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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조조정 실탄 급하다더니… 잠자는 자본확충펀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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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조조정 실탄 급하다더니… 잠자는 자본확충펀드

입력
2016.11.25 04: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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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부, 추경으로 국책銀 현금출자

한은은 대출기준 강화해 문턱 높여

정부ㆍ한은 스스로 무용지물 만들어

한국판 양적완화ㆍ발권력 논란 무색

사용도 안 하고 내년말 종료될 듯

국책은행의 구조조정 재원 마련을 위해 정부와 한국은행이 만든 자본확충펀드가 조성 5개월을 맞도록 단 한 푼도 집행되지 않고 있다. 올해 4월부터 3개월 간 재원마련 방안을 두고 정부ㆍ한은이 벌인 공방이 무색할 정도다. 심지어 당사자인 국책은행조차 “앞으로도 쓸 일이 없다”고 외면하고 있다. 정부ㆍ한은은 ‘금융 안전판’을 마련했다는 데서 애써 의미를 찾고 있지만, 애초부터 잘못된 출발이었다는 지적이 비등하다.

정말 필요했나

24일 재정ㆍ통화당국에 따르면 지난 7월 1일 설립된 자본확충펀드는 지금까지 한 건도 집행 실적이 없다. 한은 관계자는 “자본확충펀드 대출은 국책은행의 자금지원 요청이 있을 때마다 한은 금융통화위원회가 검토ㆍ승인하는 ‘캐피털 콜’ 방식으로 이뤄지는데, 이제까지 그런 요구가 전혀 없었다”고 말했다.

총 11조원 규모(한은 10조원+기업은행 1조원)의 자본확충펀드는 산업ㆍ수출입은행 등 기업 구조조정 주체로 나서는 국책은행의 조건부자본증권(코코본드)을 매입해 이들의 국제결제은행(BIS) 자기자본비율을 높여주기 위해 마련됐다. 구조조정이 본격화하기 전 국책은행의 재무건전성을 높여 보다 원활한 자금 공급을 할 수 있도록 하자는 취지에서였다. 때문에 펀드 조성 논의가 물꼬를 튼 지난 4월 박근혜 대통령이 “국책은행 지원여력을 선제적으로 확충해야 한다”고 강조하는가 하면, 유일호 경제부총리 겸 기획재정부 장관도 “기업 구조조정은 시간과의 싸움”이라며 적극 거드는 모습을 보였다.

하지만 정작 지원대상인 국책은행은 “펀드 조성 논의가 한창일 때도, 지금도 자본확충펀드는 필요가 없다”고 입을 모은다. 실제 산은의 BIS 비율(14.75%ㆍ올 6월 기준)은 정부 목표치(13.0%)를 훨씬 웃돌고 있다. 산은은 여기에 대우건설 매각 등으로 2020년까지 BIS비율을 지금보다 1.38%포인트 더 높일 계획이다. 산은 고위 관계자는 “올 상반기 대우증권 매각으로 4조원을 확보하는 등 앞으로도 돈이 부족해 구조조정을 못할 상황은 아니다”고 말했다. 수은 고위 관계자도 “시장에서 충분한 자금을 조달할 수 있어 자본건전성은 전혀 문제가 없다”고 말했다. 수은은 이날 자체적으로 5,000억원 규모의 코코본드를 발행해 추가 자본확충에 나섰다.

이에 대해 윤석헌 서울대 객원교수는 “구조조정의 방향, 정확한 필요재원 추산 등은 제쳐두고 대통령의 ‘한국판 양적완화’ 지원사격 발언 이후 누가 돈을 낼 것인가에만 치우쳤으니 제대로 논의가 될 수 있었겠냐”고 지적했다.

힘들게 만들고는 스스로 외면

발권력 동원 논란 등 갖은 고초 끝에 탄생한 자본확충펀드를 사실상 무용지물로 만든 건 다름 아닌 정부와 한은이란 지적도 나온다.

정부는 올 4월까지만 해도 “구조조정 재원 마련은 추가경정예산(추경) 편성 요건으로 보기 힘들다”(유일호 부총리)는 입장을 견지했다. 하지만 자본확충펀드 출범 후 한 달도 되지 않은 지난 7월 11조원대 추경 예산에 산은과 수은에 각각 4,000억원과 1조원의 현금 출자 방안을 포함시켰다. 한은 고위 관계자는 “정부가 현금출자를 보다 빨리 결정했다면 소모적인 논란도 없었을 것”이라고 말했다.

자본확충펀드 대출 기준을 엄격히 세운 한은에 대한 불만도 높다. 한은은 대출 요건에 펀드 대출금리가 시장금리보다 높아야 한다고 명시했다. 자구 노력 없이 손쉽게 한은에 기대려는 도덕적 해이를 막기 위해서다. 하지만 국책은행 입장에선 시장에서 더 싼 값에 자금을 조달할 수 있는데 굳이 0.2~0.3%포인트 더 비싼 금리를 내면서까지 자본확충펀드를 쓸 요인이 없다. 수은 관계자는 “쓸수록 부담이 커지는데 누가 요청하겠냐”며 “애당초 한은이 대출을 해주지 않겠다는 의도였다”고 꼬집었다.

이대로 사라지나

자본확충펀드의 운용기간은 내년 말까지다. 정부와 한은은 매년 말 검토해 펀드를 계속 운용할 것인지 정하기로 했으나 지금 추세라면 한 푼도 쓰지 않은 채 내년에 종료될 가능성이 크다. 한은 내부에서조차 “정부 출자로 자본확충펀드를 쓸 확률이 낮아졌다”는 평가가 나온다.

게다가 국책은행은 이미 “자본확충펀드를 쓰지 말자”는 식의 내부 방침까지 세워뒀다. 산은은 최근 마련한 쇄신안에서 자체 자본확충을 통해 재무건전성을 유지하기로 했다. 산은 고위 관계자는 이를 “자본확충펀드는 웬만해서는 쓰지 않겠다는 뜻”이라고 설명했다. 수은도 향후 자본확충은 자체 코코본드 발행으로 해결하기로 했다.

자본확충펀드 고사 위기에 기재부는 대책 마련에 나섰다. 기재부 관계자는 “한은ㆍ금융위원회와 자본확충펀드를 어떻게 활용할 수 있을지 협의해 볼 계획”이라고 말했다. 그러나 하준경 한양대 교수는 “국회 동의를 피하기 위해 꼼수로 만든 자본확충펀드 활용방안을 고민할 게 아니라 구조조정 과정에서 재정ㆍ통화 정책을 어떻게 운용할 것인지에 대한 원칙부터 세워야 한다”고 지적했다.

변태섭 기자 libertas@hankookilbo.com

김동욱 기자 kdw1280@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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