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를 통해 봤습니다.”
각오라도 한 듯 꽉 다물었던 입술을 무겁게 들어올렸습니다. 잘못한 것도 없는데 오히려 스포트라이트를 받았으니까요. 그 누구도 아닌 대한민국의 수장, 박근혜 대통령 때문입니다. ‘길라임 가명 논란’으로 인해 힘겹게 말을 꺼낸 이들은 SBS 드라마 ‘시크릿 가든’(2011)을 집필한 김은숙 작가와 여주인공 길라임을 연기한 배우 하지원입니다. 두 사람은 박 대통령이 길라임이라는 가명을 사용해 고액 연회비를 내야 하는 차움의원에서 VIP 시설을 이용한 의혹을 받자마자 언론과 대중의 관심 대상이 됐습니다. 길라임이라는 이름 때문이었지요.
얄궂은 운명의 장난일까요. 두 사람은 공교롭게도 새로운 영화와 드라마가 각각 내달 공개될 예정이라 언론과 만나게 됩니다. 편치 않았을 겁니다. 마치 박 대통령이 저지른 과오에 대해 자신들이 뒷수습하는 느낌이었을 테니까요.
직격탄을 맞은 건 하지원이었습니다. 박 대통령이 길라임이라는 가명으로 병원을 드나들었다는 보도(15일 JTBC ‘뉴스룸’)가 나고 이틀 뒤 그가 주인공으로 출연하는 영화 ‘목숨 건 연애’ 제작보고회가 열렸습니다. 이날 평상시보다 많은 취재진이 자리를 잡았습니다. 길라임 논란에 대한 하지원의 반응을 살피려는 목적이었지요.
하지원은 톱스타답게 취재진 앞에 당당히 나섰습니다. 그는 취재진의 질의응답을 받기 전 길라임 논란에 먼저 입을 열었습니다. 이날 진행을 맡은 방송인 김태진은 “오늘 왜 이렇게 많은 취재진이 모였을까요? 하지원씨, 요새 무엇 때문에 이슈가 되고 있느냐”고 물었습니다. 하지원은 기다렸다는 듯 “음… 길라임씨”라고 답했습니다. ‘시크릿 가든’의 길라임이 아닌 박 대통령을 지칭한 것 같았습니다. 그는 저녁을 먹으며 ‘뉴스룸’을 봤다고 했고, 길라임이라는 이름이 언급됐을 때는 놀랐다고도 했습니다. ‘목숨 건 연애’의 여주인공 이름을 두고는 “한제인은 (가명으로) 쓰지 마세요”라는 말도 빼놓지 않았죠.
김태진은 “하지원씨가 블랙리스트에도 있더라”며 민감한 이슈도 건드렸습니다. 자신도 블랙리스트에 이름이 오른 지 몰랐다는 하지원은 “언론을 통해 알게 됐다”며 “(국민들)마음의 슬픔이 클 텐데 저도 마음의 슬픔을 느끼고 있다”는 다소 과감한 발언도 했습니다. 현장에 있던 취재진은 놀라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하지원이 박 대통령과 비선실세로 드러난 최순실씨의 국정농단에 대해 속 시원한 발언을 해줬으니까요.
이날 제작보고회를 앞두고 하지원은 ‘정공법’을 택한 것으로 전해집니다. 굳이 취재진에 의해 질문을 받을 필요 없이 자신이 먼저 입장을 전하기로 한 것입니다. 고민이 많았을 것입니다. 하지만 20여년 간 언론과 대중을 상대해 온 하지원은 피하지 않았습니다. 현장에 있던 기자들에게 “역시 하지원!”이라는 반응이 나오게 했습니다.
김은숙 작가도 다르지 않았습니다. 22일 열린 tvN ‘도깨비’ 제작발표회 현장에는 200여명의 기자들이 자리를 가득 메웠습니다. ‘도깨비’는 KBS 드라마 ‘태양의 후예’로 한류 바람을 일으킨 김 작가의 신작이고 공유 김고은 등 유명 배우들이 대거 출연하기에 언론의 관심이 모일 수 밖에 없었습니다. 길라임 논란이 취재진 규모를 더 키우는데 큰 역할을 하기도 했습니다.
