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진이란, 본진, 즉 이전의 큰 지진 다음에 따라서 일어나는 작은 지진을 가리킨다. 여진(餘震, aftershock)은 본진과 같은 지역에서 생기지만 진도가 본진보다 대체로 1 정도로 작은데, 본진에 필적하는 크기의 여진도 없지는 않다. 만약 뒤에 오는 지진의 크기가 애당초 본진이라고 여겨졌던 것보다 더 크다면 당연히 나중에 오는 것이 주된 지진으로 간주하여야 한다. 본진보다 먼저 오는 지진을 전진(前震, foreshock)이라고 한다.
지난 2일 저녁 경주에서는 진도 5.1의 전진이, 두어 시간쯤 뒤에는 진도 5.8의 본진이, 그리고 19일에는 진도 4.5의 여진이 발생했다. 그 사이에 모두 380건의 여진이 있었다고 한다. 앞으로 진도 5.8보다 큰 지진이 생기지 않는 한 19일의 지진은 여진인 것이다. 현재의 과학 수준으로는 진행 중의 지진들에서 어느 것이 전진이고 어느 것이 여진이라고 확정할 수 없다. 모든 것은 사후에 가서야 확정되는 것이다.
여진이란 본진 때 해소되지 못한 채 단층에 남아 있던 응력(應力, stress)이 발산될 때 에너지가 방출되면서 단층에 진동과 변위가 생기는 역학적, 지질학적 사건이다. 여진이 무서운 것은 앞의 지진 때 손상을 크게 입은 구조물들이 무너지지 않고 버티고 있다가 여진 때 무너지는 경우가 종종 있기 때문이다.
지진학 및 방재 시스템의 선진국인 일본에서는 지난봄에 발생한 구마모토 지진에서 진도 6.5의 지진 발생 후 기상청이 “앞으로 3일간 진도 6 이상의 여진 발생 가능성이 20%”라고 매우 정교한 발표를 했다. 일부 주민들은 ‘겨우 20%’라는 식으로 받아들여서 집으로 돌아와 머물던 사람 중 다수가 그 이후 발생한 진도 7의 본진 때 죽거나 다쳤다.
그 후 일본 기상청은 ‘여진’이란 표현과 ‘여진 확률’의 발표를 중지했다. 그 대신 큰 지진 발생 후 일주일간은 동일 규모의 지진에 대한 경계를 내보내고, 그다음의 상황에서는 ‘진도 얼마 이상의 지진 발생 확률은 평소의 몇 배’라는 식으로 공표하기로 하고 있다.
독일 철학자 칸트는 숭고미를 수학적 숭고와 역학적 숭고로 나누었다. 수학적 숭고란 대상의 크기를 가늠할 수 없을 때 느끼는 숭고함이고, 역학적 숭고란 대상의 위력이 크되 우리가 강제력을 주지 않을 때 생기는 숭고함이다. 역학적 숭고는 공포와 동시에 안전이라는 조건이 필요하다. 공포만을 느끼게 되면 숭고 체험으로 연결되지 못한다. 공포를 모르는 어린아이는 숭고미를 느끼지 못한다.
우리가 실제로 겪게 되는 지진이나 태풍 등이 숭고하게 느껴지지 않는 까닭은 공포만이 유발되기 때문이다. 발아래의 땅이 마구 흔들리는 상황에서는 아무리 거대하고 매혹적인 것이라고 하더라도 자연적 위력은 쾌감의 대상으로 전환될 수 없다. 방금이라도 내려앉을 것 같은 험준한 절벽이라든가 번개와 우레를 동반하는 거대한 먹구름 등은 우리를 매혹시키지만, 단지 우리가 안전한 곳에 있을 때만 그러한 것이다.
지진 규모가 1만큼 커지면 방출되는 에너지양은 지진파 진폭의 대략 31.6배나 커진다. 단층에서의 에너지 방출은 대부분이 작은 규모의 지진에서보다는 대규모 지진으로부터 발생한다. 지진 재해의 측면에서 대규모 지진 발생을 예측하는 일이 당연히 중요한데, 이는 활성 단층에 대한 다양한 전문적 연구에 의해서만 가능하다. 그래서 전문가들은 활성 단층 지도와 지진 재해 지도의 제작 중요성을 강조한다.
이번 경주 지진 사태에서 드러난 것은 정부의 방재 시스템이 여전히 엉망이라는 것이다. 정부의 일차적 기능은 국민의 생명과 재산을 지키는 것이다. 그것을 위해서 주권자이자 유권자인 국민은 세금을 내는 것이다. 심지어, 경주 지진에 대한 TV 보도에서는 일본의 TV들이 한국의 재난 주관 방송사인 KBS보다 더 빠르고 정확했다.
이번 여진 발생 후 초등학교 운동장에서 모포를 뒤집어쓴 채 떨고 계신 분들의 사진을 보면서 사회 전체를 근본적으로 안전하게 만드는 일이 무엇보다 시급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특히, 양산 단층과 울산 단층 주변의 핵 발전소들은 우리 모두의 문제다.
이재현 문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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