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환(tvN ‘응답하라1988’)이처럼 무뚝뚝하지도 않고, 수호(MBC ‘운빨로맨스’)처럼 어둡지도 않았다. 배우 류준열(30)은 사람을 만나고, 대화하는 걸 즐겼다. 말도 빨랐고, 짓궂은 질문이 나오면 “지금 야마(기사의 핵심 내용을 뜻하는 언론계 은어)를 생각하시는 것 같은데”라고 웃으며 너스레를 떨기도 했다. ‘아재개그’는 몸에 밴 것 같았다. ‘응답하라1988’에서 덕선(혜리)이와 안타까운 짝사랑에 그쳐 다른 작품에서 쌍방향 사랑에 대한 ‘한’이 있을 것 같다는 질문에 “한은 한국적 정서인데요”라고 망설임 없이 내뱉는 걸 보니, 썰렁한 농담을 입에 달고 사는 눈치였다.
‘운빨로맨스’의 종방(14일) 뒤 21일 서울 삼청동의 한 카페에서 만난 류준열에게서는 ‘그늘’을 찾을 수 없었다. ‘운빨 로맨스’를 끝낸 다음날 바로 부산으로 내려가 영화 ‘택시운전사’ 촬영에 합류해 고되지 않냐고 묻자 “제일 자신 있는 게 체력이고 몸 쓰는 일”이라며 웃었다.
말은 털털하게 하지만 고민은 많은 배우다. 류준열은 ‘운빨로맨스’에서 다른 배우들이 더운 6~7월 촬영에 반팔을 입을 때 매번 긴 팔 셔츠만 입고 카메라 앞에 섰다. 그는 “수호란 캐릭터의 연약함을 보여주기 위해 일부러 스타일리스트에 긴 팔을 부탁했다”고 말했다. 수호는 명석한 두뇌로 어려서부터 세상의 주목을 받지만, 친구들에게 따돌림을 당하고 부모님과의 갈등으로 사람을 믿지 못해 공황장애를 앓는, 사회성이 부족한 인물이다. 시청자로 하여금 캐릭터에 보호본능을 느끼게 하고 싶어 긴 팔 셔츠만 입고, 옷깃 단추도 채웠다는 게 그의 설명이다.
2015년 영화 ‘소셜포비아’로 본격적으로 연기를 시작한 이 2년 차 배우는 극 속 상황에 몰입할 때 경험에 의지한다. ‘운빨로맨스’에서 자신의 사무실에 소복을 입고 새벽에 몰래 들어 온 보늬(황정음)를 보고 놀라는 장면은 “어머니가 내 방에 갑자기 노크 없이 들어와 놀랐을 때”를 떠올리며 연기했다. 술이 약해 음주를 즐기지 않는 그는 드라마 속 만취 연기를 할 땐 “(대학)재수 시절”을 떠올렸다. 친구들과 맥주 한 잔을 하고 독서실로 돌아갔는데 취기를 이기지 못하고 그만 구토를 했던 ‘악몽’이다. 당시 류준열은 결국 독서실에서 쫓겨났다고.
이제 막 서른이 된 청년은 20대를 뜨겁게 살았다. 고등학교를 졸업한 뒤 시급 2,300원을 받고 편의점에서 아르바이트를 시작했다. 음식점(쌀국수) 서빙부터 공사장 일일 노동, 초등학교에서의 연기 지도 아르바이트까지 다양한 일을 했다. 스스로를 “아르바이트 인생”이라 표현한 이유다. 딱히 집안 형편이 어려워서가 아니라 스무 살이 돼 경제적으로도 자립해야 한다는 생각이 들어서 한 일이다. 류준열은 “배우를 꿈꾸며 돈벌이 문제로 심리적으로 지치지 않으려 꾸준히 아르바이트를 했다”며 “전단지 뿌리는 일 말고는 모두 여러 사람과 함께 일을 하는 아르바이트를 했는데, 이런 경험들이 연기하는 데도 도움이 되는 것 같다”고 말했다.
류준열은 아직도 카카오톡 단체채팅방에서 ‘응답하라1988’에 출연했던 동료배우들과 연락을 주고 받으며 친분을 이어오고 있다. “볼링을 치러가자”는 약속도 잡았다. ‘응답하라 1988’부터 ‘운빨로맨스’까지 비슷한 또래의 배우들과 연기해 온 그는 차기작인 두 영화에서 까마득한 선배들과 연기 호흡을 맞추며 보폭을 넓혔다. 류준열은 영화 ‘더 킹’에서 정우성, 조인성과 촬영을 했고, ‘택시 운전사’에선 송강호, 유해진과 촬영을 하고 있다. 대선배들과의 작업에 대해 류준열은 “조금 과장해 숨쉬는 것까지 구경할 정도로 선배들을 지켜봤다”고 했다.
“조인성 선배만 해도 벌써 연기 18년 차잖아요. 조인성 선배는 정말 작업에 진지하게 임할 뿐 아니라 신인 이상으로 노력을 많이 하시더라고요. 저도 그렇게까지 노력한 적이 없어 반성할 정도였죠.”
“너무 바빠 초심을 잃을 시간도 없다”고 농담한 류준열은 요즘 환경 보호 운동에 꽂혀 있다. tvN 예능프로그램 ‘꽃보다 청춘’ 촬영으로 올 초 남아프리카를 다녀온 뒤 부쩍 관심이 많아졌다. 미세 플라스틱으로 인한 해양 문제 등을 고민하며 한 매체에 ‘우리의 목소리가 작지만 큰 변화를 가져올 수 있다’는 내용의 칼럼을 쓰기도 했다. 류준열은 ‘운빨로맨스’ 에서도 지구온난화 이슈를 애드리브로 언급해 눈길을 끌기도 했다.
“환경 보호가 결국 약자를 생각하는 거잖아요. 예전엔 어려운 사람을 도와야 한다는 것만 생각했는데, 아프리카를 다녀오고 나서 자연에 대해 다시 생각하게 됐어요. 사람들의 무심함에 속수무책으로 당하는 게 자연이고, 동물이잖아요.” 한 시간 동안 웃음을 잃지 않던 그의 눈에서 장난기가 사라지는 순간이었다.
양승준 기자 comeon@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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