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덮어 놓고 낳다 보면 나의 인생은 망해. 덮어 놓고 낳다 보면 나는 경력단절녀. 몸 상하는 것도 비난 받는 것도 모두 나. 나도 사람이란다.”
지난달 29일 서울 종로구 보신각 앞에 검은 옷을 입은 여성 500여명이 모여 노래를 불렀다. 이들은 한 목소리로 “여성의 몸은 국가 통제의 대상이 아니다”, “나의 자궁은 나의 것”, “임신중단을 선택할 권리를 달라”며 현행 낙태죄 완전 폐지를 주장했다.
낙태죄를 둘러싼 여성들의 움직임이 예사롭지 않다. 이 거리 시위는 온 국민의 시선이 최순실 게이트에 쏠려 있는 와중에도 서울, 부산, 대구, 광주, 대전 등 각 지역으로 확산되고 있다.
여성들은 왜 검은 옷을 입었나
본래 '검은 시위'는 지난 9월 폴란드 여성들이 낙태 전면 금지를 발의한 정부를 상대로 검은 옷을 입고 대규모 시위를 벌이며 시작됐다. 시위 여성들은 정부에서 강제로 규제하는 여성 생식권에 대한 애도의 의미를 담아 검은 옷과 마스크를 착용했다. 비슷한 시기에 국내에서도 보건복지부가 인공임신중절수술(불법 낙태수술)을 집도한 의료인 처벌을 강화하는 내용의 의료관계 행정처분 규칙 개정안을 입법 예고했다가 철회했다.
현행 모자보건법상 낙태는 유전적 정신장애·신체질환, 전염성 질환, 강간·준강간, 근친상간, 산모의 건강이 심각하게 위험한 경우 등 다섯 가지만 예외적으로 허용되고 나머지는 불법이다. 2010년 낙태 실태 조사에 따르면 연간 추정 35만건의 낙태 중 5% 정도만 합법이고 95%는 불법이다. 의료계에서는 한 해 낙태 수술을 약 20만건으로 추정하는데 지난 5년간 낙태수술에 따른 의료인 행정처분은 16건이었다. 그래서 사실상 사문화된 법이라는 주장이 나온다.
▶ [영상] 세계 여성들이 보내는 편지
“나는 낙태를 선택했다” 경험이 울린 파장
‘낙태죄 폐지’에 대한 여성들의 공감대가 형성된 것은 낙태의 불합리성을 지적한 경험담이 확산됐기 때문이다. 불법 낙태수술에 대한 단속 강화 움직임이 일어나면서 사회관계형서비스(SNS)에 경험을 고백하며 현행 제도의 불합리성을 고발하는 여성들이 늘어났다. 특히 페미니즘 잡지 '젊은여자'를 펴낸 편집장 홍승은(28)씨가 한 인터넷언론에 기고한 ‘나는 낙태했다, 나는 불법이다’가 ‘검은시위’의 기폭제가 됐다.
홍씨는 낙태를 불법으로 규정한 법 때문에 많은 여성들이 ‘불필요한 괴로움’을 겪고 있다고 말한다. 홍씨는 “인공임신 중절수술이 불법이어서 수술을 해 줄 병원을 찾기 힘들다”며 “힘들게 찾은 병원에서 의료기록에 남을 수 있으니 현금으로 계산하라고 권한다”고 말했다. 그는 “기록에 남는다는 말 자체가 피임을 제대로 하지 못한 잘못에 대해 재확인하는 과정이어서 죄책감을 강요 받는 느낌”이라고 말했다.
만족스럽지 못한 의료서비스를 받아도 불법행위를 했다는 죄책감 때문에 선뜻 불만을 말할 수도 없다. 홍씨는 “미혼 기혼을 떠나 낙태를 경험하는 여성들은 낙태는 불법이자 비도덕적 행위라는 법적 제약과 사회적 낙인을 감내해야 한다”며 “그 과정에서 비난과 질타는 남성을 제외한 온전히 여성의 몫”이라고 말했다.
홍씨는 이 같은 경험을 고백한 후 지지도 받았지만 ‘몸 간수 잘해라’, ‘여자만 손해다’, ‘혼전순결이 답’이라는 반응도 많았다. 그는 “우리 사회에서는 여전히 여성의 섹슈얼리티에 대한 금기가 강하다”며 “임신과 출산, 낙태와 피임은 당사자인 여성의 삶과 직결되는 문제”라고 말했다. 따라서 그는 “누구나 삶을 선택할 수 있는 권리를 갖듯이 원할 때 낙태할 수 있는 권리 또한 여성의 기본권이나 다름 없다”고 주장했다.
