만, 김씨의 치밀한 사전작업에 마지못해 오케이를 했다.

밴쿠버에서 김씨는 완벽하게 행복했다. 아무 때나 일어나고 아무 때나 자는 것을 결혼 십 수 년 만에 처음으로 실컷 해봤다. “시집살이 하면서 보초병처럼 살았거든요. 언제든지 부르면 뛰어나가야 하니까 늘 옷을 입은 채로 자곤 했었죠.” 소나기가 오면 맨몸으로 맞고, 맨발로 숲길을 걸어 다니고, 털코트에 맨발로 샌들을 신고 다니는 사람들을 보며 남의 시선으로부터 자유로워지는 법을 배웠다. 화장을 안 하면 밖에 나갈 수도 없다고 믿어온 세월은 그곳에서 끝났다. 이 온전한 자유 속에서 그의 두통은 거짓말처럼 싹 사라졌다.

“남한테 향하던 시선을 나에게로 향하면서 나는 지금 행복한지, 잘 가고 있는 건지 생각해 보게 됐어요. 나를 위해 살아야 하는데 남을 위해 살고 있진 않은지 성찰하게 된 거죠. 한국사람들은 일하지 않으면 먹지도 말라고 교육 받잖아요. 죄의식 없이 하루 종일 빈둥거리며 온전한 휴식을 취할 수 있었던 게 너무 좋았어요.”

남편은 한 달 만에 “도저히 못하겠다. 당장 돌아와 달라”며 SOS를 쳤다. 이미 집은 다 잊어버리고 자기만의 생활을 만끽하고 있는데, 돌발상황이었다. 김씨는 목소리를 깔고 “참아라. 나한테 그 정도는 해줄 수 있지 않느냐” 단호하게 말했다. 그의 단호함은 우렁각시가 왔던 것처럼 당연하게 저절로 돼 있던 많은 일들이 실은 막대한 노동력의 투입 결과였음을 온 가족이 깨닫게 된 계기가 됐다. “많은 엄마들이 떠나지 못하는 이유가 ‘내가 없으면 집안이 엉망이 될까 봐’잖아요. 하지만 제가 해보니 엄마가 없으면 없는 대로 다 각자의 해야 할 일들을 찾아서 하더라고요.”

6개월간의 이별은 부부 사이에도 변화를 불러왔다. 불타오르던가 물으니 그저 웃는다. “늘 내 앞에 있던 사람이 없으니까 이런 게 안 되는구나 서로 느낀 게 많았죠. 여행은 돌아오기 위해 떠나는 거잖아요. 결혼안식년을 지내고 보니 그렇게 답답하기만 하던 내 집도 더 애틋해지고, 이게 내 자리였지 싶으면서 더 좋아지더라고요.” 김씨는 50세 생일에는 홀로 제주 올레길을 걸으며 안식휴가를 가졌다. 기회가 있을 때마다 주변에 결혼안식년을 권하며 여건이 정 안 되면 당일치기 여행이라도 홀로 다녀올 것을 추천한다. “꼭 혼자여야 해요. 아무도 없으면 내가 두 개의 나로 분리되잖아요. 나에게 말을 거는 나를 우리는 반드시 만나야 해요.” 안식휴가를 통해 글을 쓰고 싶다는 옛 꿈을 되찾은 김씨는 2014년 ‘엄마의 주례사’(시루 발행)라는 책을 펴내며 수필가의 꿈을 이뤘다.

부부가 서로에게서 떨어져 혼자만의 시간을 갖는 결혼안식년은 쌍방의 합의와 치밀한 사전 준비가 필요하다. 게티이미지뱅크
배우자 없는 시간이 필요하다

오늘날 결혼이라는 제도가 위기에 처한 것에는 여러 이유가 있다. 한 사람과 해로하기엔 인간의 수명이 극적으로 길어졌고, 가부장제적 억압을 더 이상 디폴트값으로 받아들이지 않을 만큼은 여성 인권도 향상됐다. 하지만 본질적으로는 사랑하는 두 사람이 일평생 모든 것을 함께한다는 결혼제도의 가정 자체가 오류다. 황혼 이혼의 약진이 이끌고 있는 높은 이혼율과 젊은 세대의 결혼 기피, 졸혼에 대한 관심 고조 등은 모두 결혼제도의 약자인 여성이 견인하고 있지만, 반드시 여성만 결혼안식년의 필요를 느끼는 것은 아니라는 말이다.

