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실의 시대다. 국민은 지도자를 잃었고, 대통령은 권위와 신뢰를 잃었으며, 국가는 리더십을 잃었다. 2016년 10월 26일 우리 대한민국의 모습이다. 지지했던 국민조차 대통령을 찍은 머리와 손 탓을 하고 있는데도 대통령은 자신이 제일 억울하고 불쌍하다고 생각할는지 모르겠다. 전날 ‘대국민 사과’라고 이름 붙인 글에서 그런 속내가 드러났다. “저로서는 좀더 꼼꼼하게 챙겨보고자 하는 순수한 마음으로 한 일인데….” 제목은 사과였지만 내용은 변명이었다. 그조차도 불과 4시간 만에 ‘거짓’이란 수식어가 붙었다. 장삼이사도, 촌로도, 학자도, 종교지도자도 “이제 누가 대통령의 말을 믿겠는가”라고 말하는 이유다. (▶ ‘대국민 사과’ 전문)
그래서 물었다. 대통령의 하야나 탄핵이 답인가. 공교롭게도 우리 사회의 원로들은 모두 “그건 더 큰 혼란을 부르는 일”이라고 입을 모았다. 경제는 경제대로, 안보는 안보대로 벼랑으로 치닫는 ‘복합위기’의 시대 아니냐는 거다. 그런 위기의 시대에 국가 리더십 공백 사태는 그야말로 카오스(대혼란)를 초래할 수 있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다시 물었다.
광주대교구장인 김희중 대주교(한국천주교주교회의 의장)는 “단순하게 풀어가시면 좋겠다”고 조언했다. 고백성사의 기본은 다른 게 아니라고 한다. “잘못한 건 잘못한 그대로, 꾸밈도 감춤도 없이 모든 걸 털어놓는 게 고백성사다. 그에 따른 벌도 달게 받을 각오로.”
우리의 대통령이 과연 어제의 대국민사과에서 그랬는지 뼈 아프게 되새겨 봐야 한다. 국민 앞에 다시 서 모든 걸 털어놓는 용기가 필요하다. 대통령의 사과로 더 분노했는데, 다시 서지 못할 게 뭐가 있나. 잘못은 종교지도자도 한다. 교황도 그래서 무릎 꿇고 고백성사를 한다. 이미 박근혜 대통령은 국민 앞에 고해가 아닌 변명과 거짓을 고했다. 정치 원로들은 “되레 타는 짚에 기름을 부었다”고 통탄했다.
“지키려고 해선 안 된다.” 한때 지근거리에서 대통령을 도왔던 참모 출신의 여권인사의 말이다. “창피하다”는 말을 연신 내뱉던 그의 입에선 이런 당부가 나왔다. 박 대통령은 인정하기 싫겠지만, 이제 대통령의 말을 곧이곧대로 들을 국민이 있겠느냐는 거다. 대통령의 말과 행동, 옷차림까지 “또 최순실이 시켰나”라는 의심과 조롱이 따를 뿐이다(▶ 패션 코치 넘어선 막후 실세). 그의 설명은 이랬다. “권위와 정당성, 신뢰를 잃은 권력은 권력이 아니다. 대통령이되 대통령이 아닌 상태다.” 그러니 들어내고, 듣고, 나눠야 한다는 게 그의 조언이다.
청와대 참모진 교체는 시간을 끌거나 고민할 일도 아니다. 쇄신의 의지는 인적 개편에서부터 시작한다. 그는 “내각 역시 총사퇴하고 야당 의견을 들어 중립적인 거국내각으로 구성해야 한다. 그리고 모든 권한을 위임해야 한다”고 했다. 대통령은 최소한의 상징적인 존재로 남으라는 얘기다. 특별검사든 국정조사든 수단과 방법과 성역을 가리지 말고 조사해 진상을 규명해야 한다는 건 이미 여권 내에서도 입이 아프게 쏟아내고 있는 말이다.
임기 중 대국민사과를 가장 많이 했다고 꼽히는 지도자 중 하나가 김영삼(YS) 전 대통령이다. 그 중에서도 가장 참담했던 담화는 임기 말 차남인 김현철씨가 이른바 ‘한보사태’에 연루됐던 때로 기록된다. 단군 이래 최대의 부도 사태라는 한보 특혜대출 비리 사건과 관련해 아들이 특혜의 배후이자, 각종 이권과 인사 등 국정에도 개입했다는 논란이 거세게 일었다. 담화 전까지 천주교와 개신교, 불교의 지도자를 만나고도 YS는 쉽사리 결단을 하지 못했다고 한다. “내가 현철이를 잘 아는데, 걔가 그런 아이가 아니다.” 그런 YS에게 당시 공보수석이던 윤여준 전 환경부 장관은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지금은 국민이 믿는 게 진실입니다. 대통령께서도 그게 진실이라고 믿고 수습을 하셔야 합니다.”
지금의 박 대통령도 귀담아 들어야 할 충언이 아닐까. 국민이 보고 믿는 것이 진실이며, 거기서 출발해야 한다.
김지은 기자 luna@hankookilbo.com
▶ 문고리 3인방 vs 박지만 인맥 '권력암투의 재구성'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