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근혜 퇴진 약속했으니 광장 떠나라?
공범들 누구도 참회나 처벌받지 않았다
촛불 들고 ‘대한민국 새로고침’ 나서야
지금은 새로운 날의 전야(前夜)인가, 더 짙은 어둠을 남겨 놓은 시대의 마지막 밤인가. 정치 컨설턴트 박성민이 2012년 대선을 앞두고 이문열의 소설 ‘전야, 혹은 시대의 마지막 밤’을 빌려 던진 화두다. 그는 당시 인터뷰에서 갈등 해소는커녕 분열만 증폭시키는 낡은 정치 시스템을 바꾸는 것이 시대적 과제라고 역설했다. 민주화의 기점이 된 ‘87년 체제’처럼 비가역적(非可逆的) 변화를 이뤄내지 못한다면 더 짙은 어둠이 이어지리란 경고와 함께. 안타깝게도, 지난 4년, 그 암울한 예견은 그대로 현실이 됐다.
경제민주화와 복지는 전략도 의지도 없는 매표(買票)용 구호였음이 드러났고, ‘유신독재의 부활’이란 말이 정쟁의 언어를 넘어 실체적 공포로 회자됐다. 그 사이 ‘국가의 부재’를 섬뜩하게 드러낸 세월호 참사가 벌어졌고, 경제는 위기를 상수로 품은 채 악화일로에 있고, 청년들의 삶과 꿈은 ‘헬 조선’에 짓눌리고 있다. 그리고 사람의 상식으로는 도무지 이해할 수 없던 숱한 사건들 뒤에, 허깨비 대통령과 천박한 비선실세, 무능하거나 사악한 정치인ㆍ관료ㆍ재벌의 검은 유착이 있었음이 이제야 드러났다.
“이게 나라냐”는 분노에서 시작된 광장의 촛불 행렬은 시간이 지날수록 “이런 나라를 우리 아이들에게 물려줄 수 없다”는 다짐으로 굳건해지고 있다. 단언컨대 이들의 바람은 허깨비 대통령의 퇴진만이 아니다. 여전히 그를 지지한다는 4%를 뺀 국민들이 정치적 이념이나 관심사에서 한결같을 수는 없다. 하지만 100만, 200만 촛불은 정치권의 착각처럼 대선 판이 벌어지면 예전처럼 헤쳐 모일 ‘일시적 군중’이 아니다. 세계가 감탄할 만큼 무서운 인내심을 발휘하며 어린아이와 청소년, 어르신들까지 한데 어우러진 평화 집회를 이어가고 있는 까닭이 여기에 있다. 2012년의 저 화두를 소환하자면, 이제는 짙은 어둠을 걷어내고 새로운 시대를 열어가겠다는 열망으로 가득한 전야의 축제인 것이다.
역사가 증언하듯, 저항이 없을 수 없다. 반격은 이미 시작됐다. 제 언어조차 갖지 못할 만큼 아둔해도 정치적 셈법에는 밝은 그 분의 ‘꼼수 담화’가 신호탄이다. 항간의 설처럼, 요지부동이던 친박들이 용퇴를 건의한다고 나섰을 때 이미 치밀한 작전이 세워져 있었을지 모른다. 비선의 존재조차 몰랐다며 애써 선을 긋던 비박들도 얼른 자세를 바꿨다. 언필칭 ‘질서 있는 퇴진’에는 자신의 정치적 생명 연장의 꿈만 오롯하다. 국민이 어렵게 끌어낸 탄핵 정국에서도 여전히 지리멸렬한 야권도 대권 판도 계산에 바쁘긴 마찬가지다.
이 혼돈을 틈 타 ‘순수의 망령’이 어김없이 등장했다. 조선일보는 2일자 사설에서 촛불 민심을 “시위세력”으로 폄훼하고, 대통령이 여당 뜻대로 ‘4월 퇴진’을 밝힌 뒤에도 시위가 계속된다면 “순수한 시민들의 평화적 항의라고 보기 어렵다”고 단언했다. 이문열의 기고는 더 노골적이다. 그는 전언을 빌려 “촛불 시위의 정연한 질서”를 “(북한의)‘아리랑 축전’에서와 같은 거대한 집단체조의 분위기”로 몰고, ‘보수’를 항해 “다시 너희 시대를 만들기를” 주문했다. 몇 건의 폭로 기사와 매서운 꾸짖음이 결국 효용 다한 허수아비를 쳐 내고 수구 재집권을 꾀하려는 것이었음을 무람없이 드러낸 것이다.
오만이 도를 넘었다. 탄핵이든 퇴진이든 심판을 끌어낸 건 그들이 아니다. 무력하던 언론들이 취재 경쟁에 나서고, 눈치만 보던 검찰이 칼을 빼 들게 한 것도 국민의 명령이었다. ‘세월호 7시간’의 진실 규명 등 더 큰 난제들을 떠안은 특검이 겨우 첫 발을 뗐다. 새누리당과 재벌, 검찰, 국정원, 수구언론 등 나라를 이 꼴로 만든 공범들 누구도 잘못을 인정하지도, 합당한 단죄를 받지도 않았다. 그런데 이제 됐으니 광장을 떠나라고?
명심하자. 어둠은 제 발로 물러가지 않는다. 다시는 과거로 돌이킬 수 없는 변화를 만들기 위해 계속 촛불을 밝혀야 한다. 이제 탄핵과 퇴진 구호를 넘어 ‘대한민국 새로고침’을 위한 다양한 의제가 두려움 없이 논의되는 공론의 장을 만들어야 한다.
이희정 디지털부문장 jaylee@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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