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려 3만권의 장서로 유명한 일본 서평가 오카자키 다케시는 책에 짓눌린 생활의 고충을 토로하기 위해 책 ‘장서의 괴로움’을 펴냈다. 저자는 여기서 책과 함께 하는 삶을 ‘연애의 괴로움’에 비유한다. 스스로 뿌린 씨앗이니 스스로 거둘 수 밖에 없다는 얘기다.
책에 애정을 가진 이들에게 책의 물성은 즐거움이자 고통이다. 한없이 무겁고 자리만 징그럽게 차지하는, 그러나 언제 다시 사랑에 빠질지 모르는 이 책들을 어쩌면 좋을까. 다큐멘터리 작가인 아내와 르포 작가 남편이 50대에 이르러 내 집을 짓기로 결심한 데에도 책을 위한 공간을 마련해주고 싶다는 마음이 컸다. “죽기 전에 한 번은 제대로 된 대우를 해주고 싶었다”는 아내의 말에선 비장함마저 느껴진다. 결국 1인 헌책방을 열어 책과의 이별을 감행한 오카자키와 달리 이들은 책과의 끈질긴 연애를 이어나가기로 했다.
책과 헤어지지 않기 위한 집 짓기
파주에 집을 짓기 전 부부는 두 번의 단독주택 생활을 거쳤다. 본격적인 내 집을 짓기 전 치밀한 시뮬레이션 과정을 가진 셈이다. 그럼으로써 알게 된 사실은 첫째 한국인은 실내 계단에 익숙하지 않다는 것, 둘째 전원주택에 흔한 잔디 깔린 마당을 둘 다 좋아하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집을 지으려고 사진을 많이 보다 보면 툇마루니 다락이니 이것저것 다 예뻐 보여요. 계단도 확실히 집을 예쁘게 만드는 요소지만 평생 아파트에서 산 몸에는 맞지 않더라고요. 마당도 담이 낮아서 누구나 들여다볼 수 있는 건 싫었어요. 우리가 원하는 집은 좀더 차폐적이고 자족적인 마당이 딸린 단층 주택이었어요.”
설계를 맡은 김현석 건축가(준아키텍츠)가 만든 공간은 옆구리에 중정을 낀 직사각형의 집이다. 특이한 건 창문이다. 창을 많이 낸 정도가 아니라 아예 벽 윗부분 3분의 1 정도를 전부 유리창으로 둘렀다. 이쯤 되면 채광이나 통풍 외 다른 목적이 있을 법 하다.
“두 분 다 출퇴근이 없는 프리랜서 작가라 집에서 작업을 하시거든요. 하루 종일 집에 있어도 바깥에 있는 것처럼 갑갑하지 않은 공간을 고민했어요. 그러려면 창이 중간에 끊기지 않고 이어지는 게 중요하다고 생각했습니다.”
연속된 창을 통해 쏟아져 들어오는 강력한 빛은 내부와 외부의 경계를 끊임없이 흐려 놓는다. 실내가 외부를 연상케 한다면 중정은 거꾸로 내부를 지향한다. 건축가는 “자족적” 마당을 원하는 건축주의 의견을 받아들여 사람들이 다니는 길목이 아닌 옆집 담벼락과 면한 쪽에 중정을 배치했다. 위로 하늘이 보이고 바람도 불지만 담벼락과 바싹 접해 있어 묘하게 아늑하다. 아내는 여기에 대나무 화분을 놓아 대가 바람에 스치는 소리를 집 안으로 들였다. “같은 외부라도 벽으로 둘러싸인 것과 마냥 펼쳐진 외부는 다르죠. 틀 안에 가둬 놓으면 그 풍경은 내 것이 되니까요.”
창이 많은 집에 흔히 생기는 단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벽에는 일반 집보다 두꺼운 단열재를, 유리는 3중유리를 사용했다. 집주인에 따르면 이전 집과 난방비에서 별 차이가 없다고 한다.