작정하고 첫 질문부터 김 작가에게 길라임 논란에 대해 물었습니다. 김 작가는 “처음부터 이러실 거예요?”라며 애교 섞인 투정을 부렸습니다. 그는 떨리는 목소리로 “뉴스를 통해 봤다”고 말한 뒤 “이런 시국에 제작발표회를 해서 마음이 불편하다”는 속마음을 털어놨습니다. 그러면서 전날 ‘도깨비’ 제작진과 회식을 할 때 제작발표회에 대해 고민했다고 했습니다. 길라임 논란에 대해 스스로 자유롭지 못할 것이란 걸 알았다고 합니다. 그는 “이번 드라마가 더 재미있을 것 같은 데 어떡하느냐”는 재치 있는 말도 했습니다.
이날 한 방송 관계자에 따르면 ‘도깨비’ 제작진 역시 길라임 논란에 대해 어느 정도 감수하고 있었다고 합니다. 특히 김 작가는 마음의 준비를 하고 단상에 올랐습니다. 피하지 않고 언론에 자신의 입장을 전하기로 말입니다. 그런데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논란의 당사자는 박 대통령인데, 정작 두 사람이 이토록 적극적으로 언론과 대중을 마주하니 말입니다.
정작 길라임 논란으로 비난의 대상이 된 박 대통령은 어떤가요. ‘침묵 모드’를 유지하고 있습니다. 지난 19일 서울 광화문 촛불 집회에는 ‘시크릿 가든’ OST 중 가수 김범수가 부른 ‘나타나’가 울러 퍼졌습니다. ‘왜 내 눈앞에 나타나’로 시작하는 노래인데 길라임 가명 논란을 일으킨 박 대통령에게 질타를 날리는 의미로 불려졌습니다. 시민들이 ‘나타나’로 박 대통령을 조롱의 대상으로 삼은 건 전날 청와대가 홈페이지에 올린 글 때문이기도 합니다.
청와대는 18일 홈페이지에 뜬금없이 ‘오보 괴담 바로잡기’라는 이름 하에 ‘이것이 팩트입니다’라는 코너를 마련했습니다. 이날 무려 10개의 게시글을 한꺼번에 올렸습니다. ‘최순실용이라는 침대 3개의 진실’, ‘대통령 대포폰 사용 발언은 공작정치의 전형’, ‘앞 뒤 얘기 잘라내고 만든 잠이 보약’, ‘브라질 문호의 소설 속 표현을 무속신앙을 몰아간 언론과 정치인’ 등 누가 봐도 낯 뜨거운 문장들이 줄을 이었습니다.
단연 눈에 띄는 건 ‘길라임은 병원 간호사가 만든 가명’이라는 해명글입니다. 길라임 논란이 신경 쓰이긴 했나 봅니다. 하지만 다른 글들은 ‘청와대 대변인 브리핑’ 발로 직접 해명을 했는데 어쩐 일인지 길라임 가명 논란에 대해서는 직접 해명글이 없습니다. ‘뉴스룸’이 제기한 박 대통령의 길라임 가명 보도를 명시한 뒤 중앙일보(18일자)가 보도한 ‘차움 이동모 원장 길라임은 직원이 만든 것’이라는 기사가 링크돼 있습니다. 이 기사는 차움의원의 한 직원이 임의대로 박 대통령의 이름을 길라임으로 기록했다는 이 원장의 인터뷰입니다. ‘청와대 대변인 브리핑’ 대신 중앙일보라고 명시한 해명글이 실소를 자아냅니다. 청와대가 확인한 것도 아니고 한 언론매체의 인터뷰 기사가 팩트라며 버젓이 게재한 겁니다. 자신들에게 불리한 기사는 공박하면서도 유리한 기사는 진실에 부합하다고 주장하는 청와대의 편의주의는 한 편의 코미디라 할 수 있습니다.
문제의 본질을 한참이나 비켜간 청와대의 답답한 ‘불통’은 더 한심스럽기만 합니다. 길라임을 사용하든, 강모연(‘태양의 후예’ 여주인공 이름)을 사용하든 관심 없습니다. 무엇을 숨기기 위해 가명을 사용해가면서까지 병원을 드나들었느냐는 게 질문의 핵심이니까요.
애먼 김 작가와 하지원도 자신의 입장을 밝혔습니다. 자신들의 신작을 소개해야 하는 자리에서 정치적으로 해석될 수 있는 발언을 당당하게 했습니다. 그렇다면 이제 박 대통령 차례입니다. 이들과 비교했을 때 더 명확하고 떳떳해야 할 대통령이 제대로 해명조차 못한다면 그만 물러나는 게 맞지 아닐까요.
강은영 기자 kiss@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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