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근혜는 공공성 외면한 사이비 보수
기득권 카르텔의 사익 추구가 본질적
퇴진 넘어 구속력 있는 개혁 도출해야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다. 공화국을 뜻하는 영어 리퍼블릭(republic)의 어원은 라틴어 레스 푸블리카(res publica). ‘공공의 것’ ‘공적인 것’을 의미한다. 결국 민주공화국은 국민이 부여한 권력을 공공적 가치를 위해 쓰는 정치체제다. 공화정의 역사가 긴 서구사회는 진보 보수를 떠나 공공성을 생명처럼 여긴다. 국가공동체를 운영하기 위해 인간의 기본권을 국가가 보장하는 토대 위에서 보수나 진보적 가치를 얘기한다.
한국의 보수는 어떤가. 공동체적 가치는 내팽개친 채 집단적ㆍ사적 이익을 추구하는 경향이 매우 강하다. 국회와 정부, 검찰, 법원 등 공적 기관이 권력자와 재벌 등 기득권층의 사적 이익을 대변하는 도구로 기능하는 현실이 왕왕 벌어진다. 대선 불출마를 선언한 김무성 새누리당 전 대표가 “썩은 보수는 도려내고 건전한 새로운 보수를 규합하겠다”고 나섰지만, 그 자신이 썩은 보수의 일원이었음을 석고대죄하는 게 우선이다.
박근혜 대통령은 사이비 보수다. 그는 분단 상황이 초래한 이분법으로 편 가르기에 열중했다. 철저히 기득권과 이해관계에 따라 움직였다. 시정잡배나 하는 파렴치 범죄에 적극 가담했다. 대선에서 그를 지지했던 주부, 노인, 직장인들이 촛불광장에 대거 몰려든 까닭이다. 형식적 민주주의 절차마저 망가뜨린 걸 용서하기 어려웠을까. 극우에 가까운 보수참칭 세력마저 그를 버렸다. 대선의 일등공신인 보수언론이 박근혜 죽이기 경쟁에 나섰다. 힘의 논리를 좇는데 귀신 같은 감각을 지닌 권력의 충견 검찰은 마지막 숨을 끊을 태세다.
탄핵이든 하야든, 박 대통령의 퇴진은 시간문제다. 이제 ‘분노 이후’를 준비해야 한다. 광장의 분노가 ‘박근혜 퇴진’에서 멈춘다면 우리네 삶은 달라지지 않을 것이다. 이번 사태의 본질은 박근혜 게이트가 아니다. 정부수립 이후 친일파의 득세와 군사독재, 극단적 자본화 등 70여 년 적폐가 박 대통령의 일탈을 통해 수면 위로 드러난 것이다. 극우 정치세력과 검찰, 언론, 재벌 등 기득권 카르텔이 공적 기능을 사유화하는 일이 다시는 없도록 법률과 제도를 뜯어고쳐야 한다. 기득권층의 이해가 아닌, 비정규직 근로자와 농민, 영세 중소기업, 자영업자 등 대다수 사회구성원들의 삶을 대변하는 정치구조를 만들어야 한다.
무엇을 해야 하나. 대한민국 언론과 검찰은 죽은 동물의 시체에 몰리는 하이에나와 같다. 살아 있는 권력에는 고개를 숙이고 힘이 빠지면 달려든다. 항상 임기 말이 돼서야 최고권력자의 대형 비리사건이 터져 나오는 이유다. 정치권력의 언론 장악을 막고 무소불위의 검찰권력을 견제할 제도적 장치를 마련해야 한다. 정경유착을 끊고 시장권력의 횡포를 막아야 한다. 공적 기능에 대한 시민감시의 확대, 지역할거주의 정당과 패거리 정치를 끝장낼 선거제도 개혁도 필요하다. 그렇지 않으면 헬조선을 막을 수 없다. 불평등은 더욱 커지고 경제적 약자의 권리는 계속 추락할 것이다. 가짜 보수가 또 득세할 것이다.
현재의 야당은 국민의 분노와 변화의 열망을 담아낼 수 있나. 회의적이다. 야당 주류도 보수와 별 차이 없는 탐욕스러운 기득권 정치세력인 탓이다. 그들이 집권한 10년 동안 국민의 삶은 별로 나아지지 않았다. 말로는 ‘사람 사는 세상’ ‘진보적 개혁’을 떠들었으되, 재벌과 관료의 안온한 품에 녹아나 역사적 책무를 방기했다.
촛불항쟁이 성공하려면 박근혜 퇴진에만 집중해선 안 된다. 박근혜는 이념과 세대와 지역을 초월한 국민적 저항으로 사실상 몰락했다. 그가 권좌에서 빨리 내려오도록 퇴진 운동을 멈춰서는 안 되겠지만, 광장의 분노를 총체적 개혁으로 전환하는 노력을 시작해야 한다. 국민적 합의를 통해 우리 삶을 실질적으로 바꿀 수 있는 개혁 로드맵을 도출하고 이를 차기 권력에 강제해야 한다. 이를 위해 대권주자와 야당 대표, 촛불항쟁 지휘부를 아우르는 국민조직을 만드는 방안도 고민해야 한다. 4ㆍ19혁명을, 80년 서울의 봄을, 87년 6월 항쟁을 무위로 돌린 가슴 아픈 과거를 반복할 수는 없다.
고재학 논설위원 goindol@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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