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부가 주요 정책 추진과 각종 사회적 문제의 해결을 위해 재단을 만든다고 할 때 기업들이 필요한 기금을 내는 것은 일종의 관행처럼 자리잡아 왔다. 기업은 인허가권을 쥔 정권이 주도하는 재단에 ‘성의 표시’를 함으로써 각종 특혜를 받았고, 적어도 ‘괘씸죄’에 걸리는 일은 피할 수 있었다. 과거 권위주의 정권 시대 만큼 노골적인 ‘정경유착’은 아니지만 여전히 기업들은 정권의 요청을 거슬렀을 때 받을 지 모르는 불이익을 염려해 ‘보험용’으로 기금을 내놓고 있다.
정권의 재단 설립과 기업 모금으로 가장 논란이 불거진 것은 전두환 정권 시절 만들어진 일해재단이다. 전 대통령의 아호인 ‘일해’를 이름에 쓴 이 재단은 1983년 미얀마 아웅산 묘소 폭발사건 희생자 유족을 지원하고 장학 사업을 펼친다는 목적을 내세웠다. 그러나 전 대통령이 퇴임 후 정치적 영향력을 행사하기 위해 만든 것이란 의혹이 끊임없이 제기됐다.
더 큰 문제는 4년간 모금된 598억원의 기금이 대부분 재벌 기업들로부터 나왔고, ‘기업들의 자발적인 기부’라는 정권 설명과는 달리 강제성을 띄었다는 사실이다. 일해재단 발기인에는 당시 정주영(현대) 구자경(럭키금성ㆍ현 LG) 김우중(대우) 최종현(선경ㆍ현 SK) 양정모(국제) 회장 등이 참여했다. 당시 전국경제인연합회도 맡고 있던 정 회장은 88년 청문회에서 일해재단 기부금에 대해 “1차는 날아갈 듯 냈고, 2차는 이치에 맞아 냈고, 3차는 편하게 살려고 냈다”는 말을 남기기도 했다. 모금을 주도한 장세동 전 청와대 경호실장과의 대질 심문에선 “정신적, 분위기적 강제성을 느꼈다”고 증언했다.
사실 기업들이 가장 무서워하는 것은 ‘괘씸죄’다. 85년 전격 해체된 국제그룹의 경우 공식적으론 무리한 사업 확장에 따른 경영 부실이 몰락의 이유로 꼽히지만, 양 회장이 일해재단 모금에 소극적이어서 정권이 본보기로 희생양을 삼은 것이란 소문도 무성했다.
기업들의 ‘자발적 모금’은 최근까지도 논란이 되고 있다. 지난해 9월 박근혜 대통령이 “청년 일자리 문제 해결을 위해 국민들의 자발적 기부로 기금을 만들자”고 제안해 설립된 청년희망재단도 기대만큼 성과가 나타나지 않자 결국 기업들 참여가 독려됐다. 겉으론 ‘자발적 기부’가 강조됐지만 전체 모금 규모를 정부가 제시한 뒤 전경련이 기업별 할당액을 정해준 정황도 드러났다. 와병중인 이건희 삼성 회장이 사재 200억원을 ‘포괄적 위임’ 형태로 기부하고 그룹 임원들이 50억원을 더해 삼성그룹에서만 250억원을 먼저 내놓았다. 이에 현대자동차(200억원) SK(100억원) LG(100억원) 롯데(100억원) GS(50억원) 포스코(40억원) 한화(40억원) 두산(35억원) 효성(20억원) 등이 기업 규모에 꼭 맞게 기금을 내놨다. 이 과정에서 기업들은 임원들의 기부금을 직급에 따라 급여에서 일괄 공제하기도 했다. 전혀 ‘자발적’이지 않은 강제적인 모금이었던 셈이다.
재계 관계자는 “정말 자발적이라면 기업 내부의 자체 논의와 상향식 의사 결정을 통해 기금 규모가 정해져야 하지만, 통상 재계 1위인 삼성이 얼마를 낼 지를 정하면 나머지 기업들도 서열에 따라 내놓을 기금을 정하는 식”이라며 “이런 기준 보다 많이 내는 기업은 오너가 비리에 연루돼 수감중이거나 검찰 수사가 진행중인 기업, 각종 인허가 문제가 걸려 있어 ‘성의 표시’가 필요한 기업들”이라고 말했다.
한 대기업 관계자는 “이번에 문제가 된 미르나 K스포츠재단, 작년에 논란이 된 청년희망재단 등은 구체적으로 무슨 사업을 하겠다는 것인지 계획조차 불확실한 상태에서 기업들 모금이 진행됐다”며 “기업 입장에선 재단들이 무슨 사업을 하느냐 보다 얼마나 돈을 냈는지에 대해 정권의 눈도장을 받는 게 더 중요하다”고 말했다. 한준규 기자 manbok@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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