“나의 자궁은 나의 것” 국가에 외치다
여성들은 이런 관점에서 정부의 불법 낙태 규제에 강하게 반발하고 있다. 특히 불법 낙태 규제가 정부의 오락가락하는 출산 정책에 따라 춤을 췄다는 점이 더 문제로 지적되고 있다.
그동안 산아제한을 강하게 밀었던 정부는 ‘낙태죄’와 관련된 논란이 일 때마다 형법에 관련 처벌 조항이 있는데도 단속을 하지 않고 ‘불법 낙태’를 눈감아왔다. 이 때문에 여성들은 ‘덮어 놓고 낳으면 거지꼴을 면하지 못한다’며 피임과 낙태를 부추기던 정부가 출산율을 끌어올리기 위해 단속을 강화하는 것은 여성의 임신·출산 선택의 권리를 침해한다는 주장이다.
한국판 검은시위를 기획한 여성단체 중 하나인 페미당당의 심미섭(24)씨는 “국가가 여성에게 모성을 강요하는 정책을 내놓으면서 여성을 주체로 인정하지 않는 태도가 문제”라고 말했다. 그는 “임산부용 지하철 좌석에 ‘내일의 주인공을 위한 자리입니다’라고 적혀 있는데 마치 여성이 아이를 운반하는 도구처럼 느껴지게 만드는 문구”라며 “여성을 아이를 낳는 도구가 아닌 결정권을 가진 주체로 봐 달라는 뜻에서 ‘검은시위, 오늘의 주인공을 위한 자리입니다’라는 피켓을 만들었다”고 설명했다.
국내에서 낙태 찬반 논쟁이 일 때마다 태아의 생명권과 여성의 자기결정권의 대결처럼 흘러가는 것도 문제라는 지적이다. 페미당당의 홍승민(25)씨는 “낙태를 윤리적 잣대에서 옳으냐, 그르냐 판단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출산과 양육할 수 있는 환경이 갖춰졌는지 판단하는 것도 개인이 선택할 문제”라고 말했다. 여성이 임신 중절을 결정하기까지 출산과 양육을 위한 사회적 토대 등 공적 환경도 함께 고려하기 때문이다.
이런 여성의 입장을 옹호하는 산부인과 의사들도 있다. 검은시위에 참여했던 윤정원 녹색병원 산부인과 과장은 “즐거운 마음으로 낙태하러 오는 여성은 단 한 명도 없다”며 “태아에 대한 안타까움, 본인이 처한 사회경제적 상황에 따른 양육 가능 여부 등 다양한 고민을 하며 수술대에 오른다”고 설명했다.
따라서 윤 과장은 ‘임신 중지권’을 허용하지 않는 현행 제도가 여성들의 삶에도 부정적 영향을 미친다고 본다. 그는 “임신 중절이 불법이어서 의대나 전공의 교육과정에서 소파수술보다 자궁에 더 안전한 흡입술을 가르치지 않고 있다”며 “건강에 해롭지 않은 최선의 진료를 할 수 없게 만드는 법이 비도덕적인 게 아니냐”고 반문했다.
무엇이 여성을 위한 일인가
반면 태아의 생명권 보호를 위해 낙태를 금지해야 한다는 반대 여론도 만만찮다. 태아 역시 독립된 생명체이며 최우선으로 보호돼야 할 천부권을 타고 난 만큼 낙태를 허용해서는 안된다는 주장이다. 낙태 반대론자들은 "법의 제한이 풀릴 경우 무분별한 낙태가 이뤄질 수 있다"고 우려한다.
그러나 현행 법과 국민들의 법 감정 사이에 괴리가 있다. 최근 한국갤럽이 전국 만 19세 이상 성인 남녀 1,018명을 상대로 설문 조사한 결과 응답자의 74%가 '필요한 경우 낙태를 허용해야 한다'고 답했다. 엄격하게 금지해야 한다는 응답은 21%였다.
이 같은 국민 의식을 반영하듯 여성들의 싸움에 연대하는 남성들도 있다. 검은 시위에 참여했던 남성인 김대욱(25)씨는 "여성이 아이를 낳고 제대로 기를 환경이 되지 않는 상황에서 무작정 낙태를 금지하는 것은 국가가 개인의 인권을 존중하지 않는 것”이라고 말했다. 여자친구와 함께 시위에 참여한 유길용(34)씨는 "단순히 태아의 생명뿐 아니라 여성의 건강권까지 고려해 생각해야 할 문제"라고 말했다.
검은 시위에 참여한 여성들은 낙태금지정책이 폐기될 때까지 계속 싸우겠다고 예고했다. 여성에게 온전한 권리란 늘 투쟁과 쟁취의 대상이었기 때문이다.
김지현기자 hyun1620@hankookilbo.com
최유경 인턴기자(이화여대 언론정보학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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