결혼안식년이라고 해서 꼭 연간 단위의 별거를 일컫지는 않는다. 전문가에 따라 의견은 갈리지만, 영어권에서 ‘결혼안식기(marriage sabbatical)’라 부르는 일시적 별거는 짧게는 며칠부터 길게는 몇 년까지 제각기 다를 수 있다. 한국에서는 기혼자의 나홀로 여행을 통해 이 경향을 대략적으로나마 가늠해볼 수 있다. 13일 하나투어에 따르면, 40대 이상의 기혼자 중 혼자 여행을 떠난 사람들은 해마다 증가하고 있다. 매년 1월부터 11월까지 배우자를 두고 혼자 여행을 떠난 40대 이상의 여행객 수는 2014년 7,100여명, 2015년 9,800여명에서 올해는 1만2,000여명으로 대거 늘었다. 2년 사이 69%나 증가한 수치다. 이중 남성은 2014년 67.1%, 2015년 64.5%, 올해 62%였으며, 여성은 2014년 32.9%, 2015년 35.5%, 올해 38%였다. 송원선 하나투어 홍보과장은 “기혼자의 나홀로 여행은 남성이 여성보다 2배 정도 많지만, 여성의 비중이 매년 늘어나는 증가세를 보이는 게 특징”이라고 말했다.

여성, 특히 그 중에서도 전업주부가 결혼안식년에 가장 적극적으로 호응하는 것은 ‘주 7일, 24시간’, 연휴나 휴가도 없는 상시 근무체제라는 노동환경 때문이다. 아무리 혹독한 근무 조건의 노동자도 주말과 명절 연휴의 일부는 보장 받는 세상이 됐지만, 전업주부는 여전히 ‘어차피 집에서 노는 것 아니냐’는 시대에 뒤떨어진 세간의 인식과 더불어 자아상실이라는 정체성 위기를 겪는다. 2008년 히트했던 김수현 작가의 드라마 ‘엄마가 뿔났다’가 바로 이 문제를 다뤘다.

결혼안식년은 반드시 배우자에게 돌아온다는 목표가 있다는 점에서 별거와 다르다. 게티이미지뱅크
결혼안식년 “일상으로부터 분리”

미국 언론인 셰릴 자비스의 ‘결혼안식년: 집으로 돌아오는 여행’은 결혼안식기간을 가졌던 55명의 여성과 그들의 배우자 일부를 인터뷰한 책이다. 30년간의 결혼생활 동안 일주일 이상 남편과 떨어져본 적이 없는 저자는 50대에 3개월간의 안식기간을 갖고 이 책을 쓰기 시작했다. 55명의 여성은 각기 독서에 몰입하기 위해 6개월, 유럽에서 공부하거나 가르치기 위해 여름 몇 개월, 평생의 꿈이었던 평화봉사단이 되기 위해 2년 등의 결혼안식기를 가졌다. 공통점은 이혼 전 별거와 달리 반드시 배우자에게로 되돌아온다는 명확한 목표를 가지고 있었다는 것. 자비스는 abc방송과 인터뷰에서 “결혼안식년은 반드시 결혼 안에서의 안식년이어야 하며, 관계로부터의 안식이라기보다 루틴한 일상으로부터의 분리라고 생각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결혼안식년의 목표는 에너지를 충전하고 리프레시 되어 결혼제도로 복귀하는 것이라는 얘기다.

결혼안식년이 아이디어로서는 매우 탁월하지만 막상 실행에 옮기기 어려운 여러 가지 이유 중 가장 큰 것은 바로 죄책감과 두려움이다. 책에 따르면, 아이러니하게도 안식 기간이 짧고 가까운 곳으로 떠난 사람들이 오랫동안 멀리 떠난 사람보다 더 많은 죄책감에 시달리는 것으로 나타났다. 반면 안식년을 가진 남성은 대부분 죄책감보다는 자유로움을 느꼈는데, 저자는 이를 “여성들은 허가를 얻어야 한다는 생각이 강하기 때문”이라고 분석했다.

결혼안식년의 장점은 분명하다. 남편 및 가족과 떨어져 혼자 지내는 것은 자기 정체성을 되찾고 자신이 원하는 꿈을 재발견할 수 있다는 점에서 존재에 요긴하다. 부재는 갈망의 최대 원인이라는 점에서 당연한 사물로서 존재하던 배우자를 다시 한번 욕망의 대상으로 재인식할 수 있는 기회가 되며, 극단적인 스트레스와 갈등으로부터 휴지기를 가짐으로써 자신을 치유하고 상황에 대한 새로운 인식과 관점을 얻을 수 있다.

결혼안식년이 부부의 근본적 갈등과 문제를 잠시 회피하기 위한 것일 때는 그다지 효과적이지 않을 수도 있다. 게티이미지뱅크
단순한 갈등 회피ㆍ유보는 금물

결혼안식년이 모두에게 성공적인 것은 아니다. 쌍방의 합의 없는 배우자 일방의 이기적 행태이거나 가족-특히 자녀-을 유기했다는 트라우마를 남기는 자기계발에 그칠 수도 있다. 전문가에 따라서는 주기적으로 짧은 휴가를 가는 것과 장기적으로 안식년을 갖는 것은 결코 같을 수 없다면서 후자는 결국 이혼으로 가는 우회로라고 반대하기도 한다. 특히 결혼 기간이 짧은 부부는 상호이해의 토대가 두텁지 않아 결별로 끝날 가능성이 높으며, 눈에서 멀어지면 마음에서도 멀어진다는 원리에 따라 새로운 욕망의 대상이 등장하지 않더라도 이혼에 이를 수 있다는 것이다. 부부 사이의 근본적인 문제 해결이 없다면 돌아온다손 치더라도 악순환이 반복될 가능성도 있다. 한시적으로 덮어두는 회피일 경우 함께 소통하고 갈등을 해결할 기회를 상실한 채 문제 상황을 유예한 것에 지나지 않을 수도 있는 것이다.

주부 유성희(54ㆍ가명)씨는 남편이 필리핀 지사로 발령 받았을 때 함께 가기를 거부하고 결혼안식년을 가졌다. 고부 갈등과 성격 차이 등 부부간 많은 문제들로 인해 이미 남편과의 사이는 멀어질 대로 멀어진 터라 막내아들만 남편과 함께 유학을 보냈다. 남편이 먼 곳에서 식구들을 위해 애쓴다는 마음은 가끔 들지만 다시 만나 지내다 보면 예전 갈등이 고스란히 터진다고. “최소한 부딪치지는 않으니까 미워하는 마음이 누그러지기는 하죠. 하지만 관계 회복이 아니라 그냥 덮어지는 거예요. 대신 신앙 생활 열심히 해서 남편을 미워하는 마음을 치유하고 있어요.” 유씨는 “부부니까 같이 지지고 볶고 살아야 하는 것 아닌가 하는 생각이 오히려 든다”면서 “떨어져 살아보면 낫지 않을까 생각했는데 문제의 근본은 해결이 안 되는 것 같다”고 말했다.

미국 심리치료전문가 프란 월피시 박사는 언론 인터뷰에서 “결혼안식년보다는 규칙적인 짧은 휴가가 훨씬 더 위기의 결혼생활을 구원하는 데 효과적”이라고 주장했다. 일주일에 특정 시간은 부부 각자가 자기 자신만을 위해 쓸 수 있도록 시스템을 구축하라는 것이다. 일종의 부부생활 디톡스인 셈이다. 사랑해서 결혼했다고 풀타임 배우자로 일평생 봉직해야 하는 건 아니다. 파트타임 결혼생활을 꿈꿔 보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이다.

박선영 기자 aurevoir@hankookilbo.com

변해림 인턴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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