“트인 공간 금세 질려” 층으로 구획
이 집엔 벽이 없다. 50평 남짓한 집에 벽이 하나도 없게 된 건 일단 경제적인 이유에서다. 멋진 서재 다음으로 건축주가 원한 것이 한정된 예산에 맞춘 집이었고 이들은 벽과 문을 포기할 용의가 있었다. “우리에게 1순위는 넓은 서재와 작업 공간이었고 그 외 침실이나 옷방은 상대적으로 별로 중요하지 않았어요. 서재는 굳이 벽으로 막을 필요가 없으니 집에 벽이 없어도 괜찮겠다 싶었죠.”
‘짱 박힐’ 공간이 하나도 없다는 건 누군가에겐 중대한 문제지만 집을 작업실처럼 쓰는 이들에겐 별 일 아닐 수도 있다. 벽 없이 집을 지탱하기 위해 15층 건물에 쓰이는 철골 기둥 4개가 사용됐다. 벽 대신 공간을 구분하는 건 층이다. 건축가는 집이 마침 경사 지형에 있다는 점을 이용해 실내에 몇 개의 층을 만들었다. 현관을 열고 들어가 계단을 몇 개 내려가면 거실 겸 주방에 이르고 또 몇 개 내려가면 서재 겸 작업실에 도달하는 구조다.
사통팔달의 실내에도 ‘방 같은’ 공간이 하나는 있다. 건축가는 거실 한쪽을 수납장으로 두른 뒤 층고를 낮춰 폐쇄적이고 아늑한 공간을 만들었다. 부부가 작은방이라 부르는 곳으로, 손님이 올 때나 남편이 주로 애용한다. “집이 단층으로 탁 펼쳐져 있으면 처음엔 시원해 보이는데 의외로 금방 질려요. 벽이 없는 대신 높이 차이를 다양하게 해서 풍성한 공간감을 느낄 수 있게 했습니다.”
집의 주인공 격인 서재는 현관에 들어서자마자 정면으로 보이는 곳에 배치했다. 부부가 소장한 책을 일렬로 세워 재보니 총 76.5m. 앞으로 늘어날 책까지 더해 총 100m 길이의 서재를 짜기로 했다. 수납력 외에도 중요한 것은 무거워 보이지 않는 것이었다. 부부가 전에 살던 집의 서가는 대부분의 가정과 마찬가지로 바닥부터 천장까지 책이 꽉 들어차 있었다. “책이 가진 무게감이 있는데 이게 거기 사는 사람에게는 중압감으로 다가올 수 있어요. 바닥과 천장 쪽 책에는 손이 잘 안 가기도 하고요. 가장 무거운 걸 가볍게 만들려면 어떻게 할까 생각했습니다.”
건축가는 5단 서재를 바닥에서 50㎝ 가량 띄워 설치한 뒤 아래 부분에 창을 냈다. 위쪽에도 창이 있어 멀리서 보면 유리 벽에 서재가 달려 있는 모양새다. 하얗게 칠해진 집을 힘차게 가로지르는 책의 행렬은 화려한 한 폭의 그림이다. 애서가인 집주인에게 가장 잘 어울리는 그림이기도 하다.
서재 아래쪽에 낸 창으론 낯선 풍경이 들어온다. 눈 앞에서 나부끼는 풀, 지나가는 행인들의 발은 창문에 응당 담겨야 한다고 믿었던 산이나 건물과는 또 다른 감각을 일깨운다. “위쪽 창만 있었으면 시선이 위로만 트이기 때문에 감옥처럼 답답하게 느껴졌을 거예요. 하부창을 냄으로써 원경과 근경을 둘 다 확보한 거죠.”
책을 위한 집으로 시작했지만 집주인의 생활방식이 변수가 되면서, 집은 내외부의 경계를 무너뜨린 과격한 주택으로 완성됐다. 관습엔 과격하지만 주변에는 순응한다. 경사 지형을 따라 흐르는 집, 창을 따라 흐르는 빛, 벽을 따라 흐르는 책, 부부를 통해 흘러갈 이야기를 생각하며, 집의 이름은 ‘흐르는 집’으로 지었다고 한다.
황수현 기자 sooh